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12화 (113/220)

112화 사라진 불꽃 (2)

시청 근처의 허름한 여관 2층 방.

창을 통해 거리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민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일이 크게 터진 모양인데.”

온 도시가 어둠에 뒤덮인 가운데, 귀에 거슬리는 종소리와 고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신경 꺼. 자경단들이 알아서 하겠지.”

“글쎄, 벌써 30분도 훨씬 넘게 지났어. 소란이 너무 길게 이어지는 거 같은데? 불이 다시 피어오를 기미도 없고.”

별 관심 없다는 듯 드러누운 페이진과 달리, 카츠미 역시 염려가 되는 듯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주, 아까 얘기한 거 잊었어? 우리는 이방인이야. 너무 나대는 건 좋지 않다고.”

지하 도시에서 이방인에 불과한 세 사람이 함부로 개입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혼란에 빠진 거리에 대책 없이 나서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세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이기에 섣불리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직접 공격을 받지 않는 한 행동에 나서지 않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소란은 줄지 않았고, 심지어 여자와 아이들의 비명 소리까지 들려오자 민호와 카츠미는 힐끔거리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일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도는 확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우리도 일단 이 도시의 시장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고…….”

보푸라기가 인 이불 위에 누워 있던 페이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알았수다. 나갑시다, 나가. 나가면 될 거 아냐?”

“아니, 뭐, 귀찮으면 여기 기다리고 있어도 돼. 금방 알아보고 올 테니까.”

“뭐? 나만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 나를 뭐로 보고! 내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아? 나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걱정된다고!”

“…….”

페이진이 목소리를 높이며 성을 내자, 민호와 카츠미는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페이진을 바라보았다.

“이봐,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나갈 거면 빨리 나가지.”

민호의 말에 카츠미와 페이진은 제각기 무기를 집어 들었고, 특히 제각기 발터와 막야에게 받은 무기를 챙겼다.

“상황만 알아보고 오자고, 상황만.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고.”

“역시 넌 여기 남는 게 좋겠는데…….”

페이진은 민호의 말을 못 들은 척 가장 앞서 방문을 나섰다.

“난장판이군.”

페이진은 짧은 한마디로 도시의 상황을 요약했다.

손전등으로 비춘 거리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마구 버려진 쓰레기와 누군가에게 얻어맞아 곤죽이 된 사람들이 벽에 기대 쓰러져 있었다.

골목 곳곳에서 뜻 모를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웬 꼬맹이가 거리를 뛰쳐나와 어디론가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치안이 완전히 마비된 골목의 모습이었다.

꽤 익숙한 풍경이기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각자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다들 물건 간수 잘해야겠는데.”

“고작 불 하나 꺼졌다고 이렇게까지 도시가 엉망이 될 수 있나?”

페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찰나, 뒤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나르는 단순한 불꽃이 아니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세 사람이 급히 뒤돌아서자, 얼굴에 긴 흉터가 새겨진 남자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당신?”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한 민호가 총을 겨누며 목소리를 높이자, 남자는 순순히 양팔을 들어 올려 적의가 없음을 표했다.

“놀랐다면 미안하게 됐군. 내 이름은 야곱. 자경단의 대장 중 한 명이고, 당신들을 확인하러 온 참이야.”

“우릴 확인하러 왔다고?”

“그래. 이 상황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건 역시 이방인이니까.”

야곱은 순순히 대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헛짚은 모양이군.”

“이 소란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거라고?”

“사고? 발전소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높은 확률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야곱이 조용히 물었다.

“혹 시장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나?”

“루키우스 시장이라면 지상으로 갔어.”

“…그랬군.”

민호에게 루키우스에 대한 정보를 들은 야곱이 그제야 완전히 의심을 거둔 듯 팔을 내리며 주변 골목을 돌아보았다.

“다들 나와라!”

곧이어 야곱의 목소리를 들은 자경대원 열댓 명이 거리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몇은 지붕 위에서 셋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곧장 거리로 내려와 늘어섰다.

“웬 쥐새끼들이 우릴 감시하나 싶었는데, 당신 부하들이었나?”

페이진이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정작 지붕과 골목 곳곳에 숨어 있던 이들의 존재는 눈치챘지만, 바로 뒤에 서 있던 야곱의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데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야곱은 페이진의 말에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 대열을 갖추고 선 대원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종루로 간다!”

“종루? 발전소가 아니라?”

카츠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야곱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혼란을 키우고 있어. 일단 주민들을 진정시키려면 혼란을 유도하는 놈들부터 잡아야 한다.”

“…….”

불이 꺼진 직후부터 도시 전체에 시끄러운 종소리가 쉼 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주민들을 자극했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베테랑 군인과 같은 인상의 야곱은 그 누구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다른 대장들은 분명 발전소로 향했을 테지. 이쪽 병력은 숫자가 적으니, 당장 급한 적부터 제거하는 게 합리적이다.”

야곱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카츠미가 선뜻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돕죠.”

“당주?”

페이진이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듯 말리려 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보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이방인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

“그런 것치고 도시 상황이 엉망인 거 같은데?”

민호의 말에 야곱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의 놈들이면 평범한 녀석들은 아닐 거예요. 짐작 가는 범인도 있고.”

태일과 맞붙은 능력자. 그는 태일을 압도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남자였다. 만약 그가 이번 일을 벌인 자라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럼 부탁하지. 당신들은 발전소 쪽으로 가 줬으면 좋겠는데.”

줄곧 굳어 있던 야곱의 얼굴에 순간 절실함이 내비쳤다. 벌써 30분이 넘게 지났건만, 야나르의 불꽃은 다시 피어오르지 않았다. 대장 몇은 이미 발전소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하죠.”

“…정말 고생을 사서 한다니까.”

페이진이 짐짓 투덜거렸지만, 민호와 카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야나르의 불꽃이 피어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이진 역시 별도리가 없다는 듯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야곱이 부하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종루로 향한다. 가는 길에 웬만한 사건은 그냥 지나쳐라. 흩어져.”

야곱의 마지막 말과 함께 부하들은 제각기 골목길과 지붕 위로 뿔뿔이 흩어졌다.

* * *

“이거… 조금은 재미있는데?”

곡도를 고쳐 든 남자가 히죽 웃으며 자신 앞에 선 형제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둘 다 능력자일 줄이야. 꽤 반가운데.”

시몬과 안드레이는 제각기 근육이 팽팽히 부푼 상태였고, 온몸에 검은 털이 돋아 있었다. 주둥이는 앞으로 툭 튀어나왔으며, 송곳니와 손톱, 발톱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다. 새까만 동공은 두 배로 확대되어 있었다.

짐승처럼 이를 가는 둘의 모습은 영락없는 ‘늑대인간’의 모습이었다.

“크르르르…….”

그러나 침을 질질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의 몸 곳곳에는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늑대 특유의 유연성과 근력으로 몰아붙였음에도 남자는 가볍게 둘의 공격을 피했을 뿐 아니라 반격까지 가해 왔다.

두꺼운 가죽과 근육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형제들이었다.

결국 둘만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몬이 안드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안드레이, 나가서 다른 녀석들을 불러와.”

“…형.”

“우리 둘만으로는 안 된다. 내 바이크, 타라.”

“……알았소, 형님. 금방 올 테니까 그전에 당하면 가만 안 놔둘 거요.”

“오래 못 버티니까 빨리 와.”

이 와중에도 농담처럼 덧붙이는 시몬의 말에 안드레이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다시 인간형으로 돌아온 안드레이는 곧장 몸을 돌려 발전소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도망치는 건가?”

“너의 상대는 나 하나로 충분할 거다.”

시몬이 허리를 쭉 펴며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몸이 짐승으로 변하면서 머리까지 멍청해진 건가? 너 혼자 나를 상대하겠다니…….”

남자가 굳은 얼굴로 몸을 바로 세웠다.

“아니면 나를 얕본 건가?”

그러더니 곧이어 남자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득, 꾸드득.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부플어 오른다.

“서, 설마……!”

발전소 밖으로 내달리던 안드레이가 발걸음을 멈춘 채 깜짝 놀라 뒤쪽을 바라보았다.

곡도를 든 남자의 팔과 몸이 길게 늘어나고 있었다. 황색 털과 함께 검은 반점들이 손과 얼굴에 떠오른다.

그것은 틀림없는 표범의 형상이었다.

변신하기 전부터 형제를 속도로 완전히 압도하던 그이건만, 그조차도 전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드레이가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찰나, 갑자기 시몬이 돌아서더니 곧장 안드레이를 향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혀, 형님?!”

“어딜!”

남자가 던진 곡도가 시몬을 향해 날아 들었다.

“위험해!!”

그 꼴을 본 안드레이가 고함을 내질렀지만, 시몬은 그대로 내달려 안드레이의 가슴을 양손으로 밀어냈다.

“으윽!!”

안드레이는 그대로 힘없이 밀려나 발전소 밖으로 내던져졌고, 그와 동시에 시몬의 어깨에 곡도가 쑤셔 박혔다.

“형님!!”

그러나 시몬은 곡도가 박히는 그 순간에도 뒤를 쳐다보지 않은 채 그대로 발전소 문을 닫아 버렸다.

쾅!

“이게 무슨 짓이오, 형님!”

안드레이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전소 문을 다시 열기 위해 내달렸지만, 어느새 발전소 문은 단단히 잠겨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여시오, 형님! 열란 말이야!!”

안드레이가 문을 마구 두드려 대는 사이, 안에서는 끔찍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아아아아악!! 크와아아!”

“형님!!”

발전소의 문 틈새에 피 냄새가 짙게 풍겨 온다.

한편, 발전소 바깥은 한없이 고요했다.

종루에서 한참을 울려 대던 종소리는 어느새 멈춰 있고, 도시의 소란 역시 잦아든 듯 조용했다.

정신이 든 안드레이는 비치적거리며 일어나 바이크 쪽으로 다가갔다.

어떻게든 형을 구하려면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 지원군을 데려와야만 했다.

그렇게 바이크에 오른 순간, 웬 검은 형체가 안드레이의 앞을 막아섰다.

“무, 무슨……!”

분명 발전소 안에 있던 남자다.

곡도를 든 그가 안드레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안드레이의 반응을 본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낮은 목소리가 복면 뒤로부터 흘러나왔다.

“반응을 보니 내 쌍둥이 동생과 만난 모양이지? 일 처리가 허술해.”

“망할.”

안드레이는 입술을 깨문 채 곡도를 치켜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릉!

바이크의 시동을 건다. 여차하면 바이크를 탄 그대로 놈을 향해 내달릴 참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이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하던 남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채 시선을 뒤로 돌렸다.

뒤쪽에서 세 사람이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피 냄새군.”

“과연…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란 말이지?”

“에취! 큼큼, 근데 이거 뭐야? 무슨 동물 털이 휘날리나? 에취!”

경박하게 연신 기침을 해 대는 페이진과 그런 페이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민호와 카츠미까지, 세 사람의 발걸음이 발전소 앞에서 멈춰 섰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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