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사라진 불꽃 (5)
양팔을 잃은 채 절망한 칼리드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은 이는 다름 아닌 민호였다.
칼리드의 처참한 꼴을 보다 못해 직접 그의 숨을 거둔 것이다.
“쿨럭, 빌어먹을…….”
민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총을 고쳐 잡았다.
페이진의 권총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며, 카츠미의 보검 덕분에 발전소의 암살자까지 제압했다.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카츠미와 페이진은 순순히 상황을 끝낼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니, 둘에게는 상황을 판단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소울웨폰에 정신이 잠식된 두 사람은 그저 전투 의지만 남아 터무니없는 소울을 폭발적으로 쏟아 내고 있었다.
붉은 피바람과 회색 화약 연기가 사방을 감싼 가운데, 카츠미와 페이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이 찢어질 듯 웃음 지었다.
“둘 다 정신 차려!”
다마스커스 형제의 소울을 집어삼킨 카츠미와 페이진은, 아니, 두 사람의 소울웨폰은 이제 서로를 노리고 있었다.
카츠미는 붉은 보검을, 페이진은 회색 권총을 들어 올린다.
눈앞의 강한 힘에 반응하여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두 짐승이 서로의 이빨을 내밀었다.
둘은 먹잇감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형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발전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안드레이는 터무니없는 힘의 충돌 사이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에 거대한 바람이 몰아치며 피와 흙먼지가 뒤섞인다.
당장에라도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처럼 거대한 힘이 충돌했다.
* * *
“넌 약하다.”
어린 카츠미의 앞에는 차가운 얼굴의 전대 당주가 서 있었다.
“자질도 부족하지.”
알고 있다.
“네 오빠라면 더 잘했을 거다.”
그 역시 알고 있다.
곧이어 당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켄이 나타났다.
“부하들은 당신을 따르지 않아요.”
어른이 된 카츠미는 그런 자켄을 바라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당신을 배신했죠.”
“나는……!”
“약하니까.”
“…….”
뭐라 대꾸하려던 카츠미는 차가운 자켄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신에게는 당주의 자격이 없어.”
카츠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귓가에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내게 맡겨.”
달콤한 목소리가 카츠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라면 너에게 강한 힘을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지.”
“넌… 누구지?”
자켄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나타났다.
“너는…….”
“그래, 나야.”
카츠미. 바로 자신이 서 있었다.
“너의 분노, 너의 욕망, 너의 잠재력… 그래, 너의 ‘힘’.”
피 냄새가 풍겨 온다.
어느새 붉은 피가 발밑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곧이어 온 사방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넘쳐흘렀고, 어째서인지 카츠미는 그 광경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받아들여. 모두가 너의 것이 될 수 있어.”
피비린내가 달콤하게 느껴지고, 매혹적인 목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린다.
곧이어 앞에 서 있던 카츠미의 형체가 핏물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카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 역시 그렇게 녹아서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아늑히 먼 곳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차려!”
그러나 고함 소리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저 잠들어 있으면 돼. 그럼 모든 게 해결되어 있을 거야.”
그래, 누군가 대신 해결해 줄 것이다.
피는 어느새 목까지 차올랐고, 카츠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핏물 속은 한없이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래, 이대로 잠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서 눈을 감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짐을 누군가 대신 져 준다면…….
“정신 차려!”
귓가에 쩌렁쩌렁 울린 목소리에 카츠미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방금 그 목소리…….”
사방을 뒤덮은 핏물,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불안감을 애써 지운 채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바로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들면 안 되네.”
카츠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당신은…….”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라네.”
사방을 메운 핏물이 증발하듯 사라져 간다.
* * *
“아들아.”
천중회의 보스였던 웨이창은 페이진을 ‘아들’이라 불렀다.
“고작 계집의 수발을 들기 위해 날 배신했더냐?”
“…….”
페이진은 웨이창의 피에 젖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야심이 고작 그 정도였느냐?”
“내… 야심?”
페이진은 가만히 되뇌며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50구역 마피아 세력을 통일하고, 나아가 암흑가의 보스가 되려 했다.
마피아다운 결단 대신 협잡질이나 일삼는 꼰대들의 행태에 분노했고, 마피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동생들은 그런 페이진을 따랐다.
웨이창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어둠 속에서 동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형님을 믿었소.”
“내가 뭐 때문에 당신을 따랐는지 기억해?”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알고 있어?”
동생들 중 일부는 배신의 밤, 목숨을 잃었다.
자켄의 손에, 그리고 카츠미의 손에.
그들의 죽음은 페이진의 욕심 때문이었다.
“아니, 욕심이 아니야.”
동생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곧이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회색 안개 속에서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겨온다.
“힘이 있었다면 모든 걸 해낼 수 있었어. 안 그래?”
“힘…….”
회색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지금의 너를 봐.”
그렇게 걸어 나온 이는 다름 아닌 페이진, 자신이었다.
“한심하잖아. 안 그래?”
페이진의 얼굴을 한 그가 히죽 웃는다.
“내가 그 힘을 줄게.”
회색 안개가 더욱 뿌옇게 인다. 그 매캐한 연기 속에서 페이진의 의식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너의 모든 꿈을 내가 이루어 줄게.”
“나의 꿈…….”
“그래. 그러니까 여기서 좀 쉬고 있어.”
페이진은 안개 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웬 벌레가 귓가를 맴도는 걸까?
“…….”
결국 참다못한 페이진이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그렇게 눈을 뜬 페이진은 깜짝 놀라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자신의 코앞에 웬 노인이 서 있던 것이다.
“뭐, 뭐야, 당신?”
“이런, 이렇게 쉽게 눈을 뜰 줄은 몰랐는데.”
“누, 누구야? 아니, 어디서 본 얼굴이긴 한데…….”
페이진이 멍하니 노인의 얼굴을 보고 있는 사이, 주변의 회색 연기가 잦아들었다.
* * *
발전소 앞, 거대한 힘의 충돌 속에서 민호와 안드레이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카츠미와 페이진은 서로를 향해 병기를 겨눈 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힘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충돌하던 힘이 점차 확장되어 발전소 근방을 가득 메우고, 사방에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젠장, 둘 다 정신 차려!! 고작 무기 따위에 먹히지 말란 말이야!”
민호는 있는 힘을 쥐어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지만, 그 역시 제대로 몸을 가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그새 난리가 났군.”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루, 루키우스 님?!”
“시장님!”
민호와 안드레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지상으로 나간 루키우스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한 팔자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들 고생이 많군.”
“지금 느긋하게 그런 얘길 할 때가 아닙니다!”
민호가 다급히 외쳤지만, 루키우스는 카츠미와 페이진의 폭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안드레이가 고함을 내지른다.
“시장님, 위험합니다!”
소울웨폰에게 의식이 잠식된 페이진과 카츠미가 서로를 향해 병기를 겨눈 가운데, 사방의 건물 벽에 금이 갔고, 땅이 흔들렸으며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웬만한 능력자들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안으로 들어갔고, 카츠미와 페이진의 앞에 섰다.
“시장님!!”
루키우스는 가만히 양손을 뻗어 각각 카츠미와 페이진의 병기에 손을 얹었다.
거대한 힘이 몰아치는 가운데, 루키우스는 마치 명상하듯 눈을 감고 깊이 집중했다.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루키우스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듯 중얼거렸고, 곧이어 카츠미와 페이진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힘이 잠시 멎어들었다.
“둘 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군.”
루키우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두려움을 떨치고 제대로 현실을 직시하게.”
“루키우스 님…….”
민호는 루키우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착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네. 자신의 길은 자신의 발로 걸어가야 하는 게야.”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이 점차 잦아들고, 대지의 진동이 멈추며 흙먼지가 가라앉는다.
보검과 권총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 역시 점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잠시 뒤, 어둠 속에서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온 가운데, 카츠미와 페이진 모두 힘없이 쓰러졌다.
“카츠미! 페이진!!”
갑자기 쓰러진 두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란 민호가 황급히 둘을 붙잡았다.
둘 모두 죽거나 다친 것은 아니지만, 잠이 든 듯 의식을 잃은 채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과도한 힘을 끌어 써서 잠시 정신을 잃은 게야. 너무 걱정 말게.”
“감사합니다.”
민호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루키우스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루키우스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폭주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을지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이 깨어나거든 무기의 힘에 의존하지 말라고 전하게. 그 이유는 자네 역시 알고 있을 테지.”
“네, 시장님.”
민호의 대답을 들은 루키우스는 고개를 돌려 불 꺼진 발전소를 바라보았다.
“이게… 센트럴의 대답이로군.”
센트럴은 처음부터 루키우스가 복종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렇기에 지하도시의 불꽃을 꺼 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혀, 형님!! 형!!”
발전소 안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끝까지 문을 지킨 시몬의 시신을 발견한 안드레이가 처절한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루키우스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잠시 망설이던 루키우스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발전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루키우스는 발전소 안의 수많은 시신들을 확인했다.
루키우스는 피투성이가 된 발전소 내부를 바라보며 가만히 양팔을 늘어뜨렸다.
“아, 아아……”
토마와 시몬이 죽고, 발전소의 인부와 자경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야나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물론, 카츠미와 페이진의 폭주를 막을 때조차 당황하는 기색이 없던 루키우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노인의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인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루키우스와 함께 지하 도시에 돌아와 야나르가 꺼진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꽤 놀라긴 했지만, 그 과정에 이렇게나 많은 살육이 자행되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여기는… 주요 거점도 아니잖아.”
고작 지하 도시다.
지상에서 밀려난 자들이 마지막에 닿는 마지막 거처.
센트럴은 가장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거처까지 빼앗아 버렸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지하 도시가 주요 거점은 아니지.”
냉정한 눈빛으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지하 도시 주민들은 가장 파괴적인 기폭제야.”
“그게 무슨… 뜻이야?”
레이는 대답 없이 루키우스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전소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키우스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안드레이, 일어나. 다들 슬픔을 삼켜라.”
울음소리가 멎는다.
곧이어 모두의 시선이 루키우스에게 모였다.
“대장들을 불러라. 생존자들을 전부 모아.”
“시장님…….”
“우리는 지상으로 간다.”
센트럴은 애당초 지하 도시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처음부터 센트럴이 노린 것은 지하 도시의 ‘주민들’이었다. 정확히는 주민들의 반란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