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04화 (105/220)

104화 나비효과

‘나비효과’.

나비의 단순한 날갯짓은 멀리 떨어진 도시에 태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어쩌면 태일이 본 두 개의 세계는 나비효과의 결과물인지도 몰랐다.

18년 전, 두 세계 중 한쪽에서만 센트럴 오더가 발동되었다. 그리고 18년 뒤, 두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태일이 혁명군을 이끌던 당시, 마피아는 모조리 사라진 지 오래고, 알마티 지하 도시 또한 완벽히 파괴된 상태였다. 50구역 레지스탕스의 대장이던 하얀 늑대와 루키우스 베르코프는 일찌감치 목숨을 잃었고, 50구역 LAPD는 와해되었다. 센트럴의 의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쪽 세계에서 마피아는 물론, 지하 도시와 의회 역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키우스 베르코프가 살아 있고, 하얀 늑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가 바뀌자 기술 수준을 비롯해 사람과 조직, 도시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쪽 세계에서는 낡디낡은 열차가 여전히 50구역까지 오가고 있으며, 구식 무기가 사용되고 있다.

50구역에서는 여전히 마피아들이 뒷골목을 지배하며, LAPD와 레지스탕스가 존재한다.

48구역 알마티의 지하 도시는 루키우스에 의해 존속되고 있다.

‘메타휴먼’이나 ‘로보티안’ 같은 존재가 만들어지고,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어디 한번 들어 보도록 하지. 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태일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루키우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시청’이라 불리는 루키우스의 거처.

루키우스는 부하들을 모두 내보낸 뒤, 태일 일행과 직접 대면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태일에게 온 관심을 두고 있었다.

“우리도 궁금한데. 대체 당신은 뭐지?”

함께 시청에 들어온 민호, 카츠미, 페이진 역시 태일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지금껏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것처럼 행동했어. 때로는 아주 간단한 상식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카츠미가 슬쩍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곤 했지.”

소울벌룬의 위험성, 터무니없는 오버테크놀로지의 기원, 심지어 48구역 시장의 정체까지.

태일은 이미 온갖 사건에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이미 몇 차례 바꾸어 버렸다. 태일의 정체에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들 앞에서 말한다 한들 믿을 수나 있을까?

아니, 설사 자신의 경험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도 정확히 어떤 단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태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제 정체가 아닙니다.”

스스로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태일 자신조차도 믿지 못할 이야기다.

또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양상이 아닌, 현재의 선택과 그로 인해 달라질 미래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지하 도시는 붕괴할 겁니다.”

루키우스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붕괴? 여기가? 거창한 표현이군. 여기는 그저 쓰레기장일 뿐이야. 우리는 그 쓰레기들 속에서 쓸 만한 걸 건져 내 생활하는 빈민들에 불과하지. 이런 밑바닥 인생들에 더 빼앗길 게 남았나?”

태일은 그런 루키우스의 비웃음을 들으며 50구역에서 들은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50구역은 지옥이야.”

요한도, 레지스탕스도 더 나빠질 게 없다며 그렇게 말했다.

50구역의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린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자신의 상황을 최악이라 자조했고,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루키우스 역시 그와 같았다.

쓰레기장에서 지하 도시를 건설하고 빈곤하게나마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그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조차도 산산조각 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센트럴 오더.”

태일의 말에 루키우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소울벌룬의 유통은 막았지만 그 과정에서 빌미를 제공했고, 센트럴은 결국 ‘센트럴 오더’의 발동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르는 대가에 대해 태일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 빼앗을 게 남았냐고 물었습니까? 센트럴은 이제 당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할 겁니다. 이 도시에서 생산되는 에너지, 그리고 심지어 당신들의 목숨까지도.”

“이보게……!”

루키우스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센트럴 오더가 발동하면 모든 자원은 센트럴에 집중됩니다. 지하 도시는 물론, 지상의 자본가들 역시 선택해야 할 겁니다. 센트럴에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내놓을지, 아니면… 싸울지.”

“잠깐.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태일의 말을 듣고 있던 카츠미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린 50구역으로 통하는 열차를 다시 운행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지, 센트럴과 전면전쟁을 벌이자고 온 게 아니야!”

“그건 결국 같은 뜻이야.”

“헛소리!”

페이진마저 잔뜩 성난 얼굴로 태일을 노려보았다.

“궤변이군. 뭐? 센트럴과 싸워?”

카츠미와 페이진의 분노는 당연했다.

마피아는 50구역 환락가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 과정에서 센트럴의 비호를 받았고, 사실상 유착 관계에 있었다. 그들로부터 신선한 고기를 공급받았고, 마피아는 정계에 막대한 양의 정치자금을 댔다.

“우린 오해를 풀기 위해 온 거지, 센트럴과 싸울 마음은 없어.”

카츠미가 정색하며 말했지만, 태일은 그 순진함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만약 발터의 집에서 ‘센트럴 오더’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태일 역시 두 사람의 말처럼 최대한 평화적으로 상황을 해결해 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센트럴 오더가 뭔지 알고 있나?”

“전쟁 시기의 비상경계잖아? 우리에게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걸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센트럴에서 군을 투입할 리가……!”

“순진한 생각이군.”

센트럴이 대륙의 제국들을 무너뜨리던 시기에 발동되었던 명령, 센트럴 오더.

지금의 세대는 대부분 그 명령의 의미를 망각한 채 껍데기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센트럴 오더는… 대륙민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겠다는 선언이야.”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말하는군.”

루키우스가 흥분을 가라앉힌 채 태일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태일의 설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만큼 태일과 같이 센트럴 오더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센트럴 오더는 단순히 전쟁을 위한 게 아니지.”

센트럴 오더의 진정한 의미는 내부 저항 세력들을 쓸어내고, 정부의 지배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었다.

외부의 적을 이유로 내부의 반대파를 숙청하고, 부자들의 부를 빼앗아 국가에 귀속시키며, 대륙 주민들을 철저한 정부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센트럴이지만, 역사 시대의 독재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방법을 가장 잘 활용한 이들 역시 센트럴이었다.

“하지만 센트럴 오더가 의회를 통과했을 리 없네. 그런 짓을 할 만큼 의회가 맛이 갔을 리 없어. 그건 자칫 의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결정이란 말이야.”

바로 그때, 문밖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어요.”

쾅!

곧이어 문이 열리며 남녀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 밖에 경계를 서고 있던 자경단원들은 그런 두 사람의 돌발 행동에 놀란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문을 열어젖힌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루키우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루키우스는 화가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태일 역시 문 앞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표정이 변했다.

문밖에 선 둘은 다름 아닌 변호사 제인과 레이였다.

50구역에서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갑자기 사라진 제인이 한때 자신을 감금하고 협박하던 Z―rail의 변호사 레이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

“거기, 자네는 레이 아닌가?! 아무리 자네라 해도 대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죄송합니다, 시장님. 전…….”

루키우스의 성난 추궁에 레이는 당황한 기색으로 급히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제인은 분노한 루키우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센트럴 오더는 이미 의회를 통과했어요.”

“뭐?!”

“8월 29일, 다음 달 말 전승기념일에 공식적으로 센트럴 오더가 발동할 거예요.”

“레이, 대체 저 여자는 누군가? 누구이기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실례했습니다, 시장님. 저는 코르지 브레드필드의 딸, 제인 브레드필드입니다.”

“코르지의… 딸이라고?!”

순간, 집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루키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제인을 바라보았고, 카츠미와 민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뻐끔거렸다.

“브래드필드?!”

“당주, 왜 그래? 저 여자는 일전에 레미제라블 근처에 살던 변호사잖아?”

오직 페이진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꼴통, 넌 코르지 브래드필드가 누군지 모르는 거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고 있던 민호가 페이진에게 면박을 주었다.

카츠미가 조용히 읊조리듯 설명했다.

“센트럴 의회 보수파의 수장…….”

“센트럴 의회에서도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원로 의원이지.”

민호가 카츠미의 말을 받아 마무리했다.

긴 시간 센트럴 의회의 거대 정당을 이끌었기에 코르지는 센트럴 권력의 1/3 이상을 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거물의 딸이었단 말이지. 내가… 내가 왜 몰랐을까? 하, 하하…….”

카츠미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제법 부유하게 자란 여자라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너무나 쉽게 묻혀 버린 열차 저격 사건, 레미제라블 개업식 때 도착한 상원의원과 캐피탈 클럽의 축하 화환들, 50구역에 남몰래 잠입해 들어와 제인의 행적을 완전히 지워 버린 정체불명의 조직, 전 조직원들을 투입해도 정확히 알아낼 수 없던 제인의 신분.

그러나 브레드필드라는 이름을 듣자 비로소 조각들이 전부 맞춰졌다.

“…제기랄.”

문제는 제인이 50구역에서 겪은 일들이었다.

제인은 하마터면 50구역 마피아의 손에 죽을 뻔했으며, 열차 테러를 당하기까지 했다. 만약 태일이 아니었다면 제인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심지어 최근 목숨을 잃은 LAPD 경관 요한은 그녀의 연인이었다.

카츠미가 알고 있는 정보만도 그 정도이니, 브레드필드 가문에 어떤 이야기가 흘러 들어갔을지 빤한 노릇이었다.

카츠미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허탈하게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민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센트럴 오더가 내려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겠는데.”

“아니, 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 모든 사태는 나 때문이 아니거든요? 애당초 그건 아버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결정도 아니고!”

분위기를 읽은 제인이 깜짝 놀란 듯 외쳤지만, 카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하게 말했다.

“제인 씨, 아니… 아가씨. 50구역에서 무슨 일을 겪었든 우리가 사과할게요. 보상도 얼마든지 하도록 하죠. 그러니까 아버님을 설득해 줘요.”

Z―rail과의 협상이 다 뭐란 말인가.

상원의원만 움직일 수 있다면, 의회만 설득할 수 있다면, 이전처럼 50구역에 열차를 가동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적어도 카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물급 의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센트럴에 맞서 싸운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듣고 있을 이유 역시 없다.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50구역 주민들은 센트럴에 맞설 마음 따위 없어요. 그저 이전처럼 교역을 원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열차를…….”

“잠깐.”

그러나 제인은 카츠미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50구역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나의 의사와 무관한 일이에요.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죠. 센트럴 오더는 이미 예정되었고, 그 준비는 훨씬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이루어졌어요.”

한편, 태일은 새삼 ‘브레드필드’라는 이름의 위력에 놀라고 있었다. 태일이 살던 세계에서는 의회가 이미 오래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의회 의원이 가진 권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상원의원 ‘브레드필드’의 이름이 언급되자 카츠미와 민호는 물론, 루키우스까지도 제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제인이 자신의 신분만 제대로 밝혔다면 50구역 전쟁을 막는 건 일도 아니었겠군.’

그러나 제인은 물론 요한 역시 그런 신분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제인은 자신의 신분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지 몰랐던 것처럼 보였다.

“일단…….”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루키우스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 제인이 제멋대로 열고 들어온 문을 가리켰다.

“그 문부터 좀 닫고 들어오지.”

어느새 자경단원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거기 문밖 자네들도 가서 일들 봐! 그 허술한 경비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쥐새끼처럼 엿듣고 있지 말란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자경단들은 무안해하는 얼굴로 급히 흩어졌고, 제인과 레이 역시 그제야 자신들의 무례를 깨달은 듯 조심스레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난 뒤, 루키우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거지? 이 지하 도시에 뭐 건질 게 있다고 이 늙은이를 찾아와서 괴롭히는 거야?”

“지상으로 올라가세요, 시장님. 아니, 루키우스 베르코프.”

제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드님을 만나서 설득하세요. 어떻게든 센트럴 오더의 발동을 막아야 해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태일이 조용히 한마디를 보태자, 제인은 짐짓 놀란 얼굴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게 최선입니다.”

나비의 날갯짓.

센트럴 오더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엄청난 사건들이 뒤따를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도시의 붕괴를 의미했다.

태일은 이미 겪었기에 그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태일은 다시금 이쪽 세계의 사건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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