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07화 (108/220)

107화 알마티의 패륜아 (3)

태일은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온 이후 줄곧 장 베르코프를 관찰하고 있었다.

교활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검붉은 머리칼의 장은 젊었을 적 분명 꽤 매력적인 소년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전, 패륜아 장 베르코프가 한때 미남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이쪽 세계에서 센트럴 오더가 발령되지 않은 덕분에 약 18년가량을 더 살아남은 그의 모습은 병약하고 음험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듯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초조한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항하라고요? 지금 저더러 센트럴에 맞서란 말입니까?”

반면, 제인은 50구역에 있을 적의 순진한 변호사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센트럴을 적으로 돌리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무모한 명령을 발동시킬 경우, 그만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신호만 주면 충분해요.”

“…블러핑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맞아요.”

확신에 찬 제인의 말을 듣던 장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블러핑도 감춰진 패가 있을 때에나 사용 가능한 겁니다, 제인 양. 저는 군인이나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사업가예요. 대체 제가 무슨 수로 경찰과 군대를 보유한 센트럴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온 게다.”

루키우스가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센트럴 놈들이 지하까지 기어 내려와 나를 찾아왔다. 지하 주민들을 징집하고, 발전소의 에너지 공급권까지 빼앗아 가겠다더군.”

“그런 터무니없는!”

센트럴에서 지하 도시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에 놀란 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연하게도 난 그런 명령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지하 주민들도 마찬가지이고.”

“설마 그 패배자들을 데리고 센트럴과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에요? 놈들이 눈 하나라도 깜짝할 거 같습니까?”

“장, 매년 지상에서 지하로 쫓겨 내려오는 주민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

“나처럼 추방된 이들 외에도 빚 때문에 제 발로 지하에 들어온 이들이 매년 수천에 달한다.”

이미 지하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살아가고, 그렇기에 알마티의 지하 쓰레기장은 어느새 ‘지하 도시’라 불리고 있었다.

“지하 도시에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일 테니, 우리 캐피탈 클럽이 협조하라는 뜻입니까?”

“그래. 적어도 LAPD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의 물자만 조달해 주면 충분하다.”

“…….”

톡.

장이 손톱 끝으로 회의석상을 두드리며 제인과 루키우스의 말을 곱씹었다.

제인은 그런 장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센트럴 의회 의원 전부가 센트럴 오더의 발동에 찬성하는 건 아니에요.”

톡.

“평화당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작 그들의 세력으로는…….”

톡.

“아뇨. 청년당 역시 이번 표결에서 대부분 반대표를 던졌어요.”

제인의 말에 장의 손가락이 멈춰 섰다.

“지금… 청년당이라고 하셨습니까?”

센트럴 상원은 전통을 고수하며 센트럴 특유의 엄숙주의를 관철하는 보수당이 다수당을 이루었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청년당과 종교인 위주의 평화당이 소수 의석을 가졌다. 그 와중에 청년당은 그저 구색만 갖추고 있을 뿐, 보수당의 하위 조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당 의원들은 대부분은 보수당 의원들의 자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년 시절 소수당에서 정치를 경험하다가 이후 경륜을 쌓아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겨 가는 것이다. 즉, 청년당과 보수당의 의원들은 혈연으로 얽혀 있었다.

보수당은 청년당과 연정을 이루어 수십 년 동안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고, 결국 의회의 모든 결정은 보수당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청년당 의원들이 센트럴 오더에 대해 강한 반대의 뜻을 드러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렇게 놀라는 게냐?”

루키우스의 날선 말에 장은 순간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긴 자신 역시 아버지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배후에는 캐피탈 클럽이 있어요. 아니, 사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캐피탈 클럽이었죠.”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캐피탈 클럽이 어째서…….”

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 역시 캐피탈 클럽의 알마티 지부장이지만,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에게까지는 거의 소식이 닿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장은 알마티 내부의 아귀다툼에 온 정신을 쏟은 나머지 외부의 일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캐피탈 클럽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보수당에 대한 자금 지원을 꾸준히 줄였어요. 대신 청년당에 정치자금을 쏟아부었죠.”

“하아…….”

장은 이마를 감싸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자본가들은 센트럴의 등장 이후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캐피탈 클럽을 만들었고, 센트럴 의회는 자본가들의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캐피탈 클럽을 통해 엄청난 액수의 정치자금을 조달했다.

장 역시 관성적으로 캐피탈 클럽에 매월 제법 큰 규모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만, 정작 로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것이다.

“캐피탈 클럽은 늘 전통을 들먹이며 권위적인 보수당을 불편하게 여겼어요. 특히 몇 년 사이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그런 현상이 심화되었죠.”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보수당의 자제들은 꽉 막힌 부모님보다 캐피탈의 젊은 부자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함께 환락가를 찾아 일탈을 즐기고,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리면서 답답할 뿐인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당의 꾸준한 견제와 터무니없는 요구에 지쳐 있던 캐피탈 클럽은 청년당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청년당은 곧 보수당의 위성 정당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정치 동맹의 탄생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 집권해 오면서 강력한 권력 의지로 똘똘 뭉쳐 있던 보수당 의원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결국 센트럴 오더라는 게… 보수당의 반격이라는 겁니까?”

“맞아요. 하지만 보수당 역시 청년당과 센트럴 클럽의 저력을 과소평가했죠.”

보수당은 캐피탈 클럽의 정치 세력화를 경계했고, ‘센트럴 오더’라는 구법을 이용해 캐피탈 클럽을 길들이려 했다. 그러나 정작 보수당 의원들을 막아선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청년당에서 캐피탈 클럽을 대변해 거세게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보수당 의원들은 청년당의 목소리를 한낱 아이들의 어리광 정도라 여겼지만, 의회에서 결집한 청년당의 목소리는 결코 얕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구나 캐피탈 클럽의 자금이 투입되면서 보수당의 중도파 의원들이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처럼 의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보수당의 극단주의자들은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청년당 의원 다섯이 암살당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보수당 의원 한 명이 암살당했어요.”

냉혹한 권력 앞에서 혈연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보수당과 청년당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센트럴 정계는 그야말로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보수당은 내부적으로 캐피탈 클럽을 ‘적’이라 규정했고,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하면서 센트럴 오더를 밀어붙였다.

“보수당은 뜻하는 바를 이루었지만, 대신 많은 것을 잃었어요. 센트럴 오더가 통과된 직후, 자식을 잃은 보수당 의원들과 중도파 의원들이 탈당했고, 반대로 청년당은 더 강하게 결집했죠.”

자식은 부모의 살점을 뜯어먹어서라도 살아가지만, 부모는 결코 자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일련의 서사는 루키우스와 장에게 매우 익숙했다.

“며칠 전, 청년당에서 센트럴 오더의 무효화와 완전 폐지를 의안으로 내놓았어요. 그리고 지금 청년당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에요.”

장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캐피탈 클럽에서 이번 조치에서 침묵한 건 우리가 들고일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군요.”

― 총대를 메라.

캐피탈 클럽은 알마티 지부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그편이 나은지도 모른다.

캐피탈 클럽은 보수당에 맞서기 위해 알마티 지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잠시 뒤, 장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차가운 눈으로 제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인, 당신은… 브레드필드 가문의 뜻을 대변하러 이 자리에 온 게 아니군요.”

코르지 브레드필드, 지금 장의 눈앞에 앉아 있는 제인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보수당의 당주다. 그런 남자의 딸이 자신에게 보수당에 대한 저항을 제안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의 제안입니까?”

장은 지금 제인의 제안이 결코 그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코르지 브레드필드라는 거물급의 영애라 해도 제인 본인은 그저 50구역 환락가에서 뜨내기 변호사 생활을 하던 여자에 불과하다. 그런 제인의 말에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당신 뒤에 누가 있는 겁니까?”

“정보를 얻기 위해 한 친구의 도움을 받기는 했죠.”

“…….”

“카렌 탈로스. 그녀가 우리를 돕고 있어요.”

예상치 못한 이름을 전해 들은 장의 입이 헤, 벌어졌다.

* * *

“어쩌자고 카렌의 이름을 꺼낸 거야?”

장과의 협상을 마치고 Z―rail 본사에서 빠져나온 직후, 레이는 제인의 팔을 붙잡고 참았던 말을 쏟아 냈다.

“애당초 카렌의 제안이 아니잖아! 이번 계획은 순전히 네가…….”

“저런 종류의 인간들은 이름값에 쉽게 흔들리거든. 다루기 쉬운 종류야. 신뢰할 만한 이름이 나오니까 곧바로 미끼를 물잖아. 안 그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모해!”

태일은 스스럼없이 떠드는 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둘이 어느새 그렇게 친해진 거지?”

과거, 구금 당시 만난 레이는 제인을 꼬박꼬박 ‘아가씨’라 부르며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대했다. 제인 역시 그런 레이를 경계했다. 그러나 지금의 레이와 제인은 그야말로 허물없는 친구 사이처럼 보였다.

하긴 암흑가의 변호사와 환락가의 변호사,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친해진 게 아니라 이 여자를 지키라는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여자?!”

‘아가씨’에서 ‘여자’로 격하된 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지만, 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을 내뱉었다.

“차라리 히트맨이나 용병단을 상대하는 게 낫지.”

레이는 제인의 무모한 태도에 기가 질린 듯 보였지만, 태일에게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익숙했다.

아니, 마피아들 사이의 전쟁을 막겠다면서 중재 운운하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카렌과는 잘 아는 사이인가?”

“네. 몇 없는 친구 중 하나예요. 그러고 보니 50구역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혹시 만나 봤어요? 태일 씨가 찾던 사람과 꽤 닮지 않았던가요?”

“…….”

실제로 카렌은 세연과 꼭 닮았기에 처음 보았을 때 오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쪽 세계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은 지금, 태일은 카렌을 세연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길 수 없었다.

“난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겠네. LAPD 놈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말이야.”

스카이라운지의 협상이 끝난 직후, 줄곧 침묵하고 있던 루키우스가 피로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희도 함께 갈게요. 앞으로의 일도 논의해야 하니까요.”

“그러든지.”

그러나 태일은 걸음을 멈춘 채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어디 갈 곳이라도 있나? 두고 온 세 젊은이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 들를 곳이 있습니다.”

클라이드와의 약속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 녹스를 만나야 했다.

“내일쯤 지하에 내려가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렇게 방향을 달리 잡으려는 찰나, 루키우스가 태일을 붙잡았다.

“자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루키우스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줄곧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자네는 센트럴과 진심으로 저항할 생각인 거 같네만,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제인은 센트럴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센트럴 오더를 막기 위한 블러핑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태일의 태도가 그런 제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태일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루키우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저항의 신호만으로 센트럴 오더를 철회시킬 수 있다면, 싸울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태일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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