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06화 (107/220)

106화 알마티의 패륜아 (2)

“아버지가… 왔단 말이지?”

장은 조용히 되뇌며 텅 빈 스카이라운지를 둘러보았다.

Z―rail의 회장이자 알마티 지부장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간.

스카이라운지에 선 채 알마티 전체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멋져 보였던가.

그런 아버지를 보아 온 장 베르코프는 그 누구보다 이 공간을 바랐다. 아버지처럼 스카이라운지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며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장의 위로 두 명의 형이 있었고, 장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장은 결코 스카이라운지를, 아버지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회장님…….”

“만나 봐야겠지. 그래, 아버지라면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2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다.

그것도 장이 가장 위급한 이 순간에.

브레드필드라는 이름을 듣고 당장 내려가 맞으려 했던 장은 다시금 스카이라운지의 회의석상으로 걸어가 상석에 앉았다.

“손님들을 이곳으로 모시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비서가 스카이라운지를 나간 뒤, 다시 혼자 남게 된 장은 회의석상을 둘러보았다.

‘아버지라…….’

20년 전, 자신이 앉은 자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오른쪽에는 첫째 형이 자리했고, 왼쪽에는 둘째 형이 앉았다. 막내인 장은 때로 첫째 형의 옆에, 또 때로는 둘째 형의 옆에 앉아 두 사람의 후계자 다툼을 방관했다.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던 두 사람에게 장은 그저 귀여운 동생에 불과했고, 그런 두 사람의 착각이 장에게는 ‘기회’였다.

첫째 형은 바로 이곳, 스카이라운지에서 독살당했다.

살인 누명을 쓴 채 지하로 쫓겨난 둘째 형은 히트맨의 저격으로 인해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두 형에게는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그저 두 사람 모두 운이 없게도 괴물을 동생으로 두었을 뿐이다.

장은 그렇게 두 형을 치워 버리고 기회를 만들었다. 두 형이 사라진 이상 스카이라운지는 응당 장의 것이 되어야 했다. 유일하게 남은 베르코프 가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루키우스가 뒤늦게 장이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두 아들이 막내에게 잡아먹혔다는 사실을 눈치챈 루키우스는 장을 불러들였다.

“전부 너의 짓이냐? 정말 네가 네 형들을 죽인 거야?”

“전 기회를 살렸을 뿐이에요, 아버지.”

장은 당시 자신을 바라보던 루키우스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에 담긴 감정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장의 실체를 알게 된 루키우스는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려 했다. 장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모든 권리를 빼앗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장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아버지를 몰아내는 일은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간단했다.

루키우스는 센트럴의 통치 체제와 사상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개인 변호사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장은 그저 도청한 루키우스와 변호사의 대화를 센트럴에 전달하기만 하면 됐다.

첩보를 얻은 센트럴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LAPD가 장을 도왔고, 아버지는 센트럴 보안법에 따라 체포되었다.

알마티 최고의 부자이던 루키우스는 그렇게 죄수의 신분이 되었고, 재판이 벌어졌다.

루키우스는 알마티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늘 존경받던 남자였지만, 정작 재판장에 선 그를 변호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루키우스의 불손한 언행을 듣고도 신고하지 않은 변호사의 목이 일찌감치 교수대에 매달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변호사 없이 진행된 재판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죄인 루키우스에게 영구 추방을 선고한다. 현 시간부로 루키우스의 시민권은 박탈되며, 알마티 지상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불쌍한 변호사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동안 알마티에 큰 공헌을 한 루키우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신 루키우스는 누명을 쓴 둘째 아들처럼 지하에 내던져졌다.

재판의 결과를 지켜본 장은 다시금 히트맨을 고용해 루키우스까지 끝장낼까 고민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한때 자신이 동경하던 대상이며, Z―rail을 건립해 성장시킨 창립자다. 그런 남자를 죽인다는 것은 장에게도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장은 결국 스카이라운지를, 회장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메타휴먼을 발매한 ‘드림코퍼레이션’이 급성장했고, 경쟁에 밀린 Z―rail은 점차 도태되었다.

전 대륙으로 뻗어 나간 탈로스 가문과 달리, 장은 그저 알마티라는 작은 도시에 묶여 낡아빠진 철도만을 관리하는 신세였다. 그리고 이젠 그조차도 잃기 직전에 있었다.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비서의 안내에 따라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인 브레드필드, 암흑가의 변호사로 소문난 레이, 그리고 아버지 루키우스 베르코프.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인 님. 그리고… 아버지.”

장은 레이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상석을 양보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자신의 양옆으로, 첫째 형과 둘째 형이 앉은 바로 그 자리로 안내했다.

장을 바라보는 루키우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본래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그 누구보다 뛰어난 남자였다. 가끔 화가 난 척하고, 웃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정작 정말 깊은 감정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숨겼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장 베르코프 씨. 제인 브레드필드라고 합니다.”

제인이 짧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반면, 루키우스를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코르지 님을 항상 존경해 오던 입장에서 그 따님을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접촉한 적은 있었죠, 아마?”

제인은 감금되었던 기억이 떠오른 듯 차가운 눈으로 장을 바라보았다.

당시 장에게 코르지의 ‘부탁’을 전달한 남자가 바로 변호사 레이다. 그런 레이가 제인의 곁에 붙어 있는 걸 보니, 한편으로 우습기도 했다.

장은 태연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드리지요.”

“이미 지난 일이에요. 중요한 건… 미래죠.”

제인이 슬쩍 루키우스를 곁눈질하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과연 현명한 말씀입니다.”

장은 제인의 말에 곧장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렇게 지상에 나온 걸 알면 LAPD에서 썩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내가 데려온 손님인데, 문제가 될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농담일 뿐입니다.”

루키우스에게 면박을 주던 장은 제인의 차가운 한마디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루키우스는 그런 아들을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는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구나.”

“…….”

퀭한 눈에 비쩍 마른 몸.

장은 원하던 자리를 손에 넣었지만, 단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스카이라운지를 차지하게 되자,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모든 이들은 장을 위협하는 적처럼 보였다. 자신이 그랬듯, 다른 누군가가 스카이라운지를 노리고 기어 올라올 것처럼 느껴졌다.

부하 중 누구 하나 믿을 자가 없었고, 캐피탈 클럽 회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센트럴은 장에게 온갖 요구를 하며 제멋대로 쥐고 흔들려 했다. LAPD는 장의 말을 듣지 않았고, 캐피탈 클럽 회원들 역시 장을 무시했다.

결국 센트럴이 알마티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하는 지금, 장은 비로소 자신이 손에 넣은 것들이 공허하기 짝이 없는 빈 껍데기였음을 깨달았다.

“저희가 여기에 찾아온 것은 센트럴 오더 때문이에요.”

제인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본론을 꺼냈다.

“센트럴 오더의 발동을 앞두고 알마티에 센트럴의 명령이 전달되었을 거예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마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겠죠.”

“정확히는 모든 생산 시설의 권한 양도를 명령하더군요. 거기에 자금줄까지 완전히 묶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죠?”

“다른 이들은 전부 내놓자고 하더군요. 납작 엎드리자고… 그러더군요.”

“흥.”

별 존재감 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정체불명의 사내가 들으란 듯 코웃음 치자, 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그쪽은?”

“그저 경호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순간, 장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암흑가에서 잔뼈가 굵은 레이조차도 자신의 주제를 알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고작 경호원이 자신의 말에 코웃음을 친단 말인가.

장의 얼어붙은 표정을 본 제인이 무례하게 군 남자를 흘겨보며 장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 경호원이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장은 애써 화를 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한심한 게 사실이죠. 사업가라는 자들이 제 재산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사실 장 또한 회의 자리에서 나온 말들을 떠올리면 속이 매슥거릴 지경이었다.

캐피탈 클럽 알마티 지부 회원들은 물론, Z―rail의 직원들까지도 캐피탈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저 협상이나 설득을 통해 조금이나마 대가를 받으려 할 뿐이었다.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죠? 순순히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

장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알마티 외의 지역에 본사나 자회사를 둔 이들과 자금을 분산해 둔 자본가들은 이번 사태에서도 모든 걸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코프 가의 Z―rail은 달랐다.

Z―rail의 본사는 알마티에 있고, 철도 운영권은 Z―rail의 전부였다. 동서 대륙을 연결하는 철도를 센트럴에게 넘긴다는 건, 곧 Z―rail의 국유화를 의미한다. 센트럴이 한번 집어삼킨 철도를 다시 돌려줄 리 없었다.

결국 알마티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이는 다름 아닌 장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아버지와 형제를 몰아낸 장이라 해도 센트럴을 상대로는 방법이 없었다.

“센트럴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센트럴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장은 모든 재산을 압수당한 뒤, 죄수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자신 역시 아버지를 그렇게 몰아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인 님께서 아버님과 의원님들을 설득해서 명령을 철회해 주시기만 한다면…….”

“저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어요. 아버지는 물론, 보수당 의원들도 설득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죠.”

유일하게 기대했던 마지막 방안이 허무하게 거절당하자 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인은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는 장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센트럴 오더가 발동할 때까지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어요.”

“이미 의회를 통과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발동 전까지는 막을 기회가 남아 있어요.”

장은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만약 회사를 지킬 수만 있다면, 센트럴 오더를 막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제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인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내놓았다.

“센트럴에 저항하세요.”

“…뭐라고요?!”

장은 깜짝 놀란 나머지 발을 구르다가 회의석상의 대리석에 발을 찧고 말았다.

“크윽!”

당혹감과 고통에 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인의 경호원은 그런 장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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