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97화 (98/220)

97화 지하 도시의 망령 (1)

무기를 화제로 삼은 대화는 날이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검과 총기에 관한 대화는 끊어질 줄 몰랐고, 두 장인이 내보인 물건에 카츠미와 페이진은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결국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을 때, 비로소 대화가 멈추었다.

“이거, 너무 즐겁게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군.”

“그러게요. 얼른 식사를 준비해야겠어요.”

“귀한 손님들이 왔으니, 아껴 둔 꿀술도 몇 통 꺼내야겠어.”

“제가 도울 건 없겠습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힘쓰는 거 하나는 자신 있으니, 맡겨만 주십쇼!”

어느새 장인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두 사람은 선뜻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허허, 아닐세, 아니야. 손님들에게 일을 시킬 수야 없지. 거기 앉아서 쉬고 있어!”

“맞아요. 모처럼 솜씨 좀 발휘해 봐야지.”

발터와 막야의 제지에 페이진과 카츠미는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전에 없이 얌전한 태도로 다소곳했다.

태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지금의 두 사람을 보고 과연 누가 마피아 당주와 간부라고 상상이나 할까.

더구나 천방지축 날뛰며 아무 말이나 내뱉어 대던 페이진의 변화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민호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두 분, 모시고 가고 싶을 정도인데.”

“…그러게.”

태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지만, 지금부터 가야 할 장소는 노부부에게 있어 견디기 힘든 곳일 터였다.

잠시 뒤, 차려진 저녁상은 호화롭다고는 할 수 없으나 꽤나 정갈한 식단이었다.

얼마간 식탁 위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후, 발터가 꺼내 온 꿀술의 주향이 맴도는 가운데, 다시금 대화가 시작되었다.

“…지하에 가겠다고?”

“예, 선생님.”

“여전히 위험한 일을 하는구나.”

민호의 말에 발터와 막야는 잠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어째서 지하에 내려가려 하는지 묻지 않았으며, 말리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방독면과 방호복이 필요하겠네요.”

“잠시 기다리게. 내 곧 가져다주지.”

그저 묵묵히 필요한 물건을 내줄 뿐이었다.

발터와 막야는 곧 네 개의 방독면과 정화통들, 그리고 녹색의 방호복을 꺼내 왔다.

“이건……?”

페이진과 카츠미는 갑자기 등장한 방독면과 방호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방독면과 방호복의 필요성에 대해 알고 있던 민호조차 놀란 표정으로 정화통과 방호복을 살폈다.

“이건… 생활용이나 산업용이 아니로군요.”

단순히 화재나 사고를 대비하거나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임시 방독면 따위가 아니었다.

군용으로 사용되는 물건으로, 화학전에 대비한 물건이다.

정화통의 생산 시기와 정비 상태를 보니, 관리 또한 섬세하게 되어 주기적으로 교체한 흔적이 있었다.

방호복 역시 단순히 비닐 따위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외부의 독소를 완벽히 차단할 수 있는 특수 재질로 제작된 물건이었다.

“품질은 믿어도 좋을 거네.”

“선생님…….”

민호는 잠긴 목소리를 내며 두 장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페이진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물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방독면은 또 어째서… 필요한 겁니까?”

“이곳 알마티는 ‘기계 도시’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네.”

발터가 꿀술 한 잔을 들이켠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중 도시.”

알마티에는 두 개의 공간이 공존했다.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지상과 폐기물로 가득한 지하.

산업 발전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폐기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알마티의 지하 공간은 말 그대로 쓰레기장에 불과했다.

지상이 ‘기계 도시’라 불리며 발전하는 사이 엄청난 산업폐기물들이 쏟아졌고, 지하의 깊이와 너비는 그만큼 더욱 넓어져만 갔다.

원리는 단순했다.

― 쓸모 있는 것들은 지상으로, 쓸모없는 것들은 지하로.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명제는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본래 쓰레기장이었던 곳에 사람들이 산다는 말씀이십니까?”

카츠미가 창백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지하는 여전히 폐기물 처리장이에요. 그저 지상에서 밀려난 이들이 지하에 내려갔을 뿐이죠.”

“많은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갔어. 지상의 임대료와 세금은 결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거든. 다행히 아직까진… 지하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는 않고 있지.”

카츠미와 페이진은 부부의 담담한 설명에 완전히 질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장에…….”

“차라리 여기를… 이 도시를 떠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카츠미의 물음에 반문한 이는 다름 아닌 민호였다.

“어디로?”

카츠미와 페이진은 대답하지 못한다.

“애당초 떠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떠날 수 있나?”

당장 마피아의 지배하에 있는 환락가의 주민들 역시 50구역의 힘든 삶에 늘 고통받았다.

손님들이 벌이는 행패와 모욕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그렇게 벌어들은 돈을 마피아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빼앗긴다.

그러나 그런 삶에서 주민들은 결코 탈출할 수 없었다.

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노제 고아원에서 자라는 동안 민호 또한 결코 탈출을 꿈꾸지 못했다.

그저 겁쟁이였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친구, 동료가 있다. 그때껏 일구어 온 터전이 있다.

비참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더라도, 그들에게 던져진 동전 몇 개로 식구들의 끼니를 챙겨야 한다.

그런 가운데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외부 구역으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던 사회에서 버림받아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할지언정, 인간은 사회, 그 자체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떠날 수 없어요.”

막야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만드는 무기들은 서대륙과 동대륙에서 들여온 재료 모두를 필요로 하죠.”

“재료를 조달해 작업하려면 동쪽과 서쪽을 잇는 바로 이 도시에 머물러야 한다네. 떠날 수야 없지”

과연 두 사람은 무기 제작에 모든 것을 바친 장인이었다.

그러나 알마티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둘은 최악을 대비해야만 했다.

“알다시피 동쪽으로 가는 열차가 멈춰 섰네. 우리의 끝도… 얼마 남지 않은 게지.”

꿀술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발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면, 반야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만든 물건을 찾는 상인들은 대부분 동대륙 사람들이죠. 그런 동대륙을 오가는 열차가 끊어지면서 당장 다음 달 임대료와 세금조차 부담하기 힘든 상황이에요.”

자신들의 상황을 털어놓은 반야는 가만히 방독면을 내려다보았다.

“준비를… 해야겠죠.”

잘 썩거나 타지도 않는 폐기물들은 온갖 유독 물질을 뿜어낸다. 방독면과 방호복이 없다면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지하였다.

즉, 태일 일행 앞에 꺼내 놓은 물품들은 두 장인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해 둔 물건이었다.

태일은 꿀술을 한 모금 들이켜며 콧수염 경찰이 한 말을 떠올렸다.

“냅 둬. 곧 개발될 곳이잖아. 제 놈들도 곧 주제를 알게 되겠지. 여차하면 아래로 가는 거고.”

가진 기술의 효용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장인들은 점차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고, 종국에는 아래로, 즉 지하로 떨어진다.

알마티의 발전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지하로 밀어 떨어뜨리면서 공포로서 일구어 낸 성과물이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던 중 발터가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또 모를 일이지. 기회란 언제든 올 수 있는 거니까. 최근에 소문이 돌고 있거든. 오랫동안 잊혀진 명령이 다시 발동할 거라는 소문이 말이야.”

“과연 그게 좋은 일일까요?”

그러나 막야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 아니겠어? 우리같이 무기를 만드는 장인들에게는 일거리가 쏟아질 수 있는 노릇 아닌가!”

“정부에서 누가 우리 물건을 찾겠어요?”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태일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잊혀진 명령’… 태일이 기억하는 한, 그런 끔찍한 명령은 단 하나뿐이다.

“설마 그 명령이라는 게… ‘센트럴 오더(Central Order)’입니까?”

태일의 물음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고 있군. 젊은이들 중 그 끔찍한 명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줄 알았는데.”

순간, 태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모를 리 없다. 아니, 모를 수 없다.

18년 전, SB 사태로 인해 혼란에 빠진 50구역을 철저히 부순 명령이 바로 ‘센트럴 오더’였으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태일은 당시의 끔찍한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센트럴에서 파견된 정규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간을 벌레처럼 ‘청소’했다.

시체 타는 냄새와 잿더미만 남은 땅.

사태 해결이라는 목적조차 잃은 힘은 모든 것을 파괴했고, 심지어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파괴했다.

센트럴 오더의 결말, 그것은 쿠데타였다.

센트럴 오더로 인해 의회는 전복되었고, 이른바 ‘영웅’들에 의해 신체제가 들어섰다.

그 끔찍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 * *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 태일 일행은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무장을 점검했다.

LAPD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대에 움직이는 편이 좋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부디 조심해야 하네.”

“지하에는 온갖 불한당들이 가득해요. 자칫 시비가 걸린다면…….”

“걱정 마세요. 사실… 우리도 만만치 않은 불한당들이니까요.”

발터와 막야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하지만 민호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순진한 두 장인의 생각과 달리, 눈앞에 있는 이들은 마피아, 레지스탕스, 게다가 혁명군 대장이다. 태일의 일행은 50구역을 넘어 전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불한당이었다.

잠시 뒤, 발터와 막야는 제각기 자신들이 만든 무구를 가져왔다.

“자네, 총기에 대해 전문가 수준이던데, 이걸 가져가게. 자네가 이 물건을 다룰 수 있다면 좋겠군.”

페이진에게는 투박해 보이는 권총이 주어졌고.

“카츠미, 이 아가씨를 맡기고 싶어요. 악령을 쫓아낸다고 알려진 ‘사인검(四寅劍)’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카츠미에게는 묵직한 보검이 주어졌다.

페이진과 카츠미는 제각기 감동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당황하고 말았다.

“이거… 탄창이 없는데요?”

“선생님, 전 이렇게 무거운 검을 다루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두 장인은 거의 막무가내로 둘의 손에 무구를 쥐어 주었고, 결국 두 사람은 반강제로 그 기괴한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장식품에 가까운 물건들을 받아 든 둘은 그럼에도 무기를 제각기 허리에 찬 뒤, 공손히 감사를 표했다.

사용 가치가 없다 해도 장인들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태일은 두 사람에게 주어진 물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인간이 가진 본연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무기, ‘소울 웨폰’.

지금껏 오로지 알렉세이 딘만이 제작한 물건을 두 장인이 결국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선물을 받은 직후, 민호가 가만히 앞으로 나서 두 장인 앞에 고개를 숙였다.

“두 분께 신세를 졌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그러게요. 우리가 오히려 즐거웠는걸.”

“떠나기 전,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민호가 슬쩍 바라보자, 태일은 동의를 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밖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숲 지대에 가 보십시오.”

두 사람이 의아해하며 민호를 바라보자, 민호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속삭이듯 부연했다.

“그곳에 박사님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지만, 민호는 그 이상의 설명 없이 다시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녹스를 만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태일 일행이 어두운 거리로 사라진 뒤, 노부부는 얼마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가 만든 아이들, 제법 좋은 주인을 만난 거 같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모처럼 보람이 느껴지더군.”

장인은 자신들이 만든 물건이 쓰임에 맞게 올바른 주인의 손에 쥐어졌을 때 기쁨을 느낀다.

물론 처음부터 두 사람 역시 총과 칼을 차고 다니는 태일 일행이 평범한 이들일 거라 여기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를 살해한 경험이 있을 것이고, 불의를 행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세상에서 과연 누구인들 무죄일 수 있을까.

이 시대를 만든 노인들도, 시대에 저항하는 젊은이들도, 시대에 순응하며 밀려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죄를 짊어진다.

그런 시대에 무기의 역할은 오로지 제 주인을 지키는 것이고, 장인 부부는 카츠미와 페이진의 손에 들린 무기들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부디 젊은이들의 미래에 가호가 있기를.”

발터와 막야는 얼마간 가만히 두 손을 모아 태일 일행의 무사를 기원했다.

잠시 뒤, 고개를 들어 올린 막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감… 갈 생각이죠?”

“빨리 짐을 챙깁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도시 밖을 나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민호가 말한 사람을 만날 생각에 이미 몸이 달아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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