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25화 (126/220)

125화 아버지와 아들 (2)

까닭 모를 공포감을 느낀 마틴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집 안의 불을 전부 켜.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마틴의 목소리를 인식한 집 안의 모든 등이 켜진다.

집 안의 조명이란 조명은 모두 켰음에도, 그래서 그림자 하나 없이 눈부시게 밝아졌음에도 마틴의 공포감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2층 복도까지 불이 밝혀진 가운데,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검은 연기와 잿가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타는 냄새는 나지 않는다.

뚜벅, 뚜벅, 뚜벅…….

계단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애송이 장 베르코프다. 겁먹을 이유 따위 없다. 그저 계단 앞으로 다가가 반가운 척 웃으며 맞아들이면 그뿐이다.

하지만 마틴의 본능은 끊임없이 경고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일제히 켜진 불빛에 한마디쯤 할 법도 하건만, 장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마틴은 입술을 깨문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박제된 곰 머리의 아래쪽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눌렀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별채의 경호원들이 당장에라도 집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애써 마음을 안정시킨 뒤,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계단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형체가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양복 혹은 검은 망토 때문인지 환한 불빛 속에서조차 장의 모습은 그저 까맣게 보였다.

“장, 자네인가?”

뚜벅뚜벅.

걸음을 멈춘 장이 가만히 마틴 쪽을 돌아본다.

정체불명의 샛노란 눈동자가 마틴의 눈과 마주친다. 곧이어 검은 비늘로 뒤덮인 장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마틴이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바로 그 순간,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마틴을 향해 덮쳐 왔다.

“으, 으으…….”

머리가 지끈거린다.

달그락, 달그락…….

마틴은 식기가 맞부딪치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샹들리에로부터 반사된 빛 때문에 마틴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마틴은 자신의 집, 연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에 별다른 통증이나 상처도 없다.

마치 나쁜 꿈을 꾼 것 같은 불쾌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깨어나셨군요.”

장 베르코프는 당당히 상석에 앉아 여유롭게 와인을 들이켜며 치즈를 자르고 있다. 그런 장의 뒤에는 그의 비서가 흔들림 없는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간밤에 마시는 와인과 치즈란 참으로 별미죠.”

“장 베르코프… 당신,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두통 속에서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른 마틴은 식탁을 내려치며 장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간밤에 집을 찾아와 멋대로 굴다니! 게다가 아까 내가 본 그건……!”

“아, 그건 나였습니다.”

“당신이었다고? 그럼 설마…….”

검은 비늘에 노란 눈동자,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

그건 어떻게 보아도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맞습니다. 나 같은 존재를 능력자 혹은… 이레귤러라고도 부르죠.”

역사 시대 말기, 제국들의 우생학과 인체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고 알려진 존재, 이레귤러.

이레귤러는 대륙에서 메타휴먼만큼이나 배척받는 존재였다.

센트럴의 대륙 통일 직후, 강력한 이레귤러로 구성된 바토리 일족의 반란은 엄청난 희생을 초래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으며, 반란 진압 후에도 생존한 바토리 일족이 이레귤러들을 끌어모아 테러를 자행했다.

센트럴은 이레귤러에 대한 관리 법안을 통과시켜 그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레귤러의 규모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캐피탈 클럽 안에 이레귤러가 있었다니. 센트럴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뭐라고 반응할지 궁금하군.”

마틴이 이를 악문 채 쏘아붙이자, 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들은 결국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흐흐, 그래서… 당신의 정체를 안 나를 당장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바깥에서 날뛰는 폭도들의 짓으로 몰아서?”

장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마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난 마틴 당신을 꽤 높게 평가합니다.”

길드 협회장 루퍼스, 은행장 게일을 비롯한 이들은 능력을 내보인 장 앞에 무릎 꿇고 살려 달라 빌었다.

심지어 겁쟁이 루퍼스는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릴 정도였다.

그러나 마틴은 날카로운 감을 발휘해 채 능력을 선보이기도 전에 위험성을 재빨리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불을 밝히고 경호팀까지 불러들였다.

게다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흠이라면 지나치게 오만하다는 점이랄까.

“평가? 네가, 나를? 흐, 흐하하하하!”

마틴이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쏘아붙였다.

“장, 난 네 아버지가 Z―rail을 설립했을 때부터 이 도시에 있었어. 캐피탈 클럽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알마티의 지역 의원이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감히 그런 나를 평가해?”

장은 가만히 팔을 들어 마틴의 등 뒤를 가리켰다.

장의 고개가 돌아간다.

곧이어 장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너, 이 개자식!!”

장의 애인과 그의 경호원 열 명의 머리가 마틴의 뒤쪽 벽에 장식품처럼 매달려 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은 목 부분이 시꺼멓게 변색된 가운데, 얼굴만큼은 살아 있을 적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혐오하시는 이레귤러들을 집 옆에 두고 계시더군.”

배척받는 와중에도 부유층들은 암암리에 이레귤러들은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한다.

실력 있는 이레귤러의 경우, 엄청난 수준의 연봉을 받기도 했다.

마틴의 경호원 역시 암흑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던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베테랑들이 고작 한 사람의 손에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제야 장의 능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틴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LAPD 서장과 나름의 밀약을 맺으셨더군요. 센트럴 오더에 따른 강제집행 시 벨로사 자산 일부를 제외해 달라는 거였죠, 아마?”

“…….”

“심지어 강제집행 과정에서 다른 회사의 자산들을 마틴 사의 소유로 이전하려는 계획까지 세우셨더군요.”

마틴은 장을 노려보았지만, 조금 전처럼 험한 말을 함부로 내뱉지는 못했다.

“이왕 욕심을 내시려면 알마티 전체를 욕심내야죠. 안 그렇습니까?”

“대체 원하는 게 뭔가?”

“알마티 전체를 손에 넣은 뒤…….”

잠시 말을 멈춘 장이 와인 한 모금을 들이켰다.

“센트럴과 직접 협상에 나설 겁니다.”

어느새 노랗게 변한 장의 눈동자가 뱀처럼 마틴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알마티 LAPD 바르코는 경찰 내에서 ‘흑표범’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검은 피부에 날렵하고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그는 엘리트들이 즐비한 LAPD 간부급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조직 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늘 과묵했으며, 홀로 움직였다. 감정 표현이 적고 딱딱한 그를 후배들은 물론, 상관들까지도 꺼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바르코 역시 불타오르는 LAPD 본부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그의 앞에는 이번 사건을 일으킨 주범이 서 있었다.

“팀장님…….”

“너희는 가서 화재 진압하고 주변 상황을 점검해.”

“아, 알겠습니다!”

바르코와 그 앞에 선 노인을 번갈아 살피던 부하가 곧장 대답하며 화재 진압 중인 본부 쪽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이군, 바르코 경감.”

“루키우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났군.”

바르코는 날 선 말투로 눈앞에 선 루키우스와 레이를 노려보았다.

아덴 거리에서 붙잡은 방화범들은 전부 지하 도시 자경단원들이었다. 그들은 바르코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빤한 노릇이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네.”

“이건 배신이오.”

바르코는 LAPD 내에서 그 누구보다 지하 도시의 사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바르코는 지상에 몰래 기어 올라온 지하 도시 범죄자의 체포를 담당해 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하 도시의 상황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지하 도시에 대한 무조건적 혐오와 증오를 쏟아 내는 상부와 달리 바르코는 루키우스를 찾아가 대화를 거듭했다.

지상으로 올라와 문제를 일으키는 인원에 대한 지하 도시 차원의 관리를 요구했으며, 자경단의 조직과 운영을 돕기도 했다.

지하 도시가 제대로 관리되어야만 알마티 치안이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힘을 보탠 자경단이 테러리스트로 변해 버렸고, 루키우스 자신 역시 지상으로 나왔다.

“센트럴 오더에 대해 들어 보았나?”

루키우스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바르코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그게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지?”

“센트럴 오더가 우리를 지상으로 끌어올렸거든.”

“헛소리 마시오.”

“야나르가 꺼졌네. 게다가 암살자들에 의해 자경단원이 여럿 살해당하기까지 했지.”

“…….”

“모르겠나? 우리를 지상으로 끌어올린 건 결국 센트럴이야. 알마티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센트럴이라는 말이네.”

루키우스는 흔들리는 바르코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센트럴은 이미 알마티를 센트럴 오더의 재물로 택했다네. 자네들 역시 우리를 진압하기 위해서… 아니, 학살하기 위해서 무장한 게 아닌가.”

바르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몇 시간 전, 알마티 LAPD에 센트럴 오더와 관련된 명령서가 내려왔다.

알마티 각 기업체 자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진행하라는 내용이었다. 공장을 비롯한 생산 시설과 은행, 창고 등 주요 시설의 운영권을 넘겨받으라는 것이었다.

간부 중에도 그 명령을 알고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까라면 까는 거지, 뭐.”

케인 경감은 너무나 가볍게 대꾸했지만, 바르코는 그 명령이 석연치 않았다.

센트럴 오더가 발령되었던 과거의 전쟁 상황과 현재는 다르다. 50구역에서 의원 살해 사건이 터졌다 해도 센트럴 오더의 발령은 너무 지나쳤다.

기업들과 주민들이 받아들일 리 없는 명령이었다.

이상한 명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늘 밤에는 전원 비상근무를 서야겠어. 저녁에 무장 점검도 진행할 테니, 완전무장 상태로 대기하도록 해.”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상부에서 불시 점검이 내려올 수도 있어. 그렇게 알고 명령 하달해.”

마치 폭동을 미리 짐작하기라도 한 듯한 조치였다.

센트럴에서 내려온 명령서와 서장의 지시. 그 두 가지는 결국 특정한 상황을 의도하고 있었다.

“센트럴 오더의 정당성을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 아나?”

루키우스가 바르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로 피야. 그것도 무수히 많은 양의 피.”

센트럴 오더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덮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참극이 연출되어야만 한다. LAPD와 지하 도시 사이의 전쟁에 가까운 격돌, 그 과정에서 흐르는 피.

“지하 도시는 알마티 자본가들과 함께 센트럴 오더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낼 계획이었네. 의원들을 설득하려 했지.”

“알마티 자본가들과… 함께한다고? 당신이?”

바르코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지하 도시 시장인 루키우스 베르코프와 알마티 자본가들의 수장인 장 베르코프.

두 사람의 관계는 바르코 역시 알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끔찍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아들의 손을 잡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센트럴이 지하 도시를 공격했고, LAPD와 지하 도시 자경단이 격돌했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요?”

“아직 늦지 않았네. LAPD 자네들만 태도를 바꿔 우리와 함께한다면, 일을 바로잡을 수 있어.”

“왜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었소.”

알마티 LAPD를 이끄는 이는 서장이다.

“난 자네가 LAPD를 대표해 주었으면 좋겠거든.”

곧이어 외곽 지역에서부터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자경단에 이어 지하 도시의 주민들까지 지상으로 밀고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골목 어귀에서 경찰 하나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다가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서, 서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