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야기의 결말 (1)
“서장님은 찾았나?”
“아직입니다. 하지만 목격자들이 많으니…….”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잖아.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 곳곳을 뒤져. 다른 시신들도 수습하고.”
바르코의 지시를 들은 간부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 경감은? 기계 공원 쪽에서는 연락이 없나?”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젠장,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바르코는 에너지 광장에 집결한 부대들을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법 많은 병력들을 모았지만, 사태를 진정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패배 소식이 빠르게 공유되면서 광장에 모인 경찰들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저만치에서 부하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바르코의 옆에 서 있던 간부 하나가 한숨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더 큰일 날 게 남아 있나?”
그의 말처럼 이미 상황은 최악이었다.
서장과 그의 정예 부대가 에너지 광장에서 전멸당했고, 방화와 살인으로 혼란을 일으킨 놈들은 대부분 놓쳤다.
그 와중에 지하 도시에서 올라온 폭도들의 함성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르코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는 찰나, 허겁지겁 달려온 부하가 급히 보고했다.
“무, 무기고가 당했습니다!”
“뭐?!”
바르코의 옆에 서 있던 간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기고에는 서장 역시 많은 병력을 파견했고, 바르코 역시 서장 사망 소식을 들은 직후 부대를 나누어 무기고에 증원을 보냈다.
에너지 광장의 방어선 구축을 위해 본인이 직접 가진 못했지만, 무기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가장 많은 병력을 무기고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런 무기고가 적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믿을 수 없는 결과 앞에서 바르코는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서장님을 공격한 메타휴먼들이 무기고 공격에 합류하는 바람에 팔머 경위가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팔머, 이 멍청한 새끼!! 메타휴먼이라고 해 봐야 지하에서 조잡하게 개조된 놈들일 텐데, 그런 놈들한테 항복을 해?”
“놈들이 서장님의 시신을 이용해서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바르코는 이마를 감싸며 분노를 토해 냈다.
줄곧 찾고 있던 서장의 시체가 무기고를 무너뜨리는 데 사용된 것이다.
“이런 야만적인 놈들 같으니!”
이로써 놓쳐 버린 자경대원들은 모두 알마티 LAPD 수준의 장비를 갖추게 될 터였다.
“…미치겠군.”
뒤에서는 무장한 자경대원들이, 앞에서는 지하 도시의 주민들이 밀려오고 있다.
“쓸어버립시다! 무기고를 빼앗겨?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쥐새끼 몇 마리가 무장한다 해서 우리 상대가 될 거 같소?”
“여기 병력을 섣불리 빼내면, 앞에서 오는 폭도들은 어쩌자는 겁니까?”
“고작 비무장 상태의 폭도들을 상대하는 데 뭐 그리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어? 광장에 들어오는 족족 없애 버리면 되잖아!”
“당신, 미쳤어? 지하에서 올라온 사람들 규모가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요? 알마티를 아예 피바다로 만들 셈이야?”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지. 폭도들이야. 여기서 밀리면 지상의 모두가 저 폭도들 손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단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설왕설래하는 간부들 속에서 바르코는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들 목소리 낮춰요.”
집결한 경찰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혼란에 빠진 간부들의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일단 방어선 구축을 계속하고, 이곳 광장에서 폭도들의 진입을 막아야 합니다.”
“무기고는 어쩔 셈입니까?”
“날렵한 사람들 열댓 명을 추려서 특공부대를 편성하도록 하죠. 내가 직접 가겠습니다.”
“바르코 경감, 당신이 여길 비우는 건…….”
간부 중 하나가 불안함을 표했지만, 바르코의 굳건한 눈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방법 따위 없다.
LAPD 본부가 불타 흩어져 버린 병력이 채 모이지 않은 상황인데다 무기고 쪽 병력은 항복했고, 기계 공원 쪽에서는 소식이 끊어졌다.
무기고에서 공격해 올 적과 외곽에서 밀려 들어올 폭도들을 동시에 상대할 여력은 없었다.
“다만, 폭도들이 진입해 온다 해도 그들을 향해 발포해서는 안 됩니다.”
잠깐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게 무슨 뜻인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그들과 대치하되, 최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다고 놈들이 물러나겠습니까?”
“…일단 제 말에 따르세요.”
바르코의 지친 말투에 간부들도 더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기억하세요. 발포는 안 됩니다.”
바르코는 결코 자신의 입으로 명백한 학살을 지시할 수 없었다.
고작 수십, 수백의 규모가 아니다. 최소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지하 도시 주민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무리 선두에 놈들을 이끄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일단 그들과 직접 교섭을 해야 합니다.”
“폭도와 교섭이라니…….”
바로 그때였다.
“폭도라는 표현은 지나치네요.”
좌측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여인을 비롯해 세 사람이 경찰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호위를 받는 듯한 그 모습에 간부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민간인이잖아?! 게다가 뒤에 두 사람은 무장까지 하고 있잖나! 왜 이쪽으로 데려오는 거야?”
선두에 선 여인의 뒤편에는 언뜻 보아도 이국적인 차림의 남녀가 제각기 칼과 총을 찬 채 따르고 있었다.
선두에 선 여자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쏘아붙였다.
“보시다시피 제가 경찰은 아니죠. 그래도 여러분과 이야기할 자격은 될 거예요.”
여인은 당당히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 다가와 멈춰 섰다.
“제 소개를 하죠. 전 제인 브레드필드라고 합니다. 제 뒤의 두 사람은 제 경호원이에요.”
제인의 소개를 들은 간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브레드필드?!”
“설마……!”
“그… 코르지 브레드필드 님과는 어떤 관계이시오?”
“제 아버님 되세요.”
“아가씨께서……!”
간부들은 저마다 놀란 듯 보였지만, 조금 전처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작 제인을 바라보는 바르코의 얼굴은 딱딱했다.
“무엇 하러 오셨소? 당장 도시를 떠날 수단이라도 필요하시오?”
상원의원의 영애가 이처럼 급한 시점에 자신을 찾아왔다면, 목적은 빤하다 여겼다.
간부들은 차갑기 그지없는 바르코의 말에 어지간히 놀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보게! 이분이 누구인지 알면서…….”
“보시다시피 지금은 바쁩니다. 아가씨를 상대해 드릴 여유가 없으니…….”
“전 몇 분 전까지 지하에 있었어요.”
순간, 바르코를 비롯한 간부들은 제 귀를 의심하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지금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상에 올라왔다는 뜻이에요.”
“그럼 당신이 저들을 이끌고 있다는 말입니까?”
다급히 물은 바르코는 곧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상원의원의 딸이다. 그런 여자가 대체 무엇 때문에 폭도들을 이끈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지하 도시의 주민들이 그녀를 따를 리 없다.
“물론 제가 주동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들을 설득하러 왔어요.”
제인의 시선이 바르코를 향했다.
“아까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나 역시 동의해요. 주민들을 향해 절대 발포해서는 안 돼요.”
“아가씨, 우리라고 그런 선택을 하고 싶을 리 있겠습니까? 저희는…….”
“경찰법 장비 규정 제9조, 총기 사용의 원칙. 총기 사용 시에는 미리 구두 또는 공포탄에 의한 사격으로 상대방에게 경고하여야 한다.”
“…….”
“적어도 경고를 통해 충돌을 막으려는 시도 정도는 해야죠. 안 그런가요?”
“동의합니다.”
바르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고를 한다고 듣겠습니까? 설득할 자신은 있으십니까?”
“지하 도시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키우스 시장의 영향력만큼은 절대적이라고 들었어요. 지금 그는 자리를 비운 상황이죠.”
“…….”
루키우스를 그냥 놓아 보낸 것에 대해 줄곧 후회하고 있던 바르코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이처럼 최악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줄 알았다면, 루키우스를 무조건 체포해 붙잡아 두었을 것이다.
“루키우스 씨가 돌아올 때까지만 유예 시간을 갖는 걸로 하면 어떻겠어요?”
“유예 시간이라면, 폭도들이 이곳 광장까지 진입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폭도가 아니라 주민이에요. 어쨌든 그래요. 난 그렇게 설득할 생각이에요. 물론 LAPD가 먼저 총탄을 쏟아붓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죠.”
“그 말대로 하겠소. 약속하지.”
바르코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간부들 역시 ‘브레드필드’라는 이름값 때문인지, 아니면 학살을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교섭이 마무리되려는 찰나였다.
“경감님! 기계 공원 소식을 전하겠다며 웬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뭐?! 케인 경감이 보낸 사람인가?”
바르코가 급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저만치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루키우스와 함께 있던 바로 그 남자다.
한편, 바르코의 앞에 서 있던 제인이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더니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
더불어 그녀의 뒤쪽에 서 있던 남녀 역시 저희들끼리 중얼거렸다.
“쟨 왜 저기서 나와?”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네.”
“난 저 녀석 음험해서 마음에 안 든다고.”
바르코는 제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 네. 제… 친구예요.”
바르코는 음울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기계 공원 쪽에서 왔단 말이지…….”
리치 타운만큼은 틀림없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리치 타운의 길목인 기계 공원 역시 굳이 방화범들이 습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리치 타운의 보안 시스템과 방호 체계는 어설픈 무장의 자경대원 몇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케인과 소식이 끊어진 가운데 레이가 찾아왔고, 그건 기계 공원으로 향한 병력에 뭔가 문제가 터졌음을 의미했다.
‘그럴 리 없다. 기계 공원에, 리치 타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 리 없어.’
그러나 바르코 앞으로 다가온 레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케인 경감의 것이 분명한 명찰과 견장을 내놓았다.
명찰은 불에 그슬린 듯 반쯤 사라져 있다.
“기계 공원의 LAPD 병력이 전멸했소. 리치 타운 쪽에서 정체 모를 이레귤러가 날뛰고 있어.”
레이의 말을 듣는 순간, 바르코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 * *
“…난리군.”
도시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와중에 고함과 함성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태일은 잠시 지붕 위에 멈춰 서서 그런 알마티 거리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몸을 날려 지붕과 발코니 사이를 내달렸다.
그사이, 태일은 경찰과 자경단원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과 달아나는 경찰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 어떤 사건에도 개입하지 않은 채 그저 목적지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클라이드의 개입이라는 변수가 사라지자 LAPD는 태일의 세계에서 그랬듯 진압에 실패했고, 지하 도시 주민들이 지상에 밀고 올라왔다.
그렇게 지하 도시의 혁명이 시작되었고, 태일은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었다.
태일이 한창 지붕 위를 달리던 중, 소총을 등 뒤에 멘 채 홀로 내달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어, 저 녀석?!”
익숙한 뒷모습은 분명 민호였다.
태일은 그 즉시 아래쪽으로 몸을 날려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민호 역시 태일이 갑자기 나타나자 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나는 거지?”
“잠시 볼일이 있어서. 리치 타운 쪽으로 가는 거냐?”
“보다시피.”
“뭐 하러 가는 건데?”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너도 리치 타운에 가는 건가?”
민호의 물음에 태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리 둘의 목표가 같은 것 같군.”
태일은 자신이 기억하는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결말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번 혁명을 이끄는 남자, 루키우스를 구해야 한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