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남매 (1)
“잔돈 여기 있습니다!”
싹싹해 보이는 점원이 활짝 웃으며 태일에게 동전을 건넸다.
잔돈으로 받은 동전에는 센트럴을 상징한다고 알려진 요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센트럴의 요새는 100여 년 전, 센트럴을 설립한 남매의 작품이라고 했다. 남매는 센트럴이 역사 시대를 끝낸 직후 요새에 칩거했고, 그들이 직접 선발한 철인들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그러나 소문의 진위는 알 길이 없었다. 동전에 새겨진 요새는 그 위치조차 아는 이들이 없으며, 소문 속의 남매 역시 실존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손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점원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동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태일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점원이 건넨 동전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은 태일은 구매한 쿠키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따라오려는 녹스를 억지로 남겨 둔 상황에 아무래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산 물건이었다.
태일이 구매한 쿠키는 알마티의 특산품으로, 알렉세이 딘이 그 무엇보다 좋아하던 디저트였다. 그러니 녹스 역시 좋아할 게 분명했다.
바로 그때, 가게 밖 거리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자자, 통금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들 들어가요!”
LAPD의 제복을 입은 젊은 경관이 도로를 누비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가게 안쪽에서 배불뚝이 점장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빨리 가게 정리해야지! 얼른 마무리 지어!”
“네, 점장님! 금방 끝낼게요.”
목소리를 높여 대답한 점원은 태일을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 전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 통금 시간이 빨라져서……. 손님도 얼른 들어가세요. 만약 시간이 지나서 도로를 누비다가 경찰에 걸리면 벌금을 꽤 많이 내셔야 할 거예요.”
점원은 그렇게 충고한 뒤, 급히 가게 진열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태일은 가만히 거리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곧 해가 저물 것이다.
클라이드와의 약속 시간은 새벽 동이 트기 전이었으니, 약속까지 채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알마티는 동대륙과 서대륙이 교차하는 도시인 만큼 유입되는 이들의 출신지가 다양했다.
서로 다른 피부색과 문화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 일쑤이지만,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치안의 유지야말로 최우선 과제였다.
그런 이유로 알마티의 치안을 담당하는 LAPD에게는 자연스럽게 막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들에게는 전 대륙에서 가장 성능 좋은 무기가 지급되었고, 수사와 기소는 물론, 도시 행정까지도 개입했다.
다른 구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통금’ 역시 알마티 LAPD의 가장 대표적인 권한 중 하나였다.
도시 전체에 친절한 목소리의 방송음이 울려 퍼졌다.
[앞으로 20분 뒤에 도시 문이 잠길 예정입니다. 시민들의 협조 요청드립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가게들의 문이 잠기기 시작했다. 환락가에서는 이제 막 장사가 시작될 시간에 알마티는 모든 영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태일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빠져나와 알마티의 정문이 잠기기 전에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낮에 본 화물차들이 사라진 가운데, 태일은 텅 빈 도로를 하염없이 걸었다.
그 와중에 태일은 고민하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어떻게 딘과 달리 자신의 과거 기억을 갖고 있는 걸까?
클라이드는 어째서 센트럴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클라이드는 자신의 동생에게 닥친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과 걱정이 머릿속을 메웠고, 당장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단 녹스가 머무르고 있는 숲에 들어섰지만,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뭐야, 이건?’
태일은 눈앞에 펼쳐진 기묘한 흔적들에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밑동만 남긴 채 잘린 나무들과 일정한 형태로 잘린 나뭇잎, 균일하게 쪼개진 돌멩이, 그리고 땅 곳곳의 파인 흔적들.
그것은 단순한 파괴의 흔적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숲에 남은 흔적은 알렉세이 딘이 가지고 있던 힘, 제작자의 힘이다.
하지만 어딘가 딘의 힘과는 미세하게 달랐다.
그리고 숲 깊숙이 들어가 비공정이 있던 장소에 다다른 태일은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건 대체?!”
딘은 숙련된 제작자의 힘으로 매우 정교한 발명을 곧잘 해냈지만, 원재료의 속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제작자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들을 결합하고 조합할 수 있을 뿐, 물질 본래의 속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비공정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거대한 오브제는 이미 물질들의 성질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상태였다.
서로 다른 종의 나무 몸체 몇 개가 자연스럽게 합쳐져 밑동을 이루었고, 수십 종류의 꽃과 나뭇잎들이 하나의 몸체에서 돋아난 듯 융합되었다. 돌 조각과 흙은 마치 단단한 나무껍질처럼 표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잘 만들어진 예술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태일이 보기에는 그저 기괴한 키메라일 뿐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정체 모를 키메라를 바라보고 있던 중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돌아오셨습니까?”
“프랑켄.”
“혼자 오신 겁니까?”
“녹스… 녹스는 어디 있지?”
프랑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태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 너머 숲 안쪽을 가리켰다.
“저 안쪽입니다. 비공정은…….”
태일은 프랑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서서 숲 안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좀 괜찮니, 아가?”
막야는 식은땀을 흘리는 녹스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녹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안색이 썩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가만히 숲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발터는 비공정 곳곳을 살피며 연신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흐음, 이건 대체 뭐로 만든 거지? 이 피스톨은… 호오… 그래, 그렇군. 이제 좀 알 거 같아.”
보다 못한 막야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여보, 좀 적당히 좀 해요! 애도 아프고… 주인이 없는데 멋대로 여기저기 뜯어 보는 건 경우가 아니에요.”
“나도 알지만… 흐흠, 흠… 막야, 당신이 이 기체의 엔진부를 보면 아마 어지간히 놀랄 거요. 이 기체에 반영된 기술은 화약 병기의 구조와…….”
“발터!”
결국 막야가 단단히 화난 얼굴로 남편을 다그치자, 발터는 마지못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때, 여전히 시선을 숲 쪽으로 두고 있던 녹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봐도 괜찮아.”
“아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딘 박사님이 만드신 건데…….”
“내가 만든 거야.”
“…뭐?”
“내가 7년 전에 딘을 도와 함께 만든 거라고. 거의 대부분은 내가 직접 조립했어.”
“얘가 무슨 소리를…….”
녹스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10대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소녀가 7년 전 비공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막야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발터는 은근슬쩍 뒤돌아서서 다시 엔진실 쪽으로 향했다.
막야가 그런 남편을 보며 다시 타박하려는 찰나, 갑자기 녹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왔어!”
“응?”
녹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짜고짜 어디론가 내달렸다.
과연 녹스가 달려 나간 방향을 보니, 이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 저 청년……!”
민호와 함께 온 태일이었다. 태일의 뒤로는 프랑켄이 황급히 따라오고 있었다.
녹스는 줄곧 태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일은 녹스가 차지한 몸의 원래 주인인 ‘보니 바토리’를 알고 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저 인간이 되기에 급급해 그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보니의 기억들이 흘러 들어오면서 이해하기 힘든 능력까지 발현하자 태일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태일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한편, 태일 역시 무언가 급한 용무가 있는 듯 녹스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사람이 마주선 가운데 먼저 입을 연 쪽은 녹스였다.
“보니에 대해 설명이 필요해. 지금 당장.”
태일은 녹스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보니의 기억이 내게 흘러 들어왔어. 그리고 어쩌면… 그 아이의 능력도.”
“그럼 비공정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 놓은 건 네가 한 건가?”
녹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일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보니에 대해서 잘 몰라. 내가 처음 보았을 때는 이미 캡슐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상태였어.”
하긴 보니의 기억 속에 태일의 모습은 없었다.
기억 대부분은 실험실의 장면이었고, 거기에 동반되는 감정은 그저 끔찍한 고통과 공포일 뿐이었다.
그러나 녹스가 알고 싶은, 아니, 찾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클라이드 바토리. 내 오빠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너’의 오빠라고?”
“기억을 통해 나를 구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어.”
다시금 녹스가 본인을 보니와 동일시하자, 태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넌 녹스가 아니었던가?”
“그래, 난 녹스지. 하지만 보니의 기억들을 보고 느꼈어. 그 기억에서 느낀 모든 종류의 경험은 분명 내 것이었어.”
보니의 몸에 각인된 공포와 두려움은 그녀의 기억과 함께 녹스에게 그대로 전해 왔고, 결국 몇 번이나 폭주를 경험해야 했다. 그사이, 주변을 몇 번이나 초토화시키며 영문 모를 능력으로 기괴한 키메라를 만들기까지 했다.
결국 그렇게 끔찍한 고통을 경험한 녹스는 보니의 존재와 정체성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난… 녹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니야.”
“궤변이군.”
태일의 면박에 녹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당신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정의 내렸으니까.”
녹스의 그 말과 성품은 분명 딘의 것이었다. 딘 역시 ‘지식’이라는 나름의 정의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녹스는 지금 결코 딘이 지을 리 없는 표정으로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아픈 듯 연신 식은땀을 쏟아 내고 있으며, 심지어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클라이드 바토리에 대해서… 당신은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태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대답했다.
“앞으로 약 여섯 시간 뒤, 클라이드와 만나기로 했어. 보니를 데리고.”
“뭐라고?!”
태일의 말에 녹스는 물론, 뒤에서 듣고 있던 프랑켄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갈지, 아니면 여기 남아 있을지 네가 선택해.”
“갑자기 그게 무슨……!”
녹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참고로 클라이드는 나의 적이야. 다시 만나게 되면 높은 확률로 놈과 나, 둘 중 한 명은 죽게 될 거다.”
“태일 씨!”
프랑켄이 깜짝 놀란 듯 태일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켄 역시 녹스에게 흘러 들어온 기억들에 대해 대강 전해 들었기에 클라이드라는 이름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녹스는 클라이드의 이름을 부를 때면 어딘지 쓸쓸한 표정을 짓곤 했으며, 마치 친오빠를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클라이드를 태일은 ‘적’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태일은 프랑켄 쪽으로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녹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녹스는 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적…이라고? 오빠와 당신이?”
태일은 그 와중에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고는 시간을 확인하며 담담히 말했다.
“대략 다섯 시간이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결정은 네가 내려, 녹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