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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18화 (119/220)

118화 보니 앤 클라이드 (2)

태일은 잠깐 사이에 검은 후드의 남자들을 살해하는 보니의 모습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눈앞의 소녀는 더 이상 녹스가 아니었다.

알렉세이 딘의 소울로 빚어진 녹스는 딘과 닮은 존재였고, 지식욕과 탐구심으로 가득한 존재일 뿐, 살육과 힘,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소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하게 사람들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일은 그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전 대륙을 누빈 일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금발을 지닌 자들, 바토리 일족.

“보니, 너…….”

제아무리 클라이드라 해도 잔인한 손속과 강력한 힘에 어지간히 놀란 듯 보니를 바라보았다.

“왜? 무서워?”

보니의 물음에 클라이드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보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클라이드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헝클어뜨리자 보니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언뜻 보면 정다운 남매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뒤로 펼쳐진 광경은 피비린내 나는 살인 현장이었다.

함께 임무를 수행한 동료 부하들이 죽었음에도 클라이드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보니 역시 자신이 살해한 이들의 시신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태일은 그런 보니와 클라이드의 모습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바로 그때, 태일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프랑켄이 보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녹스……!”

클라이드가 고개를 돌려 돌변한 표정으로 프랑켄을 노려보았다.

“뭐지? 너도 우릴 막을 생각인가?”

“오빠, 잠깐만.”

보니는 클라이드를 막은 뒤, 천천히 프랑켄 쪽으로 다가왔다.

“프랑켄, 지금까지 고마웠어. 넌 오랫동안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지.”

보니가 가만히 손을 올려 프랑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프랑켄은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고, 그저 일그러진 얼굴로 보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네 친구였던 녹스가 아니야.”

녹스이자 보니였던 소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한다.

“난 ‘보니 바토리’야.”

결국 녹스는 보니의 몸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보니가 녹스의 힘을 빌려 깨어났을 뿐이다.

보니는 프랑켄의 얼굴에 올려놓은 손을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보니는 너에 대해 알지 못했지.”

“녹스, 너는… 아니잖아. 이렇게 잔혹한 짓을 벌이는 건… 네가 아니잖아.”

보니는 피비린내를 풍기면서도 죄책감 한 점 없이 천진하게 프랑켄을 바라보고 있다.

LAPD 경찰로 살아오며 수많은 범죄자를 겪었지만, 지금의 보니처럼 공포감을 준 자는 없었다.

“제발… 정신 차려, 녹스.”

프랑켄은 녹스의 다정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힘에 취해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글레이프니르. 그래, 그게 있으면……!”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계, 글레이프니르라면 그녀가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기계를 녹스의 머리에 씌울 수만 있다면, 폭주하던 힘과 광기가 가라앉고 원래의 녹스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프랑켄의 말을 들은 보니가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물건이 나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야?”

곧이어 프랑켄의 뒤쪽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끼이이…….

비둘기의 날개에 쥐의 얼굴, 고양이의 몸을 가진 키메라가 푸드덕거리며 글레이프니르를 운반해 오고 있었다.

프랑켄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기겁하고 말았다.

지금껏 나무와 돌, 풀, 흙으로 능력을 발현하던 것과 달리, 동물들을 사용해 뮤테이션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괴물로 변해 버린 키메라는 온몸을 어색하게 버둥거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내 능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실험해 보았지.”

키메라는 글레이프니르를 운반해 보니의 손 위에 올려놓았고, 보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보았다.

보니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프랑켄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발 녹스!”

그러나 보니는 글레이프니르를 땅바닥에 떨어뜨렸고, 그와 동시에 땅에서 솟아오른 정체불명의 넝쿨이 감싸 으스러뜨렸다.

“녹스는 이제 없어.”

“끼이이이!”

차가운 보니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키메라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보니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파짓!

푸른 불빛이 번쩍인다.

한 줄기의 번개에 관통당한 키메라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추락해 땅바닥에 뒹굴었다.

곧이어 모두의 시선이 번개를 날린 당사자, 태일에게 향했다.

“정말 가관이군.”

태일은 혐오스럽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땅에 떨어진 키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침을 탁 뱉은 그가 고개를 들어 가만히 보니를 노려보았다.

“구역질나는군.”

“…….”

프랑켄을 조롱하며 비웃던 보니이지만, 태일을 상대로는 쉽게 입을 놀리지 않았다.

보니는 태일의 밑바닥 없는 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녹스이던 당시에는 전류를 휘감은 채 홀로 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그의 능력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느껴진 것은 ‘두려움’이었다.

‘내가… 공포를 느낀다고?’

보니가 능력으로 만들어 낸 넝쿨들은 태일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전류에 의해 부스러졌다.

보니는 생경한 감정에 당황하며 태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보니가 뭐라 입을 열기 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클라이드가 태일 쪽으로 다가왔다.

“감히 누구를 겁주는 거지?”

클라이드의 몸 주변, 공기의 흐름이 급변하며 거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일 마음은 없는 듯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나와 동생을 만나게 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지, 대장.”

“대장…이라.”

대장이라는 호칭에 태일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태일은 클라이드의 상관이었다. 함께 센트럴을 공격했고, 등을 맞대고 싸웠으며, 승리를 맛보았다.

그러나 한때 동료였던 클라이드는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반대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대장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그래, 그런 것 같네.”

물론 태일 또한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인연이 끊어진 것은 배신의 밤, 그가 태일을 습격한 바로 그날이다.

“떠날 거냐?”

“그래. 보니를 찾은 이상, 놈들에게 복종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군.”

몸에 휘감고 있던 전류가 사라져 간다.

클라이드는 배신자이자 위험천만한 인물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살해하고, 멀쩡한 동물들을 이용해 키메라를 만들어 버린 보니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더 이상 센트럴을 위해 일하지 않는 녀석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여유는 없었다.

알마티에서 곧 사건이 터질 것이고, 센트럴을 막기 위해서는 알마티에서의 살육을 막아야 했다. 클라이드는 이번 사건에 더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갈 곳은 정했냐?”

“글쎄, 보니가 가고 싶다면 어디든.”

클라이드의 몸을 휘감은 바람 역시 잦아든다. 그러고는 가만히 보니의 손을 잡았다.

보니는 빙긋 웃으며 클라이드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결국 프랑켄은 설득을 포기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고, 하반신을 감싸고 있던 넝쿨이 부스러져 사라졌다.

“곳곳을 떠돌게 되겠군.”

비공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보니의 눈동자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클라이드는 그런 보니와 함께 대륙 곳곳을 누빌 것이다.

붉은 눈동자를 지닌 두 사람은 많은 이들의 표적이 될 것이고, 센트럴 역시 클라이드의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나 태일은 둘을 걱정하지도, 행운을 빌지도 않았다.

단지 짧게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가라.”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진다. 남은 담배가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때, 클라이드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태일에게 건넸다.

클라이드는 태일이 애연가라는 사실도, 세연 때문에 금연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미안했어, 대장.”

클라이드는 그렇게 자신의 배신을 짧게 사죄했다. 태일은 순순히 담배를 건네받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작 한마디로 덮일 죄가 아니다. 그 사실을 클라이드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클라이드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도 이곳에 와 있어.”

담배를 꺼내던 태일의 손이 멈추었다.

“대장을 배신한 녀석들도, 그리고… 한세연도.”

막 꺼내 든 담배 한 개비가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연이가… 이곳에 있다고?”

“정확한 위치는 몰라. 하지만 곧 만나게 될 거야.”

“…….”

“행운을 빌어, 대장. 진심이야.”

클라이드는 그 말을 끝으로 보니의 손을 잡은 채 등을 돌렸다.

보니는 힐끗 프랑켄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아무 말 없이 클라이드와 함께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고, 그렇게 보니와 클라이드 남매는 난장판이 된 숲을 유유히 떠나갔다.

태일은 그런 두 사람으로부터 눈길을 돌려 알마티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곧 일이 시작될 것이다.

* * *

다빈치 동력실 안, 홀로그램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던 발터와 막야는 떠나가는 남매의 모습을 보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떠났군.”

“…그러네요.”

발터와 막야는 멍하니 자신들의 앞에 놓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비공정 다빈치의 설계도를 비롯한 각종 도면들과 기록 일지, 엔진 모듈과 부품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조차도 녹스가 남긴 물건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녹스는 마치 이전부터 부부를 알고 있던 듯 스스럼없이 둘을 대했고, 동력실을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들을 넘겨주었다.

오죽하면 떠맡기듯 물건들을 건네는 녹스를 보며 막야가 걱정스레 물을 정도였다.

“이 물건들을 정말 우리가 받아도 되는 거니?”

“나는 딘과 달라.”

녹스는 그 나이대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그냥 떠나지는 않을 거야.”

그것은 마치 당장에라도 떠날 사람이 할 법한 말이고, 실제로 그녀는 클라이드와 함께 떠나 버렸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남긴 유산의 무게였다.

“이것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닌데…….”

보니가 남긴 것은 신소재의 개발에서부터 복잡한 기계장치의 설계, 나아가 소울웨폰의 안정성과 위력에 대한 온갖 비법들이었다.

그것은 수년 전 포트리스에서 목격한 기술력들의 집약이자, 친절한 요약본과도 같았다.

그야말로 몇 세기는 앞선 오버테크놀로지의 정수가 노부부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낡은 대장간을 운영하며 구식 무기를 만들던 두 사람에게 있어 그 기록의 무게감은 엄청난 부담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 끝까지 가 보고 싶어. 설사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부부는 장인이자 모험가였고, 두려움과 부담감만큼이나 호기심과 열정이 컸다.

“다만, 그 아이의 부탁을 먼저 들어줘야죠.”

“그래, 그렇지. 이걸 전해 달라고 했지.”

발터는 줄곧 소중히 쥐고 있던 소총을 조심스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녹스가 전해 주고 간 소총의 옆면에는 ‘Nox―Franken’이라는 글자가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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