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38화 (139/220)

138화 혐오의 도시 (2)

“자네…….”

루키우스가 갑자기 나타난 태일을 어두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압도적인 힘을 내보이면서 일시에 광장의 사태를 진정시키고 루키우스를 구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런 태일에게 어째서인지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힘, 그리고 카리스마.

이런 남자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태일이 가만히 뒤돌아서더니 루키우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득이하게 개입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태일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처럼 깍듯한가.

어째서 자신을 애써 지키려 하는가.

온갖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대화를 주고받기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저 친구는… 죽은 건가?”

“…….”

태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루키우스는 전기 톱날을 들이밀던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결국 부상자가 아닌 사망자가 나오고 만 것이다.

루키우스는 태일을 음울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자네의 힘은… 감당하기 힘들군.”

메타휴먼들이 보는 앞에서, 더구나 메타휴먼이 살해당한 현장에서 루키우스는 태일에게 결코 친근하게 대할 수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태일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대답할 뿐이었다.

루키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은인에게 모욕에 가까운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시장님…….”

안드레이가 걱정스레 루키우스를 바라본다.

루키우스는 그런 안드레이에게 차갑게 말했다.

“안드레이, 다시는 메타휴먼들 앞에서 그 무기를 꺼내지 말게.”

“하지만 시장님……!”

“주민들을 향해 겨눌 무기가 아니야.”

빔 소드와 레이저 건은 알마티 LAPD가 사용하던 무장으로, 본래는 군용 무기의 일종이었다.

전기 충격기와 경찰봉, 경고 사격용 권총 수준의 무장만을 갖춘 타 지역 경찰과 차별화된, 알마티 LAPD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강력한 무장으로 인해 알마티에는 공포정치와 폭력적인 통제가 자리 잡았고, 급기야 무너졌다.

그리고 이제 그 무기가 다시금 메타휴먼들에게 겨눠진 것이다.

메타휴먼들의 분노가 커진 이유 역시 과도한 무장 때문일 터였다.

“무기들을 전부 회수하도록 해. 무장 수준은 다른 구역의 경찰 수준이면 충분하네.”

“하지만 시장님, 그런 수준으로는 결코 메타휴먼들을 통제할 수…….”

“저들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야.”

루키우스가 잘라 말하자, 안드레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안드레이의 얼굴에는 명백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

루키우스는 다시금 탱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들에게는 미안하네. 우리에게는 결코… 자네들을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탱크는 그런 루키우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뒤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그럴까?”

멈춰 서 있는 자경단원들 사이로 한 노인이 야곱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카심…….”

얼굴 곳곳이 푸르딩딩하게 멍든 노인이 냉정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어째서인지 제인과 레이가 따르고 있었다.

카심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에너지 광장 좌측의 거대 터빈 아래쪽, 작은 휴게실을 가리켰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저기로 가지.”

그러고는 태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 자네. 자네와도 얘기를 좀 나누고 싶군.”

발전소의 경비원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마련된 작은 방에는 지저분한 이불과 선풍기, 약간의 조리도구 외에는 쓸 만한 집기조차 없었다.

루키우스는 초라한 공간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카심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여기 머물렀던 건가?”

“흥, 내가 지금껏 어떤 곳에서 살아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지하 쓰레기장 동굴에 비하면 여긴 궁전이라네.”

“…미안하군.”

루키우스는 지난 이틀간 카심에게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루키우스를 따라 방 안에 들어온 안드레이와 야곱 역시 생각보다 협소하고 초라한 카심의 주거 환경에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카심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네.”

“…….”

“문제는 바깥에 있는 녀석들이지.”

카심의 말에 방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바깥에 모인 메타휴먼들은 지난 이틀간 줄곧 에너지 광장에 모여 지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격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상에 올라온 것은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기 위함이었네.”

“카심…….”

“그런데 이 꼴이 뭔가? 자네들은 마치 짐승을 가둬 두듯 아이들을 광장에 몰아넣은 채 감시하고 있네. 그뿐만 아니야. 이 근처에서 벌어진 모든 폭력 사태를 모조리 우리 탓으로 돌리고 있어.”

“그건 메타휴먼들이 공격을 가했다는 증언이…….”

“그래서 이쪽을 그렇게 몰아세웠는가?”

안드레이의 항변에 카심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먼저 공격을 가하는 쪽은 항상 인간들이었어. 집단으로 공격해 부수러 들거나, 악마라 부르면서 기름을 뿌리고 불태우려 했지.”

“…….”

안드레이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도 인간이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매서운 눈으로 그런 안드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경단은 공정하게 우리를 대해 주지 않았네.”

카심의 말처럼 자경단은 지하 주민의 입장만 대변했으며, 폭력을 행사한 메타휴먼들을 일방적으로 추궁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은 대개 인간들이었지만, 자경단은 그저 메타휴먼을 향해 무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결국 지상에 올라온 메타휴먼 사이에서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 와중에 인간과 메타휴먼을 중재하던 카심이 공격당하자 조금 전과 같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원하는 게 뭔가?”

“머무를 공간과 자유가 필요하네.”

카심이 딱 잘라 조건을 말했지만,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피로가 떠올랐다.

“카심, 자네도 알지 않나. 지금 알마티에는… 집이 부족해.”

주택과 공간 문제는 알마티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지하 도시에서 한꺼번에 몰려 올라온 주민들은 당장 머무를 집이 없었고, 본래 지상에 머무르던 주민들은 저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지하 주민 일부는 마치 점령군처럼 남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행패를 부렸고, 빈 가게와 공공시설들에는 온갖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찼다.

이틀 사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대다수는 그저 알마티 거리를 차지하고 앉아 생활했지만, 그조차도 오래 유지될 수 있는 방식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타휴먼을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우리를 이곳 광장에 가둬 두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네. 자유롭게 움직이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 해.”

그러나 이번에는 야곱이 그런 카심의 말에 반발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주민들이 메타휴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메타휴먼들 역시 위험해질 겁니다.”

메타휴먼이 격리된 와중에도 일부 극단적인 자들이 심심찮게 테러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만약 메타휴먼이 자유롭게 알마티 거리 곳곳을 누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새 카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고, 실내에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제인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도시 장벽 외부를 활용하면 어떨까요?”

“외부?”

“숲을 비롯해서 꽤 많은 미개발 지역이 있잖아요.”

역사시대 말기 요새 도시로 구축된 알마티는 장벽 바깥 산간지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벽 바깥 땅에는 도로와 철로가 깔려 있지만, 애당초 소유권조차 정해지지 않은 땅이었다.

“대체 어느 세월에 거기를 개발하겠습니까?”

안드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루키우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좋은 생각이야. 그래, 애초에 장벽 내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카심이 그런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우리를 도시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건가?”

“자네들만이 아니야. 지하 주민들 역시 함께 밖으로 나가서 집을 짓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지.”

야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다들 장벽 안에 머물고 싶어 할 겁니다.”

알마티에는 공식적으로 귀족이나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장벽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암묵적인 계급이 정해졌다.

가장 내부에는 리치 타운이 존재하며, 엘리트 가문들이 살아간다.

중심부에는 회사들이 여럿 위치하고, 뛰어난 전문가들과 고위직 인사들이 밀집해 살고 있었다.

도시 외곽으로 갈수록, 장벽에 가까워질수록 소득 수준은 낮아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람에 대한 대우와 시선이 달라진다.

지하 도시 주민들은 장벽 끝까지 밀려난 끝에 더는 갈 곳이 없어지자 지하로 내던져진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과연 장벽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루키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제가 필요할 게야.”

“시장님?!”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하지.”

루키우스의 파격적인 발언으로 방 안이 침묵에 잠겼다.

장벽은 오랫동안 알마티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그 장벽으로 인해 알마티 내부에 뒤틀린 혐오가 자라났다.

장벽 안에 수용되지 않는 이들은 땅속에 처박혔고, 장벽 바깥의 세상과 격리되었다.

이제 루키우스는 그런 장벽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루키우스를 바라보던 카심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런 조건이라면 따르지.”

안드레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루키우스와 카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센트럴이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벽을… 부순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 센트럴의 병력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센트럴의 주력은 항공이야. 순양함 한 척이면 구시대 장벽 따위는 아무 의미 없다네.”

역사 시대가 끝나며 장벽 역시 그 의미를 잃었다.

이젠 그저 사회를 격리하고, 차별을 키우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루키우스와 카심은 일단 결정을 내리자 빠른 속도로 대화를 이어 갔다.

“대강 얼마나 많은 부지와 주택이 확보되어야 할지 계산하는 게 먼저겠군.”

“일주일 이내에 끝내 보도록 하지.”

“가능하겠나?”

“자네와 메타휴먼들이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네.”

“자경단들이 우릴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조용히 지내도록 하지.”

“좋아. 일단 계획을 세우기 위해 건축과 토공 장인들을 불러 모아야겠지만, 결국 공사가 시작되면 메타휴먼의 힘을 빌려야 할 거야. 도시 바깥에서 철로나 도로 공사, 운송에 관여하던 기체들이 있긴 하네만…….”

“우리도 공사에 참여하겠네. 이참에 알마티에서 통제하던 메타휴먼들을 한번 살펴보고 싶거든.”

빠른 속도로 계획을 세워 가는 두 노인의 모습은 마치 젊은 청년처럼 보일 정도였다.

안드레이와 야곱은 그런 노인들의 대화에 어느새 홀린 듯 빠져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인이 태일 옆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루키우스 시장님 저분 정말 대단한데요?”

태일은 그런 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키우스를 반드시 살리려 한 이유. 그건 오로지 그만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루키우스가 기어코 살아남았다면, 태일이 겪은 역사 또한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키우스는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레이는 그런 루키우스와 카심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게 의미 있는 행동이었으면 좋겠군.”

약 세 시간 전, 전 대륙에 센트럴 총동원령이 하달되었다.

센트럴 오더의 발령 직전, 최종 준비 단계에 이른 것이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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