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26화 (127/220)

126화 아버지와 아들 (3)

“지상이다! 지상이야!”

“우와아아아아!!”

“앞에! 얼른 나가! 뒤에 사람들이 잔뜩 밀려온단 말이야!”

“밀지 마, 밀지 마!”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이 들려온다.

제인은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니야.’

알마티 외곽 쓰레기 통로 곳곳에서 지하 주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저리 비켜, 길 막지 말고!”

“아앗!”

험상궂은 남자가 잠시 멈춰 선 제인을 난폭하게 밀어내며 거리로 내달린다.

카츠미가 휘청이며 균형을 잃은 제인을 부축했다.

“조심해요.”

“고마워요.”

카츠미와 제인의 옆에 버티고 선 페이진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군.”

쓰레기 처리 통로를 통해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지하 도시 주민들은 방독면과 싸구려 방호복을 벗어 던진 뒤, 마음껏 날뛰고 있었다.

지하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늘 지상을 동경한다.

지상에서 끔찍한 경험을 겪은 뒤 쫓겨난 이들조차도 언젠가 지상에 돌아가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지상에 도착한 지하 도시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밤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지상에 발을 디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자!! 이제부터 우리는 계속 지상에서 살아가야 하오! 시장님 말씀 기억하겠지?”

루키우스의 지시를 받은 자경대장의 목소리가 온 거리를 울린다.

한번 지상으로 올라온 이상, 다시는 지하로 내려갈 수 없다. 아니,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갑시다! 이제부터 여긴 우리의 땅이니!”

“우와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함께 비무장 상태의 주민들이 알마티의 온 거리를 메우며 행진을 시작했다.

불길이 피어오르고, LAPD 경찰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에조차 닫혀 있던 거리의 창문들이 열린다. 두려움에 찬 지상 주민들의 시선이 거리에 집중되었다.

지하 도시로 쫓겨났던 부랑자, 범죄자, 거지, 고아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에게 집을! 자유를!”

“우리도 알마티의 주민이다!”

“우리는 살아 있다!!”

온갖 구호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는 울분에 찬 고함 소리, 분노에 찬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다! 우리는 쥐새끼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태양을 볼 권리를! 지상에서 숨 쉴 권리를!!”

제인은 격앙된 지하 주민들의 행진을 바라보며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 이렇게 되어도 괜찮은 걸까요?”

애당초 제인이 원한 것은 무질서나 혼란이 아니었다.

센트럴 오더를 막기 위해 집단행동, 그조차도 잘 조직되고 철저히 계획된 저항이 이뤄지길 바랐다.

그러나 제인은 지금 이 순간, 그게 얼마나 순진한 발상이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지상에 올라온 이들에게 센트럴 오더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들은 지상에 올라왔다는 사실만으로 잔뜩 흥분한 상태이며, 지상에 머무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처럼 보였다.

카츠미가 그런 제인의 손을 붙잡은 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행진을 시작한 지하 도시 주민들에게는 그럴듯한 무기도, 분명한 작전도 없다. 그러나 오로지 본능과 생존 욕구에 지배되어 움직이는 지하 주민들의 행진은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주민들을 이끌고 올라온 자경대장의 목소리 역시 어느 순간부터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대로 LAPD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먼저 지상에 올라온 자경단들의 작전으로 LAPD 병력들이 분산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일 뿐이었다.

결국 LAPD는 주민들의 앞을 막아설 것이다.

제인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LAPD 서장을 만나 봐야겠어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요?”

“‘브레드필드’라는 이름값이면 안 될 것도 없겠죠.”

제인은 그런 방식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 외에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카츠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난리 통 속에서 무슨 수로 LAPD 서장을 찾는단 말인가.

줄곧 제인을 지키던 레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시장을 따라가 버렸고, 영락없이 자신이 눈앞의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페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주, 첫째가… 보이지 않아.”

“뭐?”

지상에 올라온 뒤로 줄곧 민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

카츠미가 한숨을 짓는 찰나, 행진의 앞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LAPD다!! 놈들이 온다!”

* * *

알마티 중심부로 향하는 길목, 멀리 도시 외곽의 함성 소리가 이곳까지 울려 왔다.

지하 도시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거리를 메워 가고 있을 터였다.

그 덕분에 정작 중심부로 향하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레이는 루키우스와 함께 거리를 걸으며 조용히 물었다.

“바르코라는 남자,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바르코는 루키우스를 체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순히 루키우스의 말에 따르지도 않았다.

“내 눈앞에서 꺼지시오, 지금 당장.”

떨리는 목소리로 루키우스와 레이를 쫓아 보냈을 뿐이다.

비록 서장이 당했지만, LAPD는 여전히 강력한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병력 또한 적지 않았다.

LAPD가 전열을 정비한 뒤에 지하 도시 주민들을 향해 제대로 진압 작전을 시작한다면, 제아무리 메타휴먼과 자경대라 해도 막을 수 없다.

“바르코 경감이라면 내가 잘 아네. 유능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지.”

루키우스는 바르코가 무자비한 학살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루키우스의 대답을 듣자 문득 의심이 들었다.

“서장의 죽음은… 시장님이 의도하신 겁니까?”

레이의 질문은 서장의 죽음을 들은 직후 바르코 역시 던진 질문이었다.

“당신의 짓인가, 루키우스?”

그러나 이번에도 루키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루키우스는 바르코에게도 똑같이 답했다.

“자네나 바르코나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내가 무슨 수로 LAPD 서장을 멋대로 살해할 수 있겠나.”

잠시 침묵하던 루키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 자네… 메타휴먼들이 지하에 머무르게 된 경위를 알고 있나?”

“…….”

“메타휴먼들은… 아니, 로보티안들은 지상에서 쫓겨난 거네. 그 때문에 지상에는 단 한 기의 로보티안도 없지.”

“…대충 짐작은 했습니다.”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금융 버블 당시 대륙 곳곳에서 로보티안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고, 수많은 로보티안들이 희생되었다.

여전히 많은 구역에서 로보티안은 발견 즉시 폐기된다.

로보티안에 대한 분노와 혐오는 ‘코카서스’라는 조직이 만들어질 정도로 집요했고, 또한 지독했다.

“당시 알마티에서 그 일에 앞장선 자가 바로 지금의 서장이었네. 로보티안들의 팔다리를 부순 뒤, 지하에 산 채로 던져 버렸지.”

“…….”

“차라리 단순한 파괴였다면, 그저 로보티안들을 살해하는 데 그쳤다면, 그 악덕은 곧 잊혀졌을 게야.”

그러나 서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로보티안들을 살해하는 대신 팔다리만을 부수어 죽음을 택할 수조차 없는 상태로 만든 뒤, 그대로 지하에 던져 버렸다.

“상상해 보게.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방치된 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거야. 기약도 없이.”

“끔찍하군요…….”

레이는 버림받은 메타휴먼들을 거두어 부하로 고용했다.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로보티안에게는 인간과 같은 영혼이 있다. 그들도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분노할 수 있으며, 슬픔마저 경험한다.

그건 고작 인간의 흉내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로보티안에게 서장이 선사한 형벌은 죽음 이상의 공포였다.

로보티안들은 어둠 속에 처박힌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원한으로 남아 있었다.

“복수…라는 말입니까?”

“단지 그뿐만은 아니네.”

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쉽사리 복수하지 못한다.

끔찍한 경험 속에서 분노와 함께 공포가 새겨졌고, 대개 공포는 분노를 압도했다.

“난 카심에게 지상에 메타휴먼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네. 아마 카심은 알고 있었을 테지. 메타휴먼들의 정착을 위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게 누구인지 말이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리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가 다름 아닌 메타휴먼들의 리더, 카심이었다.

카심은 자신을 미끼로 삼아서라도 서장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카심을 찾아갔을 때부터 이미 이렇게 될 줄 아셨군요.”

“글쎄.”

레이는 담담한 표정의 루키우스를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약자들의 보호자, 지하 도시의 성자.

루키우스는 대외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쓰레기장에 불과하던 지하 도시에 버려진 이들을 위해 도시를 건설한 루키우스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담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지하 도시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그중 대다수는 루키우스가 조직한 자경단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는 이들이었다.

루키우스는 지하 도시의 보호자이자 잔혹한 폭군이었다. 또한 지하 도시는 결코 아름답고 따뜻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건……!”

레이와 대화를 이어가던 루키우스의 발걸음이 돌연 멈춰 선다.

리치 타운으로 향하는 길목, 기계 공원.

불 꺼진 기계 공원 내부는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끼이익… 끼익…….

날개가 모조리 부식된 기계 새와 기계 나비들이 땅바닥을 나뒹굴며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낸다.

공원 정중앙의 자이로스코프는 박살이 난 채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자기부상열차 역시 황금빛을 잃은 채 움직임을 멈추었고, 깨진 유리처럼 몸체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한때 알마티의 상징이자 자랑거리였던 기계 공원이 처참히 파괴된 것이다.

그 모습을 둘러본 루키우스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럴 수가…….”

검게 변한 꽃에 레이의 손이 닿자 부스러져 잿가루로 휘날린다.

그건 결코 자경단원들의 짓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루키우스는 자경단원들에게 기계 공원으로의 진입을 지시한 적이 없었다.

“그저 불에 탄 흔적이 아닙니다.”

사태를 파악한 뒤, 고개를 들어 루키우스를 바라본 레이는 곧 입을 닫고 말았다.

루키우스의 표정에는 분명 충격이 떠올라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각오한 것처럼 보였다.

“누구의 짓인지 아시는 겁니까?”

루키우스는 레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 자체로 답변이었다.

“레이, 이제부터는 위험하네. 자네는… 따라오지 않는 게 좋겠어.”

“시장님…….”

“자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애인이 있었지, 아마.”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레이는 알마티 외곽 방향을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제인, 그녀는 지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하 도시 주민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제인 역시 함께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는 선뜻 루키우스를 버려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앞으로 수시간 동안 벌어질 일들이 알마티의 미래를, 나아가 대륙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센트럴뿐 아니라 암흑가의 시선 역시 알마티에 몰려 있었고, 그 중심에는 지하 도시의 시장이자 장 베르코프의 아버지인 루키우스 베르코프가 있었다.

“리치 타운에는 나 홀로 들어가도록 하지.”

루키우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런 루키우스를 바라보던 레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루키우스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레이, 주변에 숨어 있는 자네 친구들도 함께 데리고 가게.”

“어르신…….”

루키우스의 말처럼 근방 지붕 위나 골목 안에는 레이의 부하들이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들이 수집한 정보들은 암흑가의 거물들에게 비싸게 판매될 것이다. 그러나 비단 그들의 목적이 감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루키우스와 레이의 안전을 위해 배치된 호위 병력이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게. 자네의 친구들이 리치 타운에 들어간다면… 보안 장치들이 일제히 작동할 거네.”

레이의 부하들은 개조된 메타휴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메타휴먼은 알마티에서 배척받는 존재이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향할 곳에서는 그저 배척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메타휴먼은 발견 즉시 파괴된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것도 선택받은 인간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소. 리치 타운은 그런 곳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들과 만나러 가는 길이네. 별일이야 있겠나?”

레이는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루키우스를 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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