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지하 도시의 망령 (4)
태일을 발견한 제인은 반가운 마음에 곧장 큰길로 나가려 했다.
“잠깐.”
레이가 그런 제인의 팔을 붙잡는다.
“나가서 뭘 어쩔 생각이야?”
“그야…….”
제인은 선뜻 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곧이어 온갖 생각들이 제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태일은 50구역에서 사건이 터지기 직전 갑자기 사라져 버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렇게 지하 도시에 있게 된 경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태일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의 옆에 있는 사람들, 누구인지 알겠어?”
“…….”
“카게구미의 카츠미, 천중회의 페이진. 나머지 한 명은 레지스탕스 대원이야.”
레이는 이미 태일 주변 이들의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다.
“서로 적이었던 자들이 손을 잡고 여기 나타난 거야. 저마다 각 세력을 대표할 정도의 간부급들이 말이야. 저들이 과연 누구를 상대하기 위해 여기에 왔을 거 같아?”
50구역에서 연달아 벌어진 사건들은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에서 유도한 것에 가까웠다.
즉, 그 배후에는 제인의 아버지도 있었다.
직접 발을 담그지 않았더라도 미리 50구역에서 벌어질 사건을 알고 딸을 강제로 탈출시키지 않았던가.
그 직후, 센트럴 의회는 기다렸다는 듯 50구역을 봉쇄하여 고립시켰다.
태일을 비롯한 네 사람은 봉쇄를 풀기 위해 왔을 테고, 제인은 더없이 ‘유용한’ 협상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레이의 말을 이해한 제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인은 레이의 팔을 밀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태일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백번 양보해 그가 아니더라도, 그 옆의 다른 이들까지 믿을 수 있나?”
“…….”
“이번에도 저 남자가 네 경호원으로 오로지 너만을 지킬까?”
제인은 힐난하듯 캐묻는 레이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태일 일행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제인은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태일이 향해 간 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도 더는 그런 제인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하아…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제인은 과할 정도로 사람을 신뢰하고, 순수한 선의를 신뢰한다. 그런 제인을 보호하는 업무는 암흑가의 변호사로서 위험천만한 음모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것보다 힘겨웠다. 그러나 일단 의뢰를 받은 이상, 레이에게 실수란 허락될 리 없다.
각오를 다진 레이는 그대로 제인의 뒤를 따라 거리로 나섰다.
의외로 태일 일행은 멀리 가지 못했다. 아니, 아예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제인은 거의 뛰다시피 태일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순간, 멈춰 선 태일 일행의 반대편으로 황금빛의 머리칼이 레이의 눈에 들어왔다.
‘클라이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레이는 황급히 내달려 제인의 팔을 잡아채 옆쪽 샛길로 다시 숨어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란 제인이 성난 얼굴로 다시금 자신을 막은 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린 레이의 모습을 본 제인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레이? 왜 그래, 갑자기?”
“쉿. 움직이지 말고… 목소리도… 내지 마.”
“…레이?”
레이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에 숨겨 둔 경호병력들의 배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안심은 되지 않는다.
클라이드. 홀로 상원의원의 별장에 침입해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은 남자.
전 대륙 암흑가의 정보에 밝은 레이조차 아직 제대로 된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무력이 인간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저 괴물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지금 레이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놈의 범위에서 제인을 피난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 *
“뭐요, 그쪽은?”
태일 일행을 안내하던 자경단 대장은 갑자기 거리 한가운데를 막아선 금발의 남자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한눈에 보아도 지하 도시 주민으로 보이지 않는 차림새에 허리춤에는 머스킷까지 차고 있다.
무엇보다도 남자의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자경단 대장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잠깐. 대체 메타휴먼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야? 누가 들여보냈어?!”
한편, 태일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금발의 남자를 본 바로 그 순간부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금발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태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뚜벅.
태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뚜벅.
붉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피의 언덕 위 검은 탑 앞에서 함께 맹세했던 그날을.
뚜벅.
바로 그 장소에서 놈이 자신을 향해 머스킷을 겨누었던 그날을.
한때 동료였던 남자가, 그러나 결국 배신했던 남자가 태일의 앞에 멈춰 선다.
뒤에서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의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었다.
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대장.”
지겹도록 듣던 그의 목소리가, ‘대장’이라는 호칭이 낯설게만 들려온다.
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태일을 향해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러나 정작 태일은 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린 것만 같았다.
놈은 태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얀 늑대나 카렌처럼 그저 닮기만 한 타인이 아니다.
태일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태일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남자다.
“…클라이드.”
태일은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태일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배신자 클라이드를 다시 만났다.
배신자는 전과 달리 붉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카츠미는 놀란 눈으로 상대와 태일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조직 하나를 괴멸시키고, 몇 차례의 전쟁을 종결시켜 버린 괴물, 신태일.
그러나 50구역의 그 누구도 그런 태일의 과거에 대해 알지 못했다.
카게구미는 태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름의 정보망을 십분 활용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지하 도시에서 태일을 ‘대장’이라 부르는 남자가 나타났다.
‘대장…이라고 했지, 분명?’
카츠미는 그 호칭을 곱씹으며 자신 옆의 민호와 페이진을 곁눈질했다. 둘 모두 카츠미처럼 어지간히 놀란 듯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카츠미를 비롯한 세 사람은 태일을 은퇴한 ‘히트맨(Hitman)’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히트맨은 어둠 속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개개인의 신분 자체가 드러나 있지 않기에 자못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러나 히트맨은 용병이나 마피아와 달리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지 않으며, 동료를 갖거나 조직에 속하는 일도 없다.
거물급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임시로 팀을 이뤄 사냥에 나섰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그조차도 일시적인 연합일 뿐이었다.
즉, 히트맨이 누군가를 ‘대장’이라 부르거나, 불릴 일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 ‘클라이드’라는 로보티안이 태일을 대장이라 부른 것이다.
긴장감이 높아진 가운데, 태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 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대장도 알다시피 주변 환경이 바뀌었으니까… 내 눈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지. 대장은 그대로네.”
클라이드가 피식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파직.
태일의 손에서 살짝 푸른 스파크가 튀었지만,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 모습을 본 클라이드가 못 말리겠다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침착하네, 대장은. 솔직히 다시 만나면 앞뒤 안 보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
카츠미는 민호, 페이진과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살짝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클라이드는 계속해서 웃는 낯이지만, 한쪽 손은 계속해서 옆구리의 머스킷을 붙잡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태일에게 비치는 태도는 분명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평범한 놈이 아니야.’
카츠미의 본능이 계속해서 위험신호를 보낸다.
그때였다.
자경단 대장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망할 깡통이 계속 개폼이나 잡고 있어?!”
비단 자경단 대장뿐만이 아니었다.
모여든 주민들 역시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태일의 앞을 막아선 클라이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고물 따위가 인간인 척 대로를 떳떳이 걷고 있어! 어?!”
“그 총은 또 어디서 훔친 거냐!”
“저 고철덩어리 당장 끌어내라! 압착기에 밀어 넣어 버려!”
카츠미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고 험악한 주민들의 분위기에 당황한 나머지 주춤하고 말았다.
그것은 ‘클라이드’라는 인물에 대한 적의가 아니었다.
주민들은 순수하게 로보티안을 향해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그것은 뿌리 깊은 혐오였고, 분노였다.
곧이어 클라이드를 향해 온갖 쓰레기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문득 어떤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주님, 로보티안의 존재를 금융회사와 정부가 정말 몰랐겠습니까? 처음부터 쓰레기인 걸 알고 판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분노는 결코 그들을 향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암흑가의 보스들을 상대하는 변호사였다.
당시 카츠미는 변호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존재로 고위험 금융 상품을 만든 금융회사, 그러한 상품의 판매를 방조한 센트럴 정부, 로보티안의 존재를 미리 알고 차익을 실현한 자본가들까지.
버블 사태의 뒤편에는 수많은 악당들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진짜 악당들에게 분노하는 대신 당장 길가를 누비는 메타휴먼과 로보티안에게 분노했다. 그들의 돈을 빼앗아 간 이들은 로보티안이 아닌 악당들이지만, 그 대신 수많은 로보티안들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당주, 위험해!”
무수한 쓰레기들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가운데, 페이진은 멍하니 서 있는 카츠미를 잡아끌어 뒤로 밀어냈다.
“꺼져, 괴물 로봇!”
“잡아 부숴 버려! 당장 부수란 말이야!”
“저놈들 때문에… 저놈들 때문에!!”
주민들이 던진 쓰레기가 클라이드의 어깨를, 이마를 때린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대장, 아직도 이런 자들을 위해 싸우고 싶어?”
“클라이드…….”
“아직 ‘열쇠’를 가지고 있지? 그걸 넘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태일은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매만졌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한편, 성난 군중들의 반응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지자 자경단 대장조차도 당황한 듯 부하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야, 뭐 해! 저 고철덩어리 붙잡아서 장벽 밖으로 던져 버려! 빨리!”
“네! 가자, 얘들아!”
“자자, 다들 진정하시오! 저 깡통은 우리가 치워 버릴 테니까! 거기 아저씨, 그만 던져!”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자경단원들이 군중들을 진정시키며 클라이드를 향해 다가가는 찰나, 태일이 고함을 내질렀다.
“다들 물러서!!”
그러나 이미 그 순간, 클라이드는 머스킷을 뽑아 들고 있었다.
탕!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