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버지와 아들 (1)
“살려 주세요… 제발…….”
젊은 경관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힘겹게 중얼거렸다.
뜨거운 핏물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 골목길을 적시고 있다.
“누가… 나를 좀…….”
거리를 올려다보았지만, 굳게 닫힌 창문들은 열리지 않았다.
경관은 벽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힘겹게 목에 찬 펜던트를 꺼낸다.
딸깍.
경찰복을 입은 자신과 그 뒤에 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옆에 기대서 있는 아내.
어린 시절부터 그의 꿈은 단 하나였다. 지상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지하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LAPD 경관의 가족들은 지하로 밀려나지 않는다.
가난한 직공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지하로 쫓기지 않기 위해 경관이 되어야만 했고, 기어코 시험에 통과해 임관에 성공했다. 덕분에 그의 가족들은 지상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고, 함께 살아갈 아내를 얻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곧 죽는다.
그토록 피하고 피해 온 지하, 결국은 그곳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지하에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토록 발버둥을 쳤건만, 결국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이들에 의해 끝을 맞이한다.
자신이 이렇게 죽어 버린다면 얼마 전 결혼한 아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하로 밀려나는 걸까.
“이보게!”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게.”
허름한 양복 차림의 노인이 피에 젖은 경관의 손을 붙잡고 있다. 경관은 그런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내 아이가… 아내를…….”
그러나 경관은 말을 제대로 끝맺을 수 없었다.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루키우스는 차갑게 식어 버린 경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었군.”
경관은 아직 20대에 불과한 듯 앳된 얼굴이었다. 가족을 걱정하던 그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슬픈 눈으로 경관의 펜던트를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가만히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렇게 될 줄 모르셨습니까?”
그런 루키우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럴 리가.”
몰랐을 리 없다.
살해당한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자경단원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고, 카심의 메타휴먼들까지 지상으로 올려 보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바로 지하 도시의 시장, 루키우스 베르코프였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원한 적은 없네.”
무책임하고 비겁한 말인지도 모른다. 결국 전쟁을 각오한 순간, 무고한 목숨의 희생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레이는 죄책감과 슬픔이 뒤섞인 루키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금 불길이 오른다.
매캐한 연기가 골목을 감싼 와중에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에도 무수한 젊은이들이 죽어 가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키우스가 도시 중심부,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서두르도록 하지.”
루키우스는 피로가 몰려오는 듯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다.
* * *
알마티 중심부, 리치 타운.
부유층들은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리치 타운 주민들은 자신을 외부 알마티 주민들과 구분 지었으며, 그런 일련의 규칙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올리려 했다.
악취를 막기 위해 쓰레기 처리 시설을 없앴고, 하층민과 섞이고 싶지 않아 정해진 시간 외에 외부인의 진입을 제한했다.
청소부나 배달부 등 노동자들은 주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통금 시간 직전에만 리치 타운에 들어올 수 있으며,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엔진 장치는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메타휴먼의 출입은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리치 타운의 주민들을 수발들기 위한 인력 회사가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리치 타운을 손가락질하며 욕했지만, 정작 리치 타운 주민들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치 타운 주민들에게 알마티의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기업에 빌붙어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이들과 그들의 공간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 사항은 오로지 센트럴의 유행과 센트럴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리치 타운의 주민들의 시선은 알마티 시내를 향하고 있을 터였다.
“이게 대체 무슨… 들은 거랑 다르잖은가 말이야!”
알마티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본 마틴 벨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틴은 이미 두 시간 전, LAPD 서장으로부터 오늘 밤 지하 도시와 관련하여 소동이 벌어질 거라는 정보를 들었다.
“그저 약간의 소요일 뿐입니다. 이번 일이 잘 풀린다면 센트럴의 태도가 전향될 수도 있으니, 알마티 시민들에게도, 회장님께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마틴은 서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알마티 시민을 걱정할 만큼 책임감 있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알마티 시민을 얼마든지 희생시킬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장의 계획은 분명 마틴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대외적 흠이었던 지하 도시를 청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산만 잡아먹는 빈민들을 이번 기회에 쓸어버릴 수 있다.
알마티 의회에서 통신망을 지하 도시까지 연결해 달라는 제안을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이번 기회에 지하 도시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사업 따위 당장 중단시킬 수 있을 터였다.
“만약 이번 일이 잘 풀린다면, 저도 회장님을 전폭적으로 돕겠습니다. 센트럴에서 많은 분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서장은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센트럴 중앙에 진출할 계획이었다.
지금껏 지원해 온 경찰이 고위직으로 승진한다는 건 마틴에게도 반가운 일이었고, 특히 센트럴 오더를 앞둔 가운데 센트럴 고위직에 닿을 수 있는 선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마틴은 흔쾌히 서장의 요청에 따라 LAPD 통신망을 점검했고, 긴급 자금까지 지원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야. 이건…….”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도시 중요 시설에서 불길이 피어올랐고, 오래도록 그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소란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가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사격 소리와 비명 소리까지 들려왔다.
“서장, 이 멍청한 새끼가……!!”
마틴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뒤, 황급히 전화를 집어 들었다.
당연하게도 LAPD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서장 직통 전화 역시 완전히 먹통이었다.
뒤쪽 침대에서 누워 있던 애인이 발가벗은 채 마틴에게 다가온다.
“오빠, 왜 그래? 잠이 안 와?”
그러나 마틴은 야릇한 모습의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부산히 다이얼을 눌렀다.
“보안팀, 지금 바깥 상황 보이지? 전부 비상대기하라고 해. 보안 시스템 최대 수준으로 높이고, 우리 사측 자산만큼은 확실히 지켜. 알았나?”
“오빠, 그런 재미없는 건 나중에 하고…….”
“저리 치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이 멍청한 계집이!”
마틴은 성난 불독처럼 으르렁대며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 애인의 어깨를 밀쳐 버렸다.
“오, 오빠……!”
밀려난 애인이 슬쩍 눈물을 내비쳤지만, 마틴은 그러거나 말거나 책상에 올려 둔 시가를 입에 물었다.
어차피 그녀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알마티 촌구석의 가수치고 그럭저럭 반반하기에 데려왔지만, 어차피 그녀 역시 한몫 잡아 보겠다고 그를 따라온 것에 불과했다.
며칠을 함께 지냈지만 마침 질려 가던 참이고, 그처럼 어리석은 여자를 곁에 둘 마음도 없었다.
“날이 밝거든 이 집에서 꺼져.”
냉정히 한마디를 내뱉은 마틴이 창문 앞 흔들의자에 몸을 누였다.
“나쁜 새끼!”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에도 불구하고 마틴의 시선은 어느새 창밖 기계 공원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뭐지……?’
방금까지 훤히 밝혀져 있던 기계 공원의 불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기계 공원은 리치 타운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다. 기계 공원을 통과하면 곧장 리치 타운에 들어올 수 있다.
알마티에서 폭동이 발발한 와중에 기계 공원의 불이 꺼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서장이 아무리 무능하다 해도 리치 타운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알마티 몇 군데에서 소란이 벌어진 것과 리치 타운이 뚫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리치 타운에서 매년 흘러나오는 후원금의 규모는 LAPD의 3년 예산을 훌쩍 넘어서는 규모였다. 그런 리치 타운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장소다.
물론 애당초 지하 도시 불량배들이 LAPD의 무장과 리치 타운의 보안 장비를 뚫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마틴은 기계 공원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제법 오랫동안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마틴은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았다.
“너무 예민한 게야. 별일 아닌 것을.”
마틴은 가만히 한숨을 내쉰 뒤, 세수라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인터폰 소리가 울렸다.
삐리리리…….
마틴의 책상 위로 문밖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오른다.
웬 남녀가 현관 앞에 서서 종을 울리고 있었다.
마틴은 허리를 굽혀 현관 앞에 선 남녀의 모습을 살폈다.
“…장?”
틀림없이 장 베르코프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 옆에 선 이는 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의 비서였다.
인터폰을 통해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회장님, 늦은 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사안이 있어 급히 찾아뵈었습니다.”
마틴은 사무적인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 이건 또 무슨 경우이지?”
알마티 시내에 한참 소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장이 비서를 대동하고 방문했다. 마틴은 이 방문의 의미를 계산하며 가만히 팔짱을 꼈다.
장 역시 LAPD에 귀를 심어 놓았을 테니, 소동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마티에서 벌어진 소동은 마틴의 예측을 한참 넘어선 수준이고, 이미 그저 ‘소동’이 아닌 ‘사건’의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자신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어지간히 놀랐으니, 장 역시 어지간히 당황했을 것이다. 아마 장은 자신과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러 찾아온 것이리라.
그러나 오만한 패륜아 장 베르코프가 먼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자격지심에 빠져 무모한 투자를 거듭한 경영자.
그런 주제에 스스로 캐피탈 클럽의 알마티 지부장을 자처하는 꼴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는 공식적으로 알마티 경영자들의 대표자이다. 그런 남자를 함부로 문전 박대할 수는 없었다.
“문 열어.”
마틴의 한마디에 보안 시스템이 잠시 멈추며 현관의 잠금장치가 풀린다.
홀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현관을 통과해 정원으로 들어온 모습을 확인한 마틴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러고 나서 마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너무 조용하다.
정원 쪽이 이렇게 조용할 리 없다.
보안 시스템을 해제했지만, 마틴의 문 앞에는 밤잠 없는 불독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놈은 간밤에 낯선 이를 보면 온 동네를 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짓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문이 열리고 난 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창문을 통해 바깥쪽을 내려다보았지만, 어둠 속에서 정원의 모습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니다.
불독 녀석이 평소와 달리 잠들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너무 피곤했던 게야.’
그렇게 의심을 거두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 1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1층으로 내려갔는지, 마틴에게 쫓겨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뭐예요, 당신들?”
그리고… 다시 침묵.
돌아오는 대답도, 따져 묻는 목소리도, 심지어 비명 소리도 없다.
스스스스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에서 검은 잿가루가 휘날렸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