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혐오의 도시 (3)
루키우스와 카심의 대화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사이, 안드레이는 자경단을 정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작은 방에는 두 노인과 야곱, 태일, 제인, 레이까지 여섯 명이 남아 있었다.
공사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루키우스가 그제야 태일을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아닙니다.”
“자네에게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자네 덕분에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지.”
감사를 표하는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카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한 일에 대해서는 제인 양에게 대강 전해 들었네.”
제인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았지만, 태일은 도리어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와중에 레이는 뭔가 못마땅한 듯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네가 여기에 온 건 50구역으로 이어지는 열차 운행을 재개하기 위해서라고 했지?”
분명 처음 목적은 그러했다.
열차가 끊어지며 혼란에 빠진 50구역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여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제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열차를 운행할 상황이 아니네.”
지금의 알마티는 사실상 경제가 완전히 마비되었고, 회사 역시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
더구나 센트럴에서는 사실상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차를 움직인다 해도 교역이 정상화되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센트럴 오더 최종 의결이 곧이라고 들었네만?”
“앞으로 3일 뒤예요.”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3일 뒤, 의회에서 센트럴 오더의 최종 발동 여부가 결정된다.
“청년당에서 센트럴 오더를 취소시키기 위해 표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은 그 결과를 알기 힘들어요.”
알마티의 반란 사건은 센트럴 오더 때문에 발발했다. 따라서 반란 소식은 센트럴 오더의 발동을 막는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수당에서는 도리어 알마티의 반란을 이유로 센트럴 오더의 강화를 주장할 것이다.
“나는 자네가 센트럴로 가서 우리의 입장을 증언해 주었으면 하네.”
루키우스가 태일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역시 동감이야. 제인 양의 말을 들으며 자네 외에 이 일을 해낼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네.”
그러나 정작 태일은 그런 두 사람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전 의회에 어떠한 인맥이나 정치 경험도 없습니다. 의회에서 저에게 발언 기회를 줄 리도 없습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제가 청년당 쪽에 추천서를 써 드릴게요.”
제인이 의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태일은 이마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태일은 한때 다른 세계에서 혁명군을 이끌고 센트럴을 붕괴시키려 한 사람이다.
그런 태일이 센트럴 의회에 서서 증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차라리 저보다는 여기 제인이 가는 편이 나을 텐데요.”
제인 역시 알마티의 상황을 모두 보았고, 탄탄한 정치적 인맥을 가진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인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 레이와 함께 동쪽으로 갈 거예요.”
“동쪽으로?”
“카렌과 만날 생각이에요. 50구역에서 조사하고 싶은 게 있어요.”
“하아…….”
태일은 한숨을 내쉬며 고집스러운 제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잊은 모양인데, 난 당신을 호위하기로 계약했어. 그러니 차라리 그쪽을 따라가는 편이…….”
“그건 내 역할이니, 신경 꺼도 좋아.”
레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태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똑바로 태일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당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군. 아니, 회피하는 건가?”
“…….”
“당신은 50구역에 소울벌룬이 퍼지는 걸 막았고, 마피아들 사이의 전쟁을 막았지. 49구역 용병들의 세력도는 당신 때문에 완전히 바뀌었어. 더 해 볼까?”
어느새 제인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자못 놀란 눈으로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나만의 힘이 아니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레이가 팔짱을 풀고는 태일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잘 들어. 당신이 어째서 자꾸 자신을 감추려 하고, 도망치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숨겨지는 일들이 아니야.”
실패한 혁명가.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
그저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맬 뿐인 패배자.
태일은 그렇게 자학하며 숨고자 했다.
이쪽 세계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애써 되뇌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 레이는 그런 태일을 비난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이 정도 안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어?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은 바보가 아니야. 이미 당신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손에 넣고 있을 거란 말이야.”
“동감이네.”
카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은 자네를 그냥 두지 않을 거네. 집요하게 쫓겠지.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거나 죽이려 할 거야.”
루키우스 역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태일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힘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을 거네.”
어찌 보면 무책임한 말이었다.
― 너는 강한 힘을 가졌다. 그러니 숨지 마라. 우리를 위해 앞으로 나서라. 우리를 위해 싸워라.
제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하네요. 지금 태일 씨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
“다들 태일 씨와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나요? 일주일? 한 달? 전 태일 씨를 안 지 고작 4개월 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센트럴에 맞서라고 강요하는 건가요?”
“제인…….”
“레이, 너도 마찬가지야. 태일 씨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그따위 협박을 할 수 있어?”
제인은 처음 만날 당시부터 놀라울 정도로 순진한 여인이었다.
약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강한 힘에 맞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내던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답답하다고 여길 것이다. 무모하다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제인의 의지는 몇 번이나 태일을 움직였다.
“그 정도면 됐어, 제인.”
“태일 씨,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요.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이 사람들은 당신의 입장 따위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다고요.”
“괜찮아.”
태일은 부드럽게 말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키우스와 카심은 태일의 시선을 피했고, 레이는 제인의 비난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러분의 말대로 하죠. 센트럴로 가겠습니다.”
“그건…….”
“이건 내 의지야. 더 이상 피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센트럴 의회에서 증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줘.”
모두의 시선이 태일에게 집중되었다.
제인은 그런 태일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알마티 에너지 광장 입구. 해가 지기 시작한 가운데, 자경대원 두 사람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망할 깡통 놈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몇 시간 전의 소요로 인해 자경대원 상당수가 부상을 입은 바람에 둘은 평소의 배에 이르는 시간 동안 경비를 담당해야 했다.
불만에 찬 둘은 뒤쪽 광장의 메타휴먼들을 힐끔거리며 연신 불만을 터뜨렸다.
“저놈들은 왜 자꾸 인간들이랑 섞여서 소동을 일으키는 거야?”
“그러게나 말이야. 빨리 도시에서 내쫓아 버리면 될 걸 굳이 광장에 모아 두다니.”
당장 지하 주민들이 머물 공간도 부족한 가운데 기괴하기 짝이 없는 메타휴먼들이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드레이 님도 조금만 참으라고 했잖아. 전부 도시 밖으로 내보내거나 할 거라고.”
“그래도 왠지 시장님이 놈들을 감싸고 도는 거 같단 말이지.”
“아무리 시장님이라도 놈들을 계속 비호할 수는 없겠지. 어? 잠깐. 저기, 누군가 오는데?”
거리 반대편에 괴상한 차림새의 세 사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거기! 당신들 뭐야?”
오전까지 들고 있던 빔 소드 대신 허접한 경찰봉을 집어 들어 셋을 향해 내밀었다.
메타휴먼들 때문에 모처럼 얻은 장비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쳇, 가오 없이 이게 뭐람.”
가까이 다가오던 셋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신태일이 여기에 있나?”
“누구? 이 안에는 메타휴먼들 밖에 없으니, 다른 곳에 찾아가 봐.”
“무슨 소리야? 분명 여기에 있다는 얘길 듣고 왔는데.”
뒤쪽에 선 젊은 여인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아, 이젠 별것들이 다 와서 귀찮게 하네. 아가씨, 여기 없다니까. 빨리 안 꺼져?”
경비를 서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던 찰나에 웬 이상한 이들이 심기를 건드리자 화가 난 자경단원이 짐짓 경찰봉을 겨누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선두의 침착해 보이는 사내가 조용히 물었다.
“루키우스 씨는 안에 있나?”
순간, 자경단원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뭐? 아니, 당신은 뭔데 시장님을 찾아? 시장님이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
“이, 이봐.”
“뭐야, 왜?”
소매를 붙잡은 동료의 제지에 뒤를 돌아본 자경단원은 바로 뒤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시, 시, 시장님!”
루키우스와 야곱, 태일까지 모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루키우스는 얼어붙은 경비들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태일을 바라보았다.
“자네 일행들이지?”
“네, 맞습니다.”
“언제 자네들과 식사 한 끼 했으면 좋겠군.”
“조금 여유가 생긴다면… 그렇게 하시죠.”
루키우스는 태일을 향해 힘없이 웃어 보인 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루키우스를 따르던 야곱은 제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은 자경단원 둘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너희 둘, 조금 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잠시 뒤 설명을 듣도록 하지.”
둘은 야곱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태일은 자신을 찾아온 민호, 카츠미, 페이진을 보며 어째서인지 반가움을 느꼈다.
함께 걷는 알마티 거리가 꽤나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정이 든 걸까.
아니, 언제부터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된 걸까.
“다들 피곤해 보이네.”
“당연하지. 하루 종일 자경단과 곳곳을 뛰어다녔거든.”
“지하 놈들, 하나같이 막무가내야. 아주 그냥 고삐가 완전히 풀려 버렸어. 망할 놈들. 거의 매 초마다 사고를 치고 있어.”
“프랑켄은?”
“다빈치 안에 처박혀 있던데,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어.”
“그렇게 여유로우면 도시에 들어와서 우리나 좀 도울 것이지.”
민호는 불만을 쏟아 내는 페이진을 보고 피식 웃은 뒤, 태일에게 말했다.
“알마티에 얼마나 더 머무를 생각이야?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아?”
셋 역시 열차의 운행 재개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센트럴 오더로 군이 움직인다면 그때 알마티와 함께 행동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알마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일 떠날 거야.”
“그래, 좋은 생각이야.”
“반가운 소리군. 빨리 돌아가자고. 이 망할 도시 더는 있기 싫어.”
태일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난 50구역이 아니라 의회로 갈 거야.”
태일의 말에 밝아진 셋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뭐라고?!”
“어디를… 간다고?”
셋은 눈을 크게 뜬 채 태일을 바라보았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