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지하 도시의 망령 (7)
한바탕 거대한 토네이도가 휘몰아친 거리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근방의 건물 몇 채가 완전히 부서졌고, 거리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사방에 분쇄된 잔해물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주변의 모습을 살피는 태일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그 남자, 뭐지? 아는 사이 같던데.”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카츠미와 페이진의 목소리에는 제 나름의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불신.
그러나 태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난장판이 된 거리를 걸어 도시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
민호가 나지막이 경고하자 태일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세 사람을 바라본다.
“네 멋대로 판단하고, 네 멋대로 결정할 거라면 우리가 어째서 필요하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이었다.
늘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려 하던 태일이다. 그러나 당시 태일은 동료라고 믿은 이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설득하고, 함께해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클라이드를 비롯한 간부들은 배신을 택했다.
태일은 믿음과 신뢰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함께할지, 거부할지 너희가 결정하면 돼.”
이제 태일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더는 다른 누군가에게 이해받길 원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동료라 생각했는데.”
“…….”
한때 태일 역시 클라이드를 동료라 생각했다
태일은 카츠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앞쪽 거리의 뿌연 먼지 속에서 이쪽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저쪽입니다!”
앞서 난장판 속에서 주민들을 대피시킨 자경단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적을 걸친 채 석궁이나 파이프, 도끼 따위를 들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
자경단원의 모습은 일견 무법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오만해 보이는 마피아와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함과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무리 속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는 가장 선두에 선 노신사였다.
“이거, 무슨 날인가? 오늘따라 불청객이 많군.”
허름한 양복에 황동색 십자 목걸이, 하얀 턱수염.
그런 신사의 입에서 쇳소리가 섞인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쓰레기장에 뭐 얻을 게 있다고 이리들 몰려드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태일이 천천히 노신사를 향해 다가갔고, 뒤쪽에 서 있던 남자들은 저마다 무기를 위협적으로 꺼내 들며 노신사를 보호하려 했다.
흰 머리칼에 비쩍 마른 체형의 노신사는 뒤쪽의 우락부락한 이들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그가 모두를 이끌고 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노신사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아, 괜찮아. 다들 요란 떨 거 없어.”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 마주 걸어와 태일의 앞에 섰다.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 역시 태일의 옆으로 다가와 노신사와 마주했다.
노신사의 시선이 민호를 향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리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낯익은 얼굴이 있군. 우리, 초면은 아니지?”
“…네.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는군. 자네, 그 마녀와 함께 왔던 애송이 아닌가?!”
노신사가 눈을 크게 뜨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습니다, 시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민호가 불편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시장의 역시 그리 반갑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래, 이제 좀 알겠군.”
시장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시선을 돌려 태일과 카츠미, 페이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센트럴을 적으로 돌린 놈들이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지?”
순간, 민호를 비롯한 모두의 낯빛이 변했다.
시장은 냉정한 얼굴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 전쟁을 벌이든, 테러를 벌이든 우리와는 관계없는 얘기니까.”
“시장님,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민호가 급히 말했지만, 시장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 쓰레기장이 자네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시장의 얼굴에는 짙은 혐오가 묻어났다.
시장이 뒤쪽의 자경단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뭘 멍하니 보고 있나? 이자들을 당장 내보내!”
“네, 알겠습니다!”
자경단원들은 저마다 무기를 든 채 태일 무리를 향해 다가왔다.
험악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태일이 입을 열었다.
“루키우스 베르코프.”
바로 앞에 선 시장을 비롯해 몇 사람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
“잠깐!”
순간, 시장이 급히 손을 들어 올려 자경단원들의 행동을 막으며 태일을 노려보았다.
“자네, 방금 뭐라고……!”
시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루키우스… 베르코프.”
“베르…코프라고?”
이름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시장뿐만이 아니었다.
카츠미 역시 경악한 얼굴로 시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문의 이름에 집착하고 명예를 중시해 온 카게구미 가문의 당주로 키워지면서 카츠미가 가장 먼저 암기해야 했던 것은 대륙 전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가문의 성(姓)이었다. 그랬기에 카츠미는 페이진이나 민호와 달리 가문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베르코프 가문.
그들은 대륙 최고의 철도회사 ‘Z―rail’을 이끌어 온 가문이다.
루키우스가 무섭게 태일을 노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체 네놈이 어떻게 그 이름을…….”
“저는 당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겁니다. 만나려는 상대방의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이번에 놀란 이는 민호와 페이진이었다.
태일은 늘 제멋대로이고, 언제나 반말은 물론, 독설을 퍼붓는 남자였다. 경찰서장 앞이든 마피아 간부 앞이든 태일이다.
그나마 민호는 단 한 번, 태일이 누군가에게 존대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었다.
‘대장에게도 존대했지.’
레지스탕스의 대장, 하얀 늑대 앞이었다.
그러나 민호가 기억하는 루키우스는 그저 괴팍한 노인일 뿐이었다. 지하 쓰레기 더미에 처박혀 살면서 바깥세상에 눈과 귀를 닫은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
오죽했으면 딘과 세연을 비롯한 셸터의 간부들마저 쫓겨날 정도였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네. 당신과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애당초 태일의 협상 대상은 지상에서 Z―rail을 경영하는 ‘장 베르코프’가 아니었다.
지하 도시에 숨어 사는 노신사 베르코프.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당신이 매우 유능한 시장이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 모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태일의 얼굴은 진지했다.
지하 쓰레기장 속 조악하게 만들어진 지하 도시, 그런 도시에서 ‘시장’이라 불리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신사.
그러나 태일은 알고 있었다.
지하 도시의 존재 자체가, 지금껏 이런 도시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과거, 알마티 지하 도시에 방문했을 당시, 태일은 알마티 LAPD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괴담처럼 전해지던 알마티 지하 레지스탕스.
누군가는 알마티 지하의 레지스탕스가 센트럴을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가졌다 했고, 누군가는 알마티 지하에 거대한 도시가 있다고도 했다.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는 곳이고, 바로 그 때문에 알마티와의 전쟁에 앞서 변수가 될 만한 장소였다. 그래서 태일은 지하에 잠입해 들어왔다.
그러나 지하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보호막은 완전히 부서져 이미 오래전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유독가스가 온 지하를 자욱이 메웠다. 지하 어느 곳에 있든 방독면 없이는 채 하루도 살아갈 수 없었다.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없었다. 날붙이를 갖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때때로 내려와 순찰하는 LAPD에 의해 매일같이 몇 명의 주민들이 죽어 나갔다.
아니, 그들은 주민이 아닌 죄수였다. 죄수들은 쉬지 않고 쓰레기를 분리했으며, 발전소의 불길을 관리했다. 그렇게 생산된 에너지는 지상의 공장을 돌리는 데 사용되었다.
알마티 지하는 용서받지 못한 죄수들의 노역장일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레지스탕스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라네.”
지하에서 만난 노인은 과거 지하 도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그래, 도시라는 명칭에 나름 어울렸지. 쓰레기 더미에 둘러싸여 먹을 건 늘 부족했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안전한 땅이었거든. LAPD 놈들이 지금처럼 지하에 수시로 찾아오지는 않았어.”
노인은 한때 자신이 지하 도시의 자경단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자경단원들은 쓰레기차를 몰고 다니며 그들의 마지막 남은 거주지, 지하 쓰레기장에 형성된 도시를 지켰다.
지상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의 도시였지만, 나름의 규칙을 만들면서 최소한의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18년 전, 50구역에 소울벌룬이 유통되고 ‘센트럴 오더’가 발동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센트럴은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지. 지하 도시의 손톱만 한 에너지까지도 말이야. 심지어 싸울 수 있는 이들을 모조리 군대에 편입시키려 했어.”
센트럴 오더는 50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알마티에도 영향을 끼쳤다.
“루키우스 시장님은 놈들의 명령을 거부했고… 전쟁이 벌어졌지.”
알마티 지하 도시는 센트럴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지상의 기업들 역시 지하의 반란에 호응했다.
지상의 기업과 길드들에도 재산을 헌납하고 징집에 응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서 지하의 반란에 힘을 보탠 것이었다. 명령을 하달하는 과정에서 센트럴은 본보기로 몇몇 기업가들을 살해했고, 그로 인해 지상의 자본가들 역시 센트럴과의 전쟁을 결의했다.
지상의 기업가와 지하의 빈민들이 함께 들고일어나자 알마티의 LAPD는 버티지 못했다.
LAPD는 저항군에게 패배해 쫓겨났고, 순식간에 알마티는 저항군의 손에 들어갔다.
“사실 거의 성공했어. 우리가 모든 걸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
루키우스의 뛰어난 능력과 지휘 덕분에 저항군은 손쉽게 알마티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구역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센트럴 정부는 거세게 번져 가는 저항의 불길을 막아 내지 못했고, 센트럴 오더는 그렇게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영웅이라 불리는 놈들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우린 성공했을 거야.”
무능한 센트럴 정부 인사들을 살해하고, 의회마저 폐쇄해 버린 ‘영웅’들은 자신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알마티에 쳐들어왔다.
하지만 저항군이 무너진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놈들이 몰려왔을 때 시장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거야.”
알마티에 센트럴의 병력이 진입해 들어오기 직전, 반란군을 이끌던 루키우스 베르코프가 목숨을 잃었다. 대륙 기업 Z―rail의 사장이자, 루키우스의 아들인 장 베르코프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자존심이 높았던 자본가들은 결국 지하의 냄새 나는 빈민들이, 그들의 지도자가 자신들마저 지휘하려 드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자본가의 자리에 있다가 지하로 쫓겨난 패배자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서는 꼴만큼은 절대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우두머리를 잃은 저항군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노인은 어두운 눈빛으로 태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실패해 봤기에 센트럴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다네. 시장님을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그건 이미 끝나 버린 신화일 뿐이야. 그러니… 미안하네.”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던 노인은 태일을 LAPD에 신고했다.
노인이 시간을 끄는 동안 태일을 잡기 위해 LAPD 병력이 집결한 상태였고, 태일은 그대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태일은 도시 곳곳 벽에 그려진 낙서를 보았다.
낡은 양복, 제대로 깎지 않은 수염을 가진 노인의 모습.
태일에 앞서 혁명을 일으켰으며 성공할 뻔했던 남자, ‘루키우스 베르코프’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지하 도시의 흔적과 함께 지워져 버린 상태였고, 태일 역시 그저 노인의 기억에 의존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현재, 달라진 세계.
지하 도시는 이야기만으로 듣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저항군을 이끌던 루키우스 역시 태일의 눈앞에 살아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