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사라진 불꽃 (1)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비상! 비상!! 불꽃이 꺼졌다!!”
지상의 웅장한 종이 통금을 알릴 때 즈음, 지하에서는 경박하기 짝이 없는 종소리가 쉴 틈 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종소리는 충격에 빠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비명 소리, 울음소리에 완전히 묻혀 멀리 뻗어 가지 못했다.
“얼른 불꽃을 되살려! 자경단은 다 어디에 있어?”
“이, 일단 뭐라도 비출 걸 가져와 봐!”
“방독면! 방독면부터 챙겨!”
지하 도시의 불꽃, 야나르가 꺼졌다.
야나르는 그저 불씨 하나 사라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야나르는 단수한 발전소의 역할을 넘어 지하 도시의 생명줄과도 같다. 지하 도시 곳곳에 빛을 제공하며, 온기를 전달하고, 유독가스를 막아 주는 기계장치를 작동시킨다. 덕분에 햇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지하에 도시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장 야나르의 에너지가 없다면 유독가스를 막아 주는 장치가 정지될 것이다. 이어 모든 전력과 온기가 사라져 버릴 터였다.
즉, 야나르가 없다면 지하의 도시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하 도시 주민들은 어둠 속에서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 일제히 혼란에 빠졌고, 한번 꺼져 버린 야나르는 다시 켜질 줄 몰랐다.
일이 터지자마자 곧장 압착진개차에 오른 자경단 대장 안드레이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누볐다.
“다들 집으로 들어가 있어! 뭐든 사방을 비출 물건이랑 방독면을 챙기란 말이야! 거기! 뭘 멍때리고 있는 거야?! 길 안 비켜?!”
안드레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누구 하나 그의 말을 듣는 이가 없었다.
허겁지겁 짐을 싸 들고 나와 피난 갈 준비를 하는 이들, 뭐라도 건질 게 없나 눈을 희번덕거리는 부랑자들, 거리 곳곳을 쥐새끼처럼 내달리며 이것저것 훔치기 바쁜 소매치기 소년들까지.
당장에라도 달아나려는 자들과, 겁먹은 주민들을 등쳐먹으려는 이들이 뒤엉켜 그야말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젠장! 대체 시장님은 이런 때 어딜 간 거지?’
일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시청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루키우스는 없었다.
루키우스의 부재 속에서 자경단의 일곱 대장은 제각기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고, 자경대원들은 조금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정체불명의 능력자들이 길 한복판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낀 참이었다. 당시 루키우스가 능력자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애써 불안감을 가라앉혔건만, 결국 지금과 같은 사달이 나고 말았다.
빵! 빵!
안드레이는 입술을 깨문 채 신경질적으로 차량의 경적을 울려 댔다.
“비켜! 비키란 말이야!”
일단 사라진 불꽃부터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발전소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온 거리를 메운 탓에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창밖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아도 그뿐. 사람들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고생하던 와중에 자경대원 몇이 안드레이의 차량을 보고는 몰려왔다.
“대장님!”
“너희들, 어디 소속이지?”
“토마 대장 밑에 있습니다! 오늘 근무여서…….”
“대체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상황을 진정시켜야 할 거 아냐!”
안드레이가 목소리를 높이자, 자경대원 역시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저희도 한창 통제 중이었습니다만, 다들 도무지 말을 듣지를 않아서…….”
지하 도시 주민들은 이미 어딘가에서 밀려나고, 버림받고, 잊혀진 이들이다. 그런 경험들로 인해 지하 주민들은 사람과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규율과 통제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누가 그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알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 누구도 자신들을 지켜 주지 않으며, 스스로 살길을 찾지 않으면 버려질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안드레이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그런 생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혼란 속에서 가장 생각나는 이는 다름 아닌 시장이었다.
“시장님은 못 봤나?”
“낮에 관저를 나가셨다고는 알고 있는데, 그 뒤로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토마는?! 오늘 근무이면 그 자식이 그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냐?”
“대장님은 야나르를 확인하러 발전소로 가셨습니다.”
하긴 토마 역시 안드레이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이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발전소의 복구였다.
“너희들, 일단 사람들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 들어가서 방독면을 챙기라고…….”
한창 지시를 내리던 안드레이는 순간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땡, 땡, 땡, 땡, 땡!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
“비상! 비상!! 불꽃이 꺼졌다! 발전소가 멈추었어!!”
종루에서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줄곧 귀를 자극하는 그 소리들이 그저 정보 전달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치게 요란한 소리가 문득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어이, 너희들. 저렇게 종을 울리면서 상황을 떠들라는 게 토마 녀석의 지시냐?”
“아뇨. 대장님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발전소로 가셨기에 그런 명령을 내리실 여유는 없었습니다.”
“당직 대장의 지시도 없이 종루에 올라가서 저렇게 지랄 염병을 떠는 새끼가 있다는 거야?”
“그, 그게… 대장님도 저 소리를 듣고 상황을 파악하신 거라서…….”
낡은 종루에 올라선 누군가가 직급 상관인 당직 대장의 명령조차 없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종소리와 요란한 목소리는 그저 상황을 알리는 목적이 아니었다. 요란한 경보음은 주민들의 불안감을 가중해 혼란을 키우고 있을 뿐이다.
일단 의심이 시작되자 갑자기 야나르에 문제가 생긴 경위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토마가 발전소로 향한 지 얼마나 됐지?”
“대략 한 시간 전입니다!”
상황이 벌어지자마자 곧장 발전소로 갔다는 뜻이었다.
발전소에는 늘 가장 많은 병력의 자경대원들이 경비를 선다. 그런 발전소에 문제가 터졌음에도 여태껏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란이 커지기만 하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만약 그저 사고로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면…….’
안드레이는 자경대원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종루로 가 봐. 가서 저 난리를 치는 놈을 당장 붙잡아.”
“네, 알겠습니다!”
자경대원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곧장 종루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역시 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다시금 발전소 쪽으로 향하려 했다.
끼리리릭! 끼릭!
그러나 차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시동 자체가 완전히 꺼져 버렸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당황한 안드레이가 급히 시동을 걸었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엔진 자체가 완전히 멈춰 서 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이봐, 안드레이!”
뒤쪽에서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바이크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채 고물 바이크를 타고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안드레이의 형이자 자경단 일곱 대장 중 한 명인 시몬이었다.
“형님, 그 꼴은 또 뭐요? 그 고물 좀 갖다 버리라니까!”
펑크 라이더들이나 타는 폭탄을 몰고 다니는 시몬의 모습에 안드레이는 급한 상황 속에서도 다짜고짜 화부터 내고 말았다.
“야,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잔소리냐?”
“형님은 어디서 오는 거요? 혹시 시장님이 어디 계신지 봤소?”
“내가 묻고 싶던 거야. 시청에 가 봤더니 아무도 없던데.”
“그럴 줄 알았어. 하여튼 도움이 안 된다니까.”
혹시나 하던 안드레이는 혀를 차며 다시금 시동이 멈춰 버린 차와 씨름을 벌였다.
“야, 안드레이. 그 똥차 딱 봐도 망가진 거 같은데, 엉뚱한 짓 말고 내려.”
“…….”
“발전소 가는 거잖아? 내가 태워 줄 테니까 뒤에 타.”
애써 무시하고 있던 안드레이가 고개를 돌려 불안하게 흔들리는 바이크 차체를 바라보았다.
“날더러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물을 타라고?”
“아예 멈춰 버린 똥차보다는 낫잖아?”
“…….”
“빨리 타. 이거면 5분 이내에 도착할 거다.”
안드레이는 입술을 깨문 채 마지못해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 * *
발전소 내부.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가운데, 묘한 형태의 곡도(曲刀)를 든 남자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 앞에 무릎 꿇은 토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쿨럭! 대체 너희는… 누구냐?”
무릎을 꿇은 토마는 충혈된 눈으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배와 옆구리가 찢겨 피가 흘렀고, 그 외에도 자잘한 자상들이 온몸에 가득했다. 남자는 토마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만, 마치 쥐를 살려 두고 장난치는 고양이처럼 일부러 토마를 죽이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쉿.”
곡도가 한차례 번쩍이며 토마의 팔뚝을 베었다.
“크아아아아악!!”
“질문은 내가 한다. 넌 대답만.”
비명을 내지르는 토마를 바라보며 남자가 냉정히 물었다.
“루키우스는 어디에 있지?”
“크으으윽… 몰라. 모른…다. 죽여…….”
남자는 냉정한 눈으로 몇 차례나 더 곡도를 휘둘렀고, 금세 토마의 온몸은 피로 젖어 버렸다.
“흐…으으…….”
그사이, 토마의 귀에 바깥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불이 꺼졌다! 야나르가 사라졌어!”
야나르가 사라짐과 동시에 상황을 알린 종소리.
종소리와 함께 어느새 거의 쉬어 버린 목소리가 구슬프게 울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비명 소리였다.
눈앞의 괴물과 한패인 누군가가 혼란을 초래하기 위해, 혹은 루키우스를 유인하기 위해 종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토마는 종소리를 듣자마자 발전소로 달려왔고, 허무하게 당해 버렸다. 루키우스가 자리를 비운 가운데 야나르가 사라졌고, 근무자인 자신마저 이 꼴이니, 지하 도시의 혼란은 불 보듯 빤했다.
‘난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나 한심한 거냐. 왜!’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적어도 도시의 혼란을 수습할 수도 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면, 외부의 습격 가능성을 고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토마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몇 시간 전, 능력자들 사이의 전투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만약 자신을 대신해 주민들을 대피시킨 이방인들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도시의 경비를 맡았다면 자신보다는 잘해 냈을 것이다.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어처구니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괴감에 빠진 토마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로 그때, 발전소 바깥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왔군. 루키우스였으면 좋겠다만.”
남자는 곡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토마의 앞에 섰다.
곧이어 공장의 문이 열리며 시몬, 안드레이 형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전소에 들어선 두 사람은 사방에 가득한 시신들과 피투성이가 된 토마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토마!!”
“이게 무슨……!”
곡도를 든 남자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곡도를 빙글 돌렸다.
“이번에도 꽝이군.”
토마는 형제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도망치십시오! 지상으로 가서 시장님께…….”
그러나 토마는 말을 채 끝낼 수 없었다.
곡도의 섬광과 함께 토마의 목이 바닥을 뒹군다. 무수한 양의 피가 분수처럼 튀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토마의 목을 벤 남자는 짧게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상에 있단 말이지? 귀찮게 됐군.”
“토마!!”
시몬과 안드레이는 그 끔찍한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