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05화 (106/220)

105화 알마티의 패륜아 (1)

가까이는 드넓은 정원, 멀리는 알마티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다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석상 위에는 고급스러운 식기들이 진열된 가운데, 서민들은 평생 한 모금 맛보기조차 힘든 와인이 잔마다 채워져 있었다.

장 베르코프는 늘어선 스카이라운지 회의석상의 가장 끝, 상석에 앉은 채 자리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알마티 내 크고 작은 기업들의 경영인과 길드 연합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처럼 캐피탈 클럽 알마티 지부의 회원들이 모두 모이는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모두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기쁩니다.”

“건강한 사람들만 이 자리에 모인 거 아니겠소? 허허허.”

점잖은 척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던 알마티 은행장 게일이 뼈있는 농담을 던지며 장의 속을 긁었다.

장의 얼굴이 굳자, 길드 협회장 루퍼스가 애써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자자, 오랜만에 모였으니 기쁜 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오랜만이긴 하지요. 어디 보자… 전대 지부장님 때가 마지막이니까, 한 20년 만인가?”

게일이 짐짓 고민하는 척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루퍼스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일이지요, 지금부터가. 하핫!”

전대 지부장이던 루키우스 베르코프 시절에는 정기적으로 모임이 열리곤 했지만, 장 베르코프가 그 자리에 앉은 뒤로는 단 한 번도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그사이, 몇 개의 기업들이 무너지고, 셀 수 없이 많은 길드들이 문을 닫았다. 한때 경영자였던 늙은이들과 길드의 노쇠한 장인들은 지하 도시로 밀려났고, 각 조직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당연하게도 살아남은 회원들 사이에 유대감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흥, 인사치레는 됐소이다. 그럴 여유도 없으니.”

대륙 서부의 통신망을 지배하고 있는 벨로 사의 사장 마틴이 불독처럼 심술 맞게 튀어나온 턱살을 흔들거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장은 불쾌감을 털어내기 위해 와인 한 모금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다들 센트럴에서 전해 온 소식은 들으셨을 테지요.”

센트럴 오더의 의회 통과.

공식적인 발동은 앞으로 한 달 뒤이지만, 이미 그 소식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고작 그런 얘길 하자고 부른 거요? 의회에서 헛발질하는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래도 의원들이 단체로 돌아 버린 모양이더군.”

“실제로 몇 명은 머리에 총구멍이 났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흥, 수십 년 전의 구법이나 꺼내 들다니. 케케묵은 법전이나 매만지고 있으니 그들이 정치인인 게지요.”

장은 마치 남 얘기하듯 태연하게 지껄이는 회원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장의 눈에 피둥피둥 살이 붙은 채 위기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회원들은 하나같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돼지들로 보일 뿐이었다.

선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경영자들은 정치의 무서움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정치자금으로 정치인들을 구워삶았다고 여겼으며, 온갖 규제에 목매다는 정부를 두고 어리석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애당초 경영자들이 제 몸집을 불려 온 것은 어디까지나 센트럴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십니까?”

“빤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기를 공급하라 하겠지요. 군수산업에 발을 걸칠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테지요.”

“우리 제약사는 이번 기회에 아예 전문 자회사를 만들어 성능 좋은 군용 약품을 공급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만약 여기 계신 분들께서 투자에 생각이 있다면…….”

선대의 집요함과 잔혹함을 물려받지 못한 2세들은 센트럴이 던져 준 사료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자신들은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지만, 정작 그 기회라는 것 자체가 센트럴의 사료에 불과했다.

이제 도축업자가 자신의 멱을 따러 오고 있건만, 그 위험성을 눈치채지 못한 채 꿀꿀거리는 것이다.

장은 회의석상을 두드리며 시선을 모았다.

“다들 주목해 주시오.”

한창 전시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던 회원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장을 바라보았다.

장은 비서에게 손짓해 센트럴에서 온 공문을 전해 받은 뒤, 모두 앞에 내보였다.

“지금 여러분 눈앞에 있는 이 문서는 센트럴 정부에서 내려온 명령이오.”

공문의 가장 밑에는 센트럴 수상의 직인이 찍혀 있다.

“알마티 내 모든 생산 시설에 대한 권리 양도를 지시하는 공문이오. 앞으로 알마티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의 공급량과 공급처, 가격까지 전부 센트럴에서 통제한다는군. 당연히 은행의 예금도 전부 묶이게 될 거요.”

순간, 회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지금 뭐라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뭘 내놓으라고?”

곧이어 웅성거림은 분노에 찬 고성으로 변했다.

“이보시오, 지부장! 농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모든 걸 빼앗겠다고?!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회원들은 마치 장이 그런 명령을 내린 걸로 생각한 듯 손가락질하며 폭언을 내뱉었다.

“다들 진정하시지요.”

“그런 헛소리를 듣고 대체 어떻게 진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점잔을 빼던 게일마저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설마 지부장님은 그 허무맹랑한 지시가 정말 센트럴에서 내려왔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 그건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캐피탈 클럽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루퍼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지금껏 한 말들이 모두 장난일 뿐이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에게는 그 정도의 유머 감각이 없었다. 센트럴의 명령은 눈앞의 현실이고, 곧 LAPD들이 정부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일 터였다.

“캐, 캐피탈 클럽! 다른 지부에서 이 부당한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어요! 분명 이번 일에 대해서 항의를 할 거요.”

누군가 지켜 줄 것이다.

누군가 대신 싸워 줄 것이다.

나만큼은 안전하다.

그런 착각에 젖은 이들은 여전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중앙 지부에 이 일을 보고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도 없소.”

“뭣이?! 답변이 없어?”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요?”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와중에 마틴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부장, 그 명령…….”

벨로 사의 마틴은 그나마 이 자리에서 가장 머리 회전이 빠르고, 경험이 풍부한 경영인이었다. 통신사를 쥔 만큼 모든 종류의 소식에 귀가 열려 있고, 다른 애송이들에 비해 상황 판단이 빨랐다. 실제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고령이었다.

“설마… 이곳 알마티에만 하달된 건가?”

“맞습니다.”

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세 개 구역에 전달되었지요.”

정부에서 모든 시설물과 자산을 동결시킨 구역은 단 세 곳, 48구역, 49구역, 50구역이었다. 그러나 49구역은 사실상 버려진 땅과 다름없고, 50구역은 테러와 봉쇄로 인해 경제가 정지된 상태이니, 사실상 직격탄을 맞은 지역은 48구역, 알마티뿐이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캐피탈 클럽은 우리를 버렸어요. 그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멍청한! 지부 하나를 통째로 포기한다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 그 멍청이들은 정말 모르는 건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센트럴은 캐피탈 클럽과 알마티를 두고 거래를 했을 것이다. 알마티 한 곳에 대한 비상조치만 눈감으면, 캐피탈 클럽의 다른 자산은 손대지 않겠노라고 약속했을 것이다.

회원들이 피둥피둥 살찐 돼지로 메워진 건 비단 알마티 지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다른 지부의 돼지들은 기꺼이 센트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마티의 자산가들이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잃는다면, 센트럴 오더가 끝난 뒤 자신들이 알마티에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 역시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차례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 빈자리를 노릴 뿐이다.

“이제 어찌 되는 겁니까? 그 황당한 명령을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겁니까?”

“아마 LAPD에도 명령장이 도착했을 거요. 곧 강제집행에 나서겠지.”

“그럴 수가!”

알마티는 하루아침에 버려졌다.

도축업자들의 칼은 어느새 돼지의 목을 똑바로 노리고 있었다. 돼지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깨닫는다.

“이제 남은 건 우리의 선택이오. 센트럴의 명령에 따를지, 아니면…….”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회의를 연 지부장, 장 베르코프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항할지.”

* * *

20년 만에 열린 회의는 무려 여덟 시간을 넘게 이어졌다. 그러고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게일은 차용증을 써 주는 방식으로 증서라도 받아 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퍼스는 일단 센트럴과 협상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더듬더듬 말했으며, 마틴은 당장 LAPD를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마다의 온갖 주장을 쏟아 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없었다.

제아무리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한들 대륙 전체에서 보면 하잘것없는 수준이고, 제아무리 히트맨이나 용병과 연줄이 있다 한들 LAPD나 센트럴 정규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결국 회의의 주제는 상황에 대한 타개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센트럴에게 충분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로 흘렀다.

그러나 장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센트럴 오더는 기존에 통용되던 경제 원리와 신뢰 관계 따위 전부 무시하겠다는 선언이고, 오로지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결의였다. 그런 상황에 모인 경영자들의 대안은 전부 무용한 것이었다.

협상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손쉽게 빼앗을 수 있는데, 돈 한 푼 내지 않고 그냥 압류할 수 있는데, 굳이 차용증을 쓰거나 비용을 지불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미 타 지역 캐피탈 클럽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낸 센트럴의 입장에서 알마티 지부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무의미한 말이 오간 회의가 끝난 뒤, 텅 빈 스카이라운지에 홀로 남은 장은 해가 지기 시작한 알마티의 경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짓밟았던가.

그렇게 평생을 바쳐 손에 넣은 것들이, 일궈 온 것들이 고작 종이 한 장으로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장이 입술을 깨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중이었다.

끼이익.

“회장님.”

스카이라운지 문이 열리며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날 생각이…….”

“코르지 브레드필드 님의 영애이십니다.”

“뭐라고?”

장이 놀란 얼굴로 뒤돌아서서 비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서는 어째서인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외에 세 분이 함께 오셨는데…….”

“안으로 모셔.”

장은 비서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지시를 내렸다.

모든 것을 잃기 직전, 장에게는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니, 내가 내려가지.”

“회장님.”

비서가 서두르는 장을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함께 온 세 분 중… 전대 회장님이 계십니다.”

그 순간, 장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마치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비서를 바라보았다.

“지금, 누가 왔다고 했지?”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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