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28화 (129/220)

128화 이야기의 결말 (2)

홀로 리치 타운에 들어온 루키우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젊을 적 수도 없이 누비던 거리다.

한때 ‘리치 타운’이라는 이름의 ‘리치(Rich)’는 예술의 풍요를 뜻했다.

전 대륙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화려한 예술품을 남겼고, 벽마다 개성 넘치는 벽화를 그려 놓았다.

센트럴 고위층이 즐겨 찾는 예술품들이 바로 리치 타운에 모여 있었고, 알마티 리치 타운은 예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리치 타운은 그저 부자들의 공간일 뿐이다.

예술가들은 지하 도시나 알마티 외부로 쫓겨났고, 그들이 남긴 예술품은 모조리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센트럴에서 들여온 사치품들이 대신했다.

주변 저택들은 이미 전부 재건축된 듯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 거리를 장식한 가로등에서 대리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한때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던 리치 타운은 이제 한낱 센트럴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씁쓸한 얼굴로 거리를 걷던 찰나, 거리 한쪽에서 드론 한 기가 날아왔다.

드론으로부터 녹화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등록되지 않은 ID입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

루키우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드론의 양옆으로 전기 충격기처럼 보이는 집게가 튀어나왔다.

“경고합니다. 등록되지 않은 ID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장…….”

“경고합니다. 등록되지 않은 ID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루키우스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집게를 들이대는 드론을 노려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장, 보고 있는 거 안다. 네가 가진 걸 지키고 싶거든 나오거라!”

“경고합니다. 등록되지 않은 ID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지지직…….

드론의 집게 끝에서 푸른 전류가 튄다.

그렇게 집게가 루키우스의 얼굴에 와닿는 찰나, 뒤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또각.

구두굽 소리, 그리고…….

“멈춰. 저분의 신분은 내가 보증하지.”

드론의 집게가 멈추며 기체를 빙글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Merry0329, 신분 인증 완료. 권한 유무 확인 완료. 확인되었습니다.”

저 혼자 영문 모를 메시지를 늘어놓던 드론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게발을 몸체 안으로 집어넣은 뒤, 유유히 멀어져 갔다.

드론을 멈춰 세운 여인이 루키우스 앞으로 다가오더니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루키우스 님.”

“메리…….”

리치 타운 골목에 버려진 그녀를 거두어 저택에서 키운 사람이 바로 루키우스였다.

그러나 장과 만나기 위해 스카이라운지에 갔을 당시, 오랜만에 재회한 메리는 루키우스에게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루키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메리의 뒤를 따랐고, 메리는 그런 루키우스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메리를 따라 걷는 사이, 루키우스의 옷에 검은 잿가루가 달라붙었다.

그것은 장의 능력이 남긴 결과물이고, 살인의 흔적이다.

지금껏 능력을 철저히 비밀로 해 두었던 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낌없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체 장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

“…….”

루키우스의 물음에 메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메리의 발걸음이 붉은 벽돌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여긴……?”

현판에는 ‘벨로’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마틴의 집이 아닌가.”

한때 친구였던 마틴 벨로의 집만큼은 리치 타운이 모조리 바뀐 와중에도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설마… 장이 마틴에게도 손을 댄 게냐?”

철컥.

루키우스가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벨로 가의 대문이 열렸다.

넓은 정원, 목줄만 남은 개집만이 남은 가운데 검은 잿가루가 정원 곳곳에 흩어져 있다.

* * *

“오셨군.”

벨로 가의 저택 지하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정면의 거대한 스크린을 지켜보던 장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크린에는 그저 마틴의 저택 주변 상황뿐만 아니라 리치 타운을 배회하는 드론들이 촬영 중인 영상과 알마티 곳곳의 CCTV 화면들이 교차해 재생되고 있었다.

마틴이 LAPD에 제공되는 관제 영상을 남몰래 자신의 저택에 연결시켜 둔 것이었다.

지금껏 마틴은 알마티 전체를 자신의 감시하에 두었고, 심지어 그 감시 대상에는 장 베르코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감시 체계는 장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루키우스가 저택 안에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한 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마틴을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와 오랜만의 재회 아닌가요? 이렇게 좋은 날 표정이 왜 그래요?”

“…….”

루키우스가 버려지던 당시, 마틴은 그를 외면했다.

물론 ‘반역죄’에 잘못 얽힐 경우, 가문 전체가 박살 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비단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르코프 가문에서 더 상대하기 쉬운 경쟁자는 아직 어려 애송이에 불과한 장이라 판단했고, 그런 욕심 때문에 자신의 친구이자 라이벌이 억울하게 쫓겨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젠 탐욕과 배신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함께 올라가시죠. 아버지도 아저씨를 보면 꽤 좋아하실 거예요.”

“…….”

“대답은?”

“그래, 알겠네. 같이 가지.”

“좋아요, 아저씨.”

장은 마치 어릴 때처럼 마틴을 ‘아저씨’라 불렀다. 그러나 괴물로 변해 버린 장의 친근한 표현에 마틴은 도무지 웃을 수 없었다.

“아, 그리고 아저씨가 만든 이 관제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마틴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장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주먹을 움켜쥔 채 분노를 억누를 뿐이었다.

장은 그런 마틴의 감정을 모른 척하며 천천히 지하 관제실을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랜만이군. 자네도 많이 늙었구먼.”

루키우스는 마틴을 만나자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한때 절친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사내. 아니, 루키우스는 애당초 마틴의 경쟁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사내였다.

뛰어난 능력으로 Z―rail을 알마티 최고의 회사로 키웠고, 지하 도시로 쫓겨난 뒤에는 그곳의 시장이 되어 도시를 일구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름의 세력을 만들어 기어코 지상으로 돌아왔다.

마틴은 젊은 시절처럼 강인해 보이는 루키우스의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어서 오시죠, 아버지.”

장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자신이 쫓아낸 루키우스를 정겹게 ‘아버지’라 부르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마틴은 도리어 그 모습이 더욱 소름 끼쳤다.

장은 천천히 연회실 안으로 들어와 와인 잔이 놓인 마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메리가 들어와 세 사람의 와인 잔에 차례로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루키우스와 장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구나, 장.”

“여러 가지 골치 아프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었거든요.”

“네가 지금처럼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넌 늘 어둡고 조용한 아이였지.”

“제가 그랬던가요?”

“그래, 그랬지. 웃음이 많던 네 어머니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어.”

어머니가 언급되자 장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는 광기에 가까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네가 지금처럼 웃는 걸 딱 한 번 보았지.”

“…….”

“네가 내 앞에서 네 형들을 살해했다고 고백했을 때였지, 아마.”

마틴은 루키우스의 말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와인을 들이켰다.

장은 루키우스에게 자신의 죄악을 털어놓던 순간.

“전 기회를 살렸을 뿐이에요.”

지금처럼 웃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화제를 돌리며 잔을 쥐었다.

“네가 회사를 이끌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구나. 그래, 어떻더냐?”

“솔직히 힘들었어요, 아버지.”

Z―rail은 지난 20년간 줄곧 내리막을 걸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낡아 빠진 열차와 철로뿐이고, 쇠락한 알마티에서 허울뿐인 기업가 대표 자리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전 아무래도 경영보다는 지배가 좋아요.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이미 완성된 걸 빼앗는 편이 더 낫죠.”

루키우스를 따르던 부하 직원들은 장을 신뢰하지 않았다. 캐피탈 클럽의 경영자들은 장을 무시하고 비웃었다.

무언가 보여 줘야만 했고, 탈로스 가문을 앞서겠다며 시작한 투자는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장은 그런 본인의 어리석은 행동을 떠올리며 조소하고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몰랐을까요.”

감히 자신을 무시하던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구걸하다 비참하게 죽었고, 그들의 자산은 모두 장의 손에 들어왔다.

항상 오만하게 굴며 뻣뻣하던 마틴은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의 옆에 앉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마틴의 모습을 보며 히죽 웃던 찰나, 루키우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뭐라고요?”

“네 능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알고… 계셨군요.”

장은 꽤 놀란 얼굴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설마 하기야 자신의 힘을 아버지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는 못했다.

만약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장은 리치 타운에서, 아니, 알마티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아셨던 거죠? 설마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요?”

“…네가 태어난 날부터 알고 있었다.”

“하, 하하! 알면서도… 숨겼단 말이죠? 왜죠? 기회는 많았잖아?”

형들을 살해하고, 아버지까지 배신한 장이다. 루키우스는 얼마든지 장의 비밀을 알려 그를 끝장낼 수 있었다.

장이 세운 법정에서 루키우스는 그 비밀을 밝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법정에서도, 그 이후로도 줄곧 침묵했다.

“네 어머니의 부탁이었다.”

장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하.”

장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하하하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이 연회장 전체를 메웠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와인 잔을 벽 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쨍그랑!

“이런 멍청한 영감탱이 같으니. 내가 그런 말을 듣고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할 줄 알았어?!”

실컷 웃다가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장 앞에서 루키우스는 여전히 침착했다.

“네 힘이 외부로 드러난 이상, 곳곳에서 널 노릴 게다.”

“내가 무서워할 거 같아?”

“…….”

“난 이 알마티의 모든 걸 손에 넣었어. 리치 타운의 모든 재산도, 생산 시설의 운영권도 전부 말이야. 이젠 내가 곧 알마티야.”

캐피탈 클럽에서 잘난 척하던 기업 소유주들과 그 후계자들은 모조리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이제 그들이 가진 모든 자산은 합법적으로 캐피탈 클럽 알마티 지부의 소유가 되었다. 즉, 알마티 지부장 장 베르코프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건 센트럴의 힘 앞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장을 바라보는 루키우스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분노가 아닌 슬픔이었다.

“알마티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한들 센트럴에게 너는 그저 당장 처리해야 할 이레귤러일 뿐이다.”

“이, 이보게…-!”

마틴이 놀란 듯 루키우스의 말을 막았다.

장은 당장에라도 루키우스를 죽여 버릴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장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도 남을 사내였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장,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모든 걸 그만두고 숨거라. 내가 널 보호해 주마.”

루키우스는 괴물로 변해 버린 아들 앞에서 사정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루키우스는 아내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루키우스, 약속해요. 내 아들을…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결코… 센트럴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아이를 낳은 직후, 아내의 몸 절반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내는 그 끔찍한 모습으로 루키우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부탁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아니,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살해한 괴물을 지켜 달라고.

루키우스는 그런 아내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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