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동맹 (1)
역사 시대가 끝나며 제국들의 아귀다툼은 센트럴에 의해 종결에 이르렀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센트럴조차 어쩌지 못한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에 대한 믿음, 즉 종교였다.
알마티의 남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역사 시대 2천여 년 동안 인간들이 숭배해 온 신의 흔적들이 폐허인 상태로 남아 있다.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 신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은 모조리 센트럴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신에 대한 인간의 구도(求道) 행위 자체를 막을 수 없었다.
20구역에서 30구역까지 개편된 대륙 남서부에는 여전히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신에 대한 설화가 은밀히 전승되었고, 신의 경전 역시 온갖 필사의 형식으로 집요하게 살아남았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한다 해도 죄인은 ‘순교자’로 존경의 대상이 되며 신도들은 더욱더 강력하게 집결한다.
결국 센트럴은 종교의 발상지인 대륙 남서부 주민들을 전 대륙 곳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10개 구역에 이르는 거대한 땅에서 사람들이 사라져 갔고, 교통이 끊어졌으며, 교역도 중지되었다.
관리되지 않은 잡초가 무성히 피어났고, 야생동물들이 버려진 신전과 인간의 도시를 차지했다. 땅 자체가 사실상 텅 비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센트럴의 정책 덕분에 대륙 남서부는 신성한 땅으로 알려졌고, 대륙 곳곳에 흩어진 신도들이 남몰래 대륙 남부로 순례를 떠났다.
그 와중에 대륙의 도망자들 역시 버려진 땅으로 숨어들었다.
보니와 함께 알마티를 빠져나온 클라이드는 대륙 남서쪽, 도망자들의 땅이자 순례자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걷는 동안 인간의 백골이 꽤 자주 목격되었다.
대륙 남서부로 향하는 길은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에게는 꽤 힘든 경로였고, 제법 많은 순례자가 길을 헤매다 목숨을 잃곤 했다.
클라이드는 육포나 물을 비롯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한 뒤 체력을 아껴 가며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후덥지근한 기후와 계속해 이어지는 척박한 광경에는 절로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보니, 힘들지 않아?”
“아니, 전혀!”
보니는 시종일관 즐거워 보였고, 사소한 것들에도 흥미를 가졌다.
자그마한 벌레의 움직임에도, 낯선 식물과 버섯의 화려한 무늬에도 감탄하였으며, 심지어 백골 사체에까지 관심을 갖고 유심히 살피곤 했다.
“여긴 대퇴부… 흠, 이 사람 척추가 썩 좋지는 않았네. 허리 부위가 부자연스러워.”
“그, 그래…….”
처음에는 그저 클라이드 자신을 위해 지친 기색을 숨기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래지 않아 보니가 지금의 도보 여행을 그 누구보다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지친 쪽은 보니가 아닌 클라이드였다.
“휴, 좀 쉬었다 갈까?”
“뭐, 오빠가 힘들다면 그렇게 하자!”
꽤 창피한 상황이지만, 클라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무더위는 꽤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오빠.”
“응?”
나무에게 기대앉은 클라이드에게 다가온 보니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여기가 바싹 말라 있는 느낌… 이게 ‘갈증’인가? 분명 수분이 없을 리 없는데, 느낌상으로는 신기하게도 수분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목마르다는 말이지?”
클라이드가 허탈하게 웃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수통을 내밀었다.
정말이지, 적응되지 않는 화법이었다.
아니, 사실은 정말 궁금해서, 신기해서 한 말일 테니 화법이라는 단어도 썩 어울리진 않았다.
“너무 많이 한꺼번에 마시지…….”
꿀꺽꿀꺽꿀꺽.
“…말라고 하려 했는데, 다 마신 거 같네.”
클라이드가 피식 웃으며 비어 버린 물통 안쪽을 들여다보는 보니를 바라보았다.
“음, 이젠 괜찮아진 거 같아.”
“그렇겠지, 그렇게나 잔뜩 물을 마셨는데. 어째 내 몫은 남겨 두지도 않고 다 마시니…….”
어릴 적 보니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었고, 말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줄곧 센트럴에 의해 쫓겨 다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보니는 달랐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곧바로 내뱉고, 공감 능력이 결여된 듯 보였다. 낙천적이고 쾌활하지만,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더욱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그런 위화감을 애써 무시했다.
보니는 보니다. 그녀는 클라이드를 기억했고, 과거에 대한 기억 역시 갖고 있었다. 비록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보니, 다시 출발하자.”
“벌써?”
땅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을 관찰하고 있던 보니가 아쉽다는 듯 클라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조금은 서두르는 편이 좋겠어.”
물을 다시 조달하려면 아직 대략 두 시간은 더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클라이드는 갑작스러운 기척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스스스스스…….
야생동물 따위가 아니다.
보니 역시 그 기척을 느낀 듯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취가… 나.”
보니의 중얼거림은 꽤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진득하고 끈적한 소울의 기운. 그것은 마치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연상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힘은 무겁고도 둔탁했다. 어쩌면 무한에 가까운 클라이드의 소울을 넘어설 정도인지도 몰랐다.
“움직이지 마, 보니. 위험해.”
“아냐, 오빠. 이미 늦었어. 이 주변은… 이미 그녀의 영역이야.”
“그녀?”
“…….”
보니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담담한 눈으로 나무 뒤쪽, 잡초 가득한 수풀을 바라보았다.
수풀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미끈거리며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수풀 곳곳에서 시꺼먼 재가 떠올라 근방 대기 중으로 흩어진다.
여전히 더운 날씨이지만, 순식간에 기온이 몇 도는 떨어진 듯 오한이 느껴졌다.
곧이어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고개를 든다.
“뱀……?!”
아니, 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눈앞에 드러난 아가리 크기라면 웬만한 성인 남성 따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였고, 길이 역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츠츠츳!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보니와 클라이드를 빤히 바라본다.
그 노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클라이드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깐이지만, 그 눈에서 느껴진 것은 틀림없이 최면술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보니, 녀석의 눈을 똑바로 보지 마.”
보니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클라이드가 입술을 깨물며 보니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보니는 미동도 없이 뱀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감이 꽤 좋은 아이들이구나.”
그런 여인의 목소리에 답한 것은 보니였다.
“메데이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클라이드의 온몸이 굳었다.
메데이아 바토리.
분명 클라이드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바토리 일족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이자, 악몽과도 같은 존재. 대량 학살을 즐기는 전쟁의 신.
“내 이름을 아는구나?”
메데이아 본인 역시 보니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데 꽤 놀란 듯했다.
그때, 언제부터인지 뱀의 몸통 위에 걸터앉아 있던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다가왔다.
검은 후드로 머리를 감추었지만, 황금빛 머리칼이 가슴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후드 안쪽에서 빛나는 눈동자 역시 바토리 일족 특유의 황금빛을 띠고 있다.
“보아하니 바토리 일족의 후손 같은데, 날 기억해 주다니 기쁘구나.”
클라이드는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머스킷을 움켜쥐었다.
그런 클라이드의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데이아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알마티에서 너희들의 기척을 눈치챘을 때, 꽤 기대가 컸단다. 그런데…….”
잠시 멈춘 메데이아의 목소리가 어둡게 내리깔렸다.
“붉은 눈동자라……. 너희는 정말 인간이 맞니?”
“우리는… 인간이야. 바토리 일족에서 태어났어.”
클라이드의 대답을 들은 메데이아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인간이라는 말이지? 심지어 나의 후손들이고. 그럼 어째서 나의 후손들이 센트럴의 개가 되었을까?”
“우리는 더 이상 센트럴에 속해 있지 않아.”
클라이드는 이를 악물고 항변했다.
그사이, 주변의 재들은 더욱 짙게 사방을 감쌌고, 주변을 감싼 기운 역시 더욱 커졌다.
그러나 정작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다시금 밝아졌다.
“오해하지 마렴. 난 너희들을 타박하러 온 게 아니야. 죄라면 너희가 아니라 일족을 지켜 내지 못한 어른들에게 있는 거지.”
“…….”
“하지만 묻고 싶구나.”
어느새 클라이드와 보니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메데이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너희는 여전히 바토리 일족이니?”
가벼운 질문처럼 들렸지만, 클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어떤 답변이 나오느냐에 따라 자신과 보니의 삶과 죽음이 결정될 것이다.
클라이드는 대답 없이 가만히 메데이아를 노려보고 있는 보니를 힐끗 바라보았다.
만약 혼자라면, 홀로 메데이아와 만났다면, 그녀의 도발에 선뜻 응했을 것이다.
호승심이든, 힘에 대한 자부심이든 눈앞의 전설과 겨루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곁에는 보니가 있었다.
전투에 잘못 휘말릴 경우, 보니와 다시 헤어지거나, 심할 경우 보니를 잃을 수도 있다.
클라이드는 감히 그런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허리춤의 머스킷에서 손을 뗀 클라이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바토리의 자손들이야. 그걸… 잊지 않았어.”
클라이드를 바라보던 메데이아가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다행이구나.”
그러나 바로 그때, 보니가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린 여행 중이야, 아줌마.”
“보니!”
알마티의 신이자 악마에게 ‘아줌마’라니.
깜짝 놀란 클라이드가 보니를 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보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행을 방해하지 말아 줘. 만약 같이 가고 싶다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메데이아의 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당돌한 보니의 말에 메데이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본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는지, 억지로 친절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럼 꼬마야, 너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거니?”
“우리? 글쎄… 오빠, 어디로 가자고 했지?”
천진하게 물어 오는 보니를 보고 있자니 클라이드의 입이 바싹 타들어 갔다.
“순례자의 땅으로…….”
“아아, 도망자의 땅 말이지?”
메데이아가 빙긋 웃으며 클라이드의 말을 끊었다.
“그건 다행이네. 마침 가는 방향이 같은 모양인데. 어떠니, 꼬마야?”
“뭐, 나야 같이 가도 상관없어. 오빠는 어때?”
“하아…….”
클라이드는 또다시 자신에게 공을 돌리는 보니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메데이아는 젊은 동행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쁜 듯 손을 들어 올렸고, 곧이어 거대한 뱀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개하지. 나의 친구, ‘요르문간드’야.”
메데이아라는 이름보다 더욱 유명한 이름이 바로 요르문간드였다.
그림자와 환술, 그리고 순수한 무력으로 제국들을 초토화한 마수.
그러나 눈앞의 뱀은 전설처럼 들은 것과 달리 훨씬 작아 보였다.
전설 속의 뱀은 수십 층 이상의 건물을 친친 휘감아 부숴 버릴 정도의 크기가 아니던가.
그런 클라이드의 생각을 눈치챈 듯 메데이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다시피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호가 필요한 시기이지.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조차 되지 않아서 가끔 철없이 군단다.”
“…….”
집채만 한 뱀을 마치 귀여운 아들 대하는 듯한 메데이아의 태도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을 가는 동안 꽤나 할 말이 많을 것 같구나. 그렇지?”
메데이아가 빙긋 웃어 보였고, 보니는 흥미롭다는 듯 뱀의 비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둘을 보며 클라이드는 이마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