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혁명의 시작 (4)
고작 10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LAPD 경찰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고, 기계 공원의 절반가량이 검은 잿더미로 변해 스러졌다.
조금 전까지 온갖 기계 장치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던 공원은 재앙을 맞이한 듯 반파된 폐허가 되어 버렸고, 살아 숨 쉬는 존재라고는 장 베르코프와 비서, 단둘뿐이었다.
자그마한 태엽 소리로 가득하던 공원에서는 이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새 능력을 거두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장은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
“내가 두렵나?”
비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주저앉은 비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지하 도시 편에도, 센트럴 편에도 설 생각이 없으시다면…….”
비서에게조차 비밀로 했을 정도로 장의 능력은 지금껏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기계 공원에 들어온 LAPD를 몰살시킨 것 역시 입막음을 위한 조치였다.
그처럼 감춰 두었던 능력을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 보인 것이다.
“알마티를 집어삼켜야겠네.”
“리치 타운으로… 갈 생각이십니까?”
“그래, 맞아.”
현재 알마티에서는 LAPD와 반란군, 암살자 등 온갖 세력들이 날뛰고 있다.
이 혼란 속에서 설사 유력 인사 몇이 실종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기업의 소유자는 물론, 후계자까지 전부 죽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권리는 기업가들의 조직인 캐피탈 클럽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캐피탈 클럽의 알마티 지부장은 다름 아닌 장 베르코프였다.
“날 돕겠나, 메리? 지금껏 그래왔듯 말이야.”
비서 메리는 숨을 멈춘 채 장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능력을 사용할 때 샛노랗게 빛나던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검은빛을 띠고 있다.
아버지와 형들을 몰아낸 패륜아.
모두가 장을 손가락질했지만, 메리는 그의 열정을, 욕망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를 보좌했고, 그를 따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에 동조했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그러한 음모를 기획하기도 했다.
장을 바라보는 메리의 눈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뒤, 메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앞에 내민 장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네.”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메리의 말에 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길지 않다.
* * *
[지원을 바란다. 알마티 박물관 쪽 화재 발생! 폭발물 처리반은 신속히 이쪽으로…….]
[전망대 쪽에서 적 발견. 교전 중 경관 셋 사망. 지원 요청한다!]
[여기는 무기고. 전방 100m 앞 컨테이너에서 거수자 발견.]
곳곳에서 무전이 날아든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여기에 이른 걸까?
서장은 넋이 반쯤 나간 채 풍력 터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길에 휩싸였던 풍력 터빈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춰 있었다.
무기고로 향하는 길목의 에너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터빈은 그저 단순한 발전소가 아니다.
터빈은 알마티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거대한 상징물이었다.
터빈뿐만이 아니라 공격당했거나 당하고 있는 장소들 역시 하나같이 포기할 수 없는 곳뿐이었다.
센트럴의 영광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알마티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 그리고 LAPD 본부까지.
특히 폭발 소리와 함께 LAPD 본부에서 불길이 올랐을 당시, 서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당하느냔 말이야! 대체 어떻게……!”
지하 도시에서 올라온 적들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서장에게 가장 치명적인 장소들을 공략하고 있었다.
놈들이 파괴한 곳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의미를 지닌 곳들이다. 즉, 서장은 이번 반란을 진압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한편, 참모들은 숨 쉴 틈 없이 긴급한 상황을 계속 보고했다.
“발견된 경찰들의 시신을 보니 전부 무기를 빼앗긴 상태입니다.”
“무기고 쪽에서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서둘러 무기고로 가서 지원해야 합니다.”
터빈의 불길을 잡기 직전에 병력을 나누어 무기고로 보냈지만, 적도 무장을 갖춘 이상 피해가 얼마나 더 커질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무기고를 잃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서장은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가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야…….”
알마티 LAPD는 대륙 최고의 무장을 갖추고 있다. 전 병력이 레이저 무기와 나노 방호복으로 무장한 경우는 오로지 알마티뿐이다.
그런 정예가 고작 지하 도시에서 올라온 쥐새끼들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었다.
“본부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부가 불타 없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무슨 소리야? 무기고를 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래?”
“아무리 놈들이라고 해도 무기고 경비는 쉽게 뚫지 못할 겁니다.”
“병력을 나누시죠.”
“이미 충분히 흩어진 병력을 더 나누자니. 그건 미친 짓이오.”
참모들은 저마다 흥분한 채 저희끼리 다투기 시작했고, 서장은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장님!”
아덴 거리로 향한 바르코 휘하 경관들 몇이 허름한 차림의 사내 둘을 포박해 끌고 왔다.
“방화범들을 붙잡았습니다.”
“아덴 거리 쪽의 불길은 잡았나?”
“네. 바르코 경감님은 아덴 거리 쪽을 정리한 뒤, 본부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바르코가 본부 쪽으로 향했다는 보고에 서장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르코는 LAPD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고, 그 명성에 걸맞게 신속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른 지역들로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곳은 LAPD 본부와 무기고, 두 곳이다.
바르코가 본부 쪽으로 향했으니, 에너지 광장의 병력은 무기고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곧이어 서장의 시선이 포박된 사내 둘에게 향했다.
“이 녀석들은 뭐야?”
“붙잡은 방화범 놈들입니다.”
“이놈들이……!”
“흐, 흐흐흐흐… 꼴이 우습게 됐구만.”
“그래도 이렇게 맘껏 날뛰어 봤으니 후회는 없지. 안 그렇수, 형님?”
사내들은 실컷 웃음을 터뜨리며 서장을 조롱했다. 그 와중에 사내들을 끌고 온 경관이 침착하게 보고를 계속했다.
“놈들을 지휘하는 자는 지하 도시의 시장 루키우스입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지하 도시의 주민 전원이 지상으로 올라올 거라고 합니다.”
“이 정신 나간 놈들이……!!”
클라이드가 지하 도시 발전 시설을 마비시키겠다고 통보했을 때, 서장 역시 내심 지하 도시의 저항을 걱정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분노에 이끌린 폭동 정도를 생각했을 뿐, 지하 도시에서 이렇게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움직임을 보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감히 우리 LAPD를 어떻게 보고!”
“흐흐, 그 잘난 LAPD 본부가 싸그리 타고 있던데?”
더는 참지 못한 서장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주변에서 말릴 새도 없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겨 버렸다.
탕! 탕!!
이마에 총알이 쑤셔 박힌 두 사내의 몸이 힘없이 쓰러진다.
“지금부터 전쟁이라고 생각해! 거리를 누비는 놈 중 LAPD가 아닌 자들은 전부 즉결 처형해 버려. 알았나?”
“네!!”
서슬 퍼런 시장의 명령에 부하들은 무기를 고쳐 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루키우스, 그 두목 놈은 반드시 붙잡아! 그놈 모가지를 알마티 정문에 매달아 버릴 테다!”
그때였다.
“민중을 지키는 지팡이라는 자들이…….”
어딘가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민들을 마음대로 학살하겠다는 게로군.”
광장으로 이어진 다섯 개의 골목, 그중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곧이어 골목 곳곳에서 묘한 쇠붙이 소리가 요란히 울리기 시작했다.
키리릭… 키릭…….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온다.
“누구야!”
서장이 고함을 내지르자, 경찰들은 무기를 고쳐 잡고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와 함께 라이트가 어두운 골목들을 일제히 비춘다.
“저, 저거……!”
“저게 뭐야?!”
골목에서 나타난 쇳덩이들을 목격한 경찰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끼익!
끼리릭, 끼리릭, 끼리릭!
강철로 제작된 다리들이 거미의 그것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재활용을 위해 석재도 간단히 부숴 버리던 집게손이 위협적으로 흔들리고, 고철들을 압착시키기 위해 장착한 망치가 바닥에 질질 끌리며 콘크리트를 부순다.
분명 쓰레기장에서 사용되던 물건들이건만, LAPD와 대치한 이 순간만큼은 어엿한 병기처럼 보였다.
“메, 메타휴먼?!”
경찰들은 질겁하며 총구를 겨누었고, 서장 역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메타휴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갖가지 형태로 개조된 메타휴먼들이 골목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거대한 거미나 바퀴벌레처럼 골목을 쏟아져 나온 놈들은 LAPD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단번에 수백 기에 이르는 메타휴먼들이 주변을 겹겹이 감싼다.
그렇게 포위망이 완성된 가운데, 마지막 메타휴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뭐야?!”
최소 5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몸집에 양팔에는 거대한 드릴이 장착되어 있고, 검은 갑주가 온몸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다.
다리 대신 캐터필러 방식의 바퀴가 그 육중한 몸뚱어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탱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메타휴먼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오, 서장.”
“다, 당신!”
정리되지 않은 산발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온 얼굴을 채운 주름.
고작 몇 년 사이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늙어 버렸지만, 서장은 눈앞의 늙은 사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카심……!”
“알아봐 주시는군.”
“감히… 감히 이런 짓을!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어둠 속에서 나타난 개조 메타휴먼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기괴했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년 전, 로보티안 법안의 통과가 임박했다.
메타휴먼 중 이성을 갖게 된 기체에 인간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법령.
서장은 메타휴먼들이 인간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알마티 일부 기업가들 역시 기계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사태를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서장은 LAPD를 동원해 대대적인 폐기 작업에 나섰다.
그들은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이유로 파괴되었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법령이 통과되기 직전에 폐기 처분되어 대량으로 버려졌다.
당시 그 처분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지금의 서장이었다.
그리고 그 처분을 막으려 한 인물이 바로 드림 코퍼레이션의 기계공학자 카심이었다.
“멈추시오. 멈추란 말이야! 당신들, 지금 인간을… 인간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살해하고 있는 거요!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란 말이오!”
헛소리였다.
애당초 기계로 생산된 놈들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놈들은 그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냈을 뿐이다.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 기계 따위를 인간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서장은 카심을 체포해 유치장에 처박은 뒤, 메타휴먼의 대량 폐기 작업을 이어 갔다.
로보티안 법안 통과 뒤, 금융 버블의 붕괴로 인해 테러 사건이 발발했고, 서장은 테러 위협을 이유로 더 많은 메타휴먼을 폐기 처분했다.
그 와중에 보석으로 풀려난 카심이 실종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미쳐 버린 기술자의 실종에 관심 두지 않았고, 메타휴먼들은 계속해서 지하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카심과 메타휴먼들이 돌아왔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말이야.”
카심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