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54화 (155/220)

154화 마지막 회의 (4)

유키의 등 뒤로 고함 소리와 더불어 의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숙하세요, 정숙. 다들 진정하세요!”

의장은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그 누구도 의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키는 소란을 뒤로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울려 온다.

지금껏 얼마나 흔들렸던가.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이었던가.

보수당 대표였던 아버지의 힘으로 청년당 의원 자리를 손쉽게 얻었지만, 유키는 지금껏 그 어떤 정치적 야심도 보인 적이 없었다.

재선도, 위원장도, 내각 참여도 바라지 않았으며, 의결에도 빠지기 일쑤였다.

술에 취한 채 환락가를 누볐으며, 덜떨어진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렸다.

“한심한 놈 같으니!”

아버지는 그런 유키를 늘 실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냐? 내가 언제까지 널 더 두고 보아야 하냔 말이다!”

그러면서도 결코 유키를 포기하지 못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 여겼고, 의회의 거물급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유키는 정치 지망생들이 주로 몰리는 플라토 아카데미가 아니라 공학도를 키우는 마이크로 아카데미를 택했다.

유키는 의사당의 정치인들을 혐오했다.

대회장을 빠져나온 유키의 앞으로 경비원 두 명이 다가온다.

“의원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둘은 표정이 좋지 않은 유키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유키는 대답 없이 가만히 그런 경비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메타휴먼들이 노동 대부분을 대체한 시대에 어째서 센트럴의 심장부에 인간이 고작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가만히 뒤돌아 대회장을 바라본다.

대회장에는 어째서 의원들이 직접 앉아 있는가.

홀로그램 기술이라면 직접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효율적으로 모든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칠 수 있다.

그러나 의원들은 비싼 연료비를 감수해 가며 의사당에 들어와 보좌관들을 시종처럼 거느리고, 로비스트들과 직접 만나 뒷돈을 받아 챙긴다.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의원들의 행태는, 아니, 의사당의 존재 자체가 이미 오래전 사라졌어야 할 역사 시대의 잔재에 불과했다.

의회 의원들은 부패한 귀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아니, 훨씬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천재가 유키의 눈앞에 나타났다.

누구든 호감이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혜로우며 기발한 천재.

그러나 때로는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이며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리더.

그는 지루할 뿐이던 유키의 일상을 바꾸었고, 졸업 후 몇 년 뒤에는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급기야 이처럼 멋진 판을 완성했다.

태일의 증언은 곧 그가 지금껏 해 온 일들에 대한 증언이었다.

“…의원님?”

경비원들이 가만히 서 있는 유키를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그러던 중 누군가 유키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때? 마음의 결정은 내렸어?”

그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유키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센트럴 오더를 위해, 센트럴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 동대륙에서 그 모든 일을 벌인 남자.

“아크… 탈로스.”

그가 유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크가 등장하자 경비원들은 황급히 물러났다.

경비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의사당 경비원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강한 완력과 빠른 순발력 따위가 아니다.

경비원은 오로지 의사당의 체면을 위해, 안전을 위해 배치된 장식품일 뿐이다.

들어도 듣지 못한 척, 보아도 보지 못한 척, 자신의 주제를 알 것.

그게 바로 의사당 경비원의 첫 번째 자질이다.

“언제 도착한 거야? 49구역에 갔다고 들었는데.”

유키는 애써 속마음을 감추며 가만히 아크를 마주 바라보았다.

“방금.”

아크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약간은 지쳐 보였다.

아니, 다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결 결과는 장담하기 힘들어.”

“누나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든. 아마 제법 많은 표가 돌아섰을 거야.”

“아니. 카렌 누님 때문이 아니야.”

“…….”

“몇 분 전, 안도가 데려온 사절단이 동대륙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증언했어.”

“사절단이라…….”

아크는 어째서인지 그리 놀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오히려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유키는 그런 아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결국 너에 관한 이야기였어. 아니, 아예 네 이름이 직접 언급됐지.”

“그랬군.”

“제법 많은 의원들이 너에 대한 체포와 조사를 요구할 거야.”

“…….”

“이번 표결에서 센트럴 오더가 발령된다 해도 청년당은 이번 증언을 거래 카드로 사용할 거야.”

“유키.”

아크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의사당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들어진 의사당 천장에는 50개의 문장이 원을 이루고 있었다. 대륙의 각 구역을 상징하는 문장들이고, 그 원의 중심에는 칼 한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참으로 기만적인 그림이다.

“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아크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다.

“네 말대로라면 난 이제 곧 체포될지도 몰라. 의회에서 이번 기회에 나의 권리를 전부 박탈하려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것들이 아냐.”

아크가 가만히 고개를 내려 유키 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때?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

“그래.”

유키가 조용히, 하지만 단호히 대답했다.

“난 너와 함께할 거야.”

“그럼 됐어.”

아크가 빙긋 웃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의사당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뭐, 뭐야?!”

“이게 무슨 소리지?”

흐리멍덩한 눈으로 서 있던 경비원들이 깜짝 놀라 사방을 뛰어다닌다.

쩌적, 쩌저저적!

의사당의 거대한 천장에 금이 갔다.

그렇게 부서진 천장으로부터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린다.

“무, 무너지고 있습니다!”

경비원들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와중에 아크가 유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같이 나가자.”

“아크,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제 센트럴에서 의회 따위는 사라질 거야.”

50개의 문장이 만들어 낸 원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 * *

증언을 마친 뒤, 태일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경비원들 중 그 누구도 태일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태일이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순순히 내려온 것만으로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의회 내부는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의원들은 저마다 고함을 질러 댔고, 태일을 향해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보좌관들 사이에 때 아닌 난투극이 벌어졌고, 추가로 대회장에 들어온 경비원들은 허둥대며 싸움을 말렸다.

민호, 카츠미, 페이진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태일에게 달려온다.

“제법인데? 솔직히 놀랐어.”

“이런 데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그러게나 말이야. 아주 제대로 한 방 날렸어.”

안도 쪽을 바라보니, 아예 넋이 나가 버린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긴 미리 약속된 연설문을 던져 버린 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으니, 어지간히 놀랐을 터다.

“자자, 여러분!! 진정하세요, 진정! 체면을 지키세요!”

의장이 의사봉을 쥔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지만, 의원들 중 누구도 의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악마 같은 놈들 같으니! 고작 센트럴 오더를 위해서 감히 그런 짓까지 벌였다니! 당장 청문회를 열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야 하오! 배후를 알아내야 해요!”

얼굴이 벌게진 개혁파 의원의 목소리.

“웃기는 소리. 저놈의 신분부터 제대로 입증하시오! 그러기 전까지 표결 따위 시작 못 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보수당 의원의 고함.

“어딜 그런 억지를 부려?! 표결을 막다니, 제정신이오?!”

당황한 와중에도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청년당 의원의 손가락질.

일대 혼란 속에서 태일은 가만히 안도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미안하게 됐어.”

“이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짓을…….”

“안도, 당신은… 아니, 의원들은 이해하지 못해. 센트럴 오더마저도 상대를 이기기 위한 수단 정도라 생각할 뿐이지.”

안도가 고개를 들어 태일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안도의 뒤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거냐? 이런 짓을 벌이려는 거였어?”

해리 의원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사나운 눈으로 안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참으로 잘하는 짓이구나. 이제 넌 우리뿐만 아니라 캐피탈 클럽까지 적으로 돌려 버렸다. 아니, 센트럴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게지.”

“…….”

“지금껏 네가 잘나서 우리와 네놈 세력이 균형을 이룬 줄 아느냐? 탈로스 가문이 중립을 취했기에 가능했던 게야. 하지만 후계자가 범죄자로 지목된 이 시점에도 그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으냐?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중립을 유지할 것 같아?”

안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해리의 눈은 붉게 충혈된 상태였고, 마치 겁에 질린 듯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안도가 막 고함을 지르려던 바로 그 순간.

쿠쿵!!

땅이 한차례 거세게 흔들렸다.

의원들 모두가 순간 균형을 잃었고, 한참 드잡이질을 하고 있던 이들은 꼴사납게 그 자리에 엎어져 버렸다.

“으앗!”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곧이어 의사당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보수당 의원 조안이 경비 책임자 앞으로 다가갔다.

책임자는 태일을 경계하고 있다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짝!

조안이 그런 책임자의 뺨을 다짜고짜 올려붙였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야! 빨리 모두를 대피시켜야 할 거 아냐?!”

조안은 들으란 듯 욕설을 퍼부었지만, 내심 지금의 상황을 반기고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대로 표결을 취소시켜 버리고, 센트럴 오더를 강행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경비원은 조안의 속마음도 모른 채 허겁지겁 목소리를 높였다.

“예, 옙! 지금 곧……!”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대회장 전체의 불이 꺼지며 공간 전체가 어둠에 잠겨 버렸다.

“뭐야! 불 켜!”

“경비! 경비원들은 뭐 하나?!”

그리고 잠시 뒤.

끼이이이… 쾅!

회장으로 들어오는 세 개의 문이 동시에 닫혀 버렸다.

줄곧 주변에 살피고 있던 민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테러야.’

지진 따위의 자연현상이 아니다.

불이 꺼지기 직전,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몇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계획적으로 대회장의 불을 모조리 꺼 버렸고, 이어 문까지 전부 닫아걸었다.

“젠장, 하필 무기도 없을 때!”

페이진과 카츠미 역시 테러리스트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서로 등을 맞댔다.

대회장 안에는 의원들이 보좌관으로 위장시켜 데려온 개인 경호원들이 숨어 있었다.

“의원님, 이쪽으로……! 목소리를 높이셔선 안 됩니다.”

그들 역시 상황을 인지하고는 고용주를 보호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의원의 경호원들은 당연하게도 전부 능력자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존재 때문에 민호의 감지 능력으로도 대회장에 숨어든 테러리스트들을 추려 낼 수 없었다.

쿠쿵! 쿠쿠쿵!

그 와중에 의사당 전체가 다시금 거세게 진동했고, 천장에서는 계속해서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의사당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가운데, 겁에 질린 의원들이 고함을 질러 댔다.

“무, 문! 문부터 열어!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할 거 아냐?!”

“지금 문을 열겠습니다! 잠시 비켜 주십시오!”

혼란 속에서도 의회 경비원 몇이 지참하고 있던 손전등을 켠 뒤,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사, 살려 줘! 으아아악!! 커허억!”

의장의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번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아악!”

문 쪽으로 내달리던 경비원들 역시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떨어뜨린 손전등의 빛이 마구 흔들리며 겁에 질린 의원들의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의장이 사용하던 확성기를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들 조용.”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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