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지하 도시의 망령 (3)
사이렌 소리는 곧 멎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 보이던 지하 도시의 시장, 루키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비가 올 것 같더군.”
뜬금없는 루키우스의 말에 금발 남자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상에 말이네.”
“…….”
“알마티는 옛날부터 근방 지역과 달리 강수량이 적지 않은 지역이었지. 이맘때쯤이면 비가 오곤 했어.”
루키우스는 등을 소파에 기댄 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비를 맞은 지 오래됐다네. 아니, 지상의 공기를 마신 게 어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
그런 루키우스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실소를 내뱉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었나? 좋아, 대가를 말하지. 복종에는 응당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지.”
“…….”
“루키우스, 당신이 잃어버린 전부를 돌려주지. 당신의 자리는 물론, 빼앗긴 당신의 재산까지 모두 돌려주겠어.”
“잃어버린 전부라…….”
루키우스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건 텔로스 가문의 약속이자 센트럴의 약속이다.”
“텔로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금발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별안간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흐, 흐흐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갑작스러운 웃음에 담긴 것은 기쁨이 아닌 비웃음이었다.
“이보게, 혹시 젠코프 성당에 가 본 적 있는가? 악기 박물관은?”
센트럴의 성립과 함께 무너져 내린 옛 유산들의 이름 따위, 금발 남자가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루키우스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금발 남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정말 센트럴은, 그 대단한 텔로스 가문에서는 그것들을 돌려줄 수 있는가?”
“당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당신들이 어떻게 그 모든 걸 돌려줄 수 있겠나?”
알마티에 존재하던 성당도, 박물관도, 공원도 이젠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한낱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 거대한 공장들과 발전소가 들어섰다.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사라진 옛것을 복원할 수는 없다.
금발 남자는 자신을 노려보는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뻔뻔하군.”
“그래, 나 역시 일조했지. 매일같이 후회한다네. 당신들과 같은 악마와 손잡은 것을!!”
금발 남자는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머스킷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잠시 뒤, 생각이 바뀐 듯 다시 손을 거두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지하 도시의 망령으로 남아 배회하는 것. 그게… 내 죗값이야. 그러니 가서 전하게. 다시는 날 찾지 말라고 말이야.”
루키우스의 말에 금발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고, 루키우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감싼 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 * *
“자, 이제 방독면을 벗어도 괜찮소.”
폐기물로 쌓아 올린 장벽 안에 들어온 직후, 정체 모를 액체에 흠뻑 적셔져 소독까지 마친 태일 일행은 그제야 방독면을 벗을 수 있었다.
이어 방호복을 벗은 뒤, 저마다의 짐을 정비했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군.”
“젠장, 처음부터 여기에 바로 닿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거야?”
민호가 투덜대는 페이진의 말에 도시 정중앙의 거대한 불꽃, 야나르를 가리켰다.
“지상에서 저 불길에 곧장 몸을 던진다면 바로 여기까지 떨어질 수 있지. 형체가 남아 있다면 말이지만.”
“…쳇!”
야나르를 중심으로 성립된 지하 도시의 공중에는 불투명한 막이 만들어져 있었다.
공기를 정화하고 유독 가스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지하 도시의 생명줄과 같은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그 보호막이라는 것도 펑크 라이더들의 바이크처럼 조잡하고 어설펐다.
그 때문에 도시 곳곳에서 유독 가스가 흘러나왔고, 매캐한 냄새가 도시 전체를 메웠다.
그럼에도 즉사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이 끔찍한 도시에서도 주민들이 목숨을 이어 갔다.
그 와중에 나름의 지도자가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장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요?”
“일전에 한 번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흠, 일전에 여길 온 적이 있단 말이오? 거참…….”
요란하게 태일 일행을 맞아들인 것은 이른바 ‘자경단’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도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청소차를 끌고 다니며 석궁이나 식칼 따위를 들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두 청소차를 몰던 자경단의 대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태일 일행의 면면을 살폈다.
일단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들었기에 태일 일행을 관문으로 인도하긴 했으나, 커다란 가방을 멘 채 구식 무기들을 들고 온 일행의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LAPD나 공무원들이 들고 다닐 물건은 아니었다.
“그… 착용하고 온 장비가 워낙 고급스러운 것이기에 혹시나 LAPD 놈들인가 했소. 아니면 공무원 놈들이라든지.”
세금을 내지 못해서, 임대료를 부담하지 못해서, 혹은 범죄를 저질러서 지하 도시에 흘러든 이들에게 있어 공무원은 적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린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아니면 됐소. 따라오시오.”
카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자경단원이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뿐 아니라 자경단원들은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태일 일행의 정체와 신분에 대해 직접적으로 캐묻지 않았다.
카츠미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선을 긋는 자경단원들의 태도에 조금 무안한 듯 보였지만, 태일은 지하 도시의 그런 문화가 새삼스럽지 않았다.
지하 도시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단 하나의 룰.
― 타인의 과거에 관해 침묵한다.
그것은 50구역 레지스탕스들이 이름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 존재를 지우고 사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가기로 각오한 이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중 유쾌한 사연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런 침묵은 약자들 간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배려였다.
자경단원들은 태일 일행에게 그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태일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시청으로 가는 동안 일행은 줄곧 조용했다.
그사이, 태일은 도시에 엉성하게 지어진 건축물과 주민들의 면면을 살폈다.
“싸게 달라고, 싸게. 좀 깎아 줘. 이게 처음은 아니잖아?”
“흥! 이거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그래 봐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주워 온 거잖아!”
“이 사람이! 그럼 당신이 나가서 아무 곳이나 뒤져 보든가!”
정체 모를 물건을 거래하는 사람들.
“어르신, 빵 한 조각만… 물 한 모금만이라도 주세요. 동생이 굶고 있어요.”
“정화통을 하루만 빌려주시면 내일 꼭 와서 돌려 드릴게요.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비싼 걸 많이 주워 와 봤어요. 그러니까 제발!”
도시에 갇힌 채 구걸을 위해 길가에 늘어선 고아들.
기억 속의 지하 도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주민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기억 속의 지하 도시와 비교해 최소 두 배 이상은 되는 규모였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벽면 곳곳에 그려진 낙서들이었다.
메타휴먼 개XX… FXXX!
깡통 XX 놈들!
메타휴먼에 대한 혐오.
아니, 정확히는 로보티안에 대한 혐오가 사방에 번져 있었다.
그런 낙서들을 보며 태일은 문득 자신이 지하 도시 장벽 내부에 들어와 메타휴먼을 단 한 기도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 아니라 지상의 도시 골목에서도 태일은 메타휴먼이나 로보티안을 보지 못했다.
태일이 잠시 발걸음을 멈춰서 수많은 낙서들을 바라보자, 민호가 옆으로 다가왔다.
민호 역시 태일이 지켜보고 있던 낙서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고 있던 거 아니었나? 그래서 녹스를 남겨 두고 온 줄 알았는데.”
태일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프랑켄에게 여기에서 메타휴먼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언뜻 들었지만…….”
“이곳에서 메타휴먼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야. 로보티안의 존재 역시 인정하지 않아.”
“…….”
“알마티는 최초로 메타휴먼을 만들어 냈고, 그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지만… 메타휴먼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모든 것을 잃었어.”
“…버블이군.”
민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태일 역시 벽면 가득한 낙서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떼었다.
메타휴먼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금융 상품의 버블, 그리고 그 직후 시민권을 가진 로보티안의 등장과 버블의 붕괴.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곳은 다름 아닌 메타휴먼이 최초로 탄생한 도시, 알마티였다.
수많은 알마티의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로 전락했고, 지하로 밀려났다.
지하 도시의 인구 폭발은 바로 태일이 살던 세계에 없었던 메타휴먼 때문이었다.
* * *
지하 도시의 거리 외진 곳.
“저, 저도… 저도 주세요!”
“제발, 자비를……!”
“빵 한 조각만!”
“저, 저리 비켜! 내가 먼저야!”
“동생이, 동생이 있어요!”
그곳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얘, 얘들아, 나도 더는 가진 게 없어. 나중에 좀 더 가지고 올 테니까……!”
망토를 걸친 채 후드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여성이 자신을 향해 몰려든 고아들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성의 망토 자락을 붙잡고 늘어졌고, 어떻게든 뭐라도 더 받아 내기 위해 애걸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지갑이나 망토 안에 감춰진 목걸이, 손에 끼워진 반지까지,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먹잇감으로 보일 뿐이었다.
지하 도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물건들의 등장에 굶주린 고아들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소동이 점차 커질 무렵, 역시 망토를 걸친 남자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나 여인의 망토를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아야!! 으아아!”
던져진 아이들 중 몇이 눈을 까뒤집은 채 남자를 향해 이판사판으로 달려든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을 향해 남자는 사정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남자의 무자비한 폭력에 놀란 여인이 다급히 손을 내밀며 제지했다.
“레, 레이! 아직 어린애들이야!”
“물러서 있어.”
아이들은 발길질에 채이고도 피를 머금은 채 흉흉하게 남자를 둘러쌌다.
웬만한 폭력으로는 물러서지 않을 만큼, 여인이 내보인 재력은 달콤한 것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더는 안 되겠다는 듯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철컥!
어지간해서는 물러날 것 같지 않던 고아들이 총구를 보자 그제야 겁을 먹은 듯 슬슬 뒤로 물러선다.
“꺼져라.”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먼저 달려들길 기다리는 듯 서로 곁눈질했다.
총알이 소진될 만큼의 희생자만 나온다면, 머릿수로 어찌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욕망이 아이들의 발을 붙잡았다.
그러나 얼마간의 대치 끝에 대신 죽어 줄 머저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골목 안쪽으로 흩어졌다.
겨우 사태가 진정됐음을 확인한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총기를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여인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겠군.”
“미, 미안해.”
“조금은 철이 들었나 했더니.”
“하지만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똑똑히 기억해, 제인. 약자가 무조건 선(善)은 아니야.”
“…….”
여인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보였지만, 성난 듯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주눅 든 여인의 모습을 보고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뒤, 뒤돌아섰다.
“가지.”
“…응.”
그렇게 여인이 남자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앞쪽 큰길을 지나쳐 가는 일행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여인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또 무슨 일이야?”
“태일 씨……?”
제인의 눈앞에 스쳐 지나간 장발의 남자, 그는 분명 50구역에서 그녀를 구해 준 태일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