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96화 (97/220)

96화 기계 도시 알마티 (4)

“그랬군. 그랬어. 말없이 사라지셨단 말이지. 그거야말로 박사님답긴 하지만, 아쉽구만.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다시 뵙고 싶었는데.”

“그러게나 말이에요. 지금도 가끔 그때 본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는데…….”

“왜 아니겠어. 난 지금도 내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어.”

민호를 비롯해 네 사람을 집에 들인 노부부는 차를 내놓은 뒤, 한창 만담을 펼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분 모두 건강히 계신 걸 보니 좋습니다.”

민호의 말에 노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저 죽을 날 기다리는 영감탱이일 뿐이지. 명맥을 이어 줄 제자조차 없으니 말년이 좀 쓸쓸하긴 하구먼.”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죠. 어디, 요새 우리가 만든 물건을 쓰는 사람이 있긴 한가? 만들어 봐야 어디 벽걸이로 전시되기 딱 좋지.”

“흥, 화약 냄새 풍기지 않는 총은 총이 아니고, 아무것도 베지 않는 검은 검이 아니야. 우리가 어디 의미 없는 장식품이나 만드는 사람들이던가.”

“맞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카츠미와 페이진은 노인의 말에 감동한 듯 열렬히 호응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본 노부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요새 보기 드물게 건실한 젊은이들이구먼.”

“그러게나 말이에요. 내가 이런 사람들을 불한당으로 의심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둘은 불한당 중에서도 불한당인 마피아 간부였다.

그런 두 사람을 두고 건실하다며 칭찬하는 노부부의 모습에 태일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카츠미와 페이진은 진심으로 존경심을 내비치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총기류 제조의 장인 ‘발터’와 도검류 제조의 장인 ‘막야’.

둘은 50구역에서 꽤나 알려진 장인들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무기들은 이른바 명품으로 유통되었고, 그만큼 엄청난 품질을 자랑했다.

발터의 이니셜이 적힌 총기는 기능 고장이 거의 없으며, 막야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수십 년이 지나도 날이 상하지 않는다.

카게구미의 전대 당주는 막야가 제작한 도검류의 열렬한 팬이고, 카츠미의 보검 또한 그녀의 손에 의해 제작된 물건이었다.

페이진은 발터가 제작한 총기를 수집했으며, 알마티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장인이 다름 아닌 발터였다.

그 정도의 장인 두 사람이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태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보다 태일의 흥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두 분은 딘과 잘 아는 사이셨습니까?”

“…딘?”

“설마… 박사님 말인가?”

태일의 스스럼없는 호칭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허허, 자네는 아직 젊어 보이는데 태도가 영 아니구먼.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그분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아무리 무식하다지만… 쯧쯧.”

순간, 태일은 황당함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니, 그럼 딘을 딘이라고 부르지 대체 어떻게 불러야 한단 말인가.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나이 지긋한 장인들도 날 보면 바짝 엎드리면서 박사님이라고 불러. 뭐 하나만이라도 전수해 달라면서! 알아? 내가 이런 취급 받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전투를 앞두고 무기 제작을 좀 더 서둘러 달라는 태일의 요청에 딘이 길길이 날뛰며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발광하며 떠들어 댄 말이 영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한편, 분위기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두 장인이 단단히 화가 난 듯 입을 다문 가운데, 카츠미와 페이진은 물론, 민호까지도 태일을 타박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한순간에 죄인이 되어 버린 태일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 박사…님과 제가 좀 친분이 있어서요.”

굳이 따지자면 친분 수준이 아니라 아예 딘이 태일의 휘하에 있었다.

“그분이 좀 격 없이 사람을 대하기는 하지만, 결코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분이지. 암.”

굳이 따지자면 알렉세이 딘은 격 없는 걸 넘어 아무에게나 막 대하는 또라이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발견되는 사소한 오류를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발터는 팔짱을 낀 채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자네, 우리가 박사님과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지? 사실 그분을 만난 건 천운이었지. 암.”

발터와 막야는 역사 시대의 무기들을 계승, 발전시킨 장인들이었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레이저와 나노 입자의 기계 갑주가 발명되었지만, 둘은 제각기 냉병기와 화약 무기에 온 힘을 쏟았다.

두 장인에게는 인간 본연의 힘을 충실히 구현하는 재래식 무기야말로 가장 순수한 무기였으며, 그 자체로 예술품이었다.

물론 태일 입장에서는 딘의 존재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철학이지만, 두 사람은 평생을 진지하게 무기 제작에 임했고, 보다 완벽한 장비 제작을 추구했다.

그러나 7년 전, 두 사람은 평생의 상식을 뒤흔들 만한 물건을 손에 넣었다.

“평소 동대륙에서 재료들을 들여오곤 했지만, 그때 우린 한창 49구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무기들을 들여왔지.”

막야는 금고에 넣어 둔 물건 두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 왔다.

머스킷 ‘AL―10’과 도검 ‘바리사다(Balisarda)―7’.

둘 모두 딘이 직접 제작한 소울 웨폰으로, 각각 태일이 알고 있는 AL 시리즈와 바리사다 시리즈의 이전 버전이었다.

“이걸 보고 우리 부부는 충격에 빠졌지. 우리가 평생을 추구하던 완벽, 그 자체였으니까.”

조금의 오차 없이 벼려진 무기는 둘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무기들이 동대륙에서 제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장 49구역으로 떠났다.

그건 당연하게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여정이었다.

펑크 라이더 무리에게 습격을 당할 수도 있고, 길을 잃은 채 황무지를 헤매다 아사할 수도 있었다.

결코 노부부에게 적합한 여행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죽을 뻔했다네.”

그러나 발터는 그렇게 한마디로 짧게 당시의 고생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충분히 가치가 있었지. 박사님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자네, 그분을 안다면 혹 포트리스에도 들어가 봤는가?”

“…예.”

어디 들어갔다 뿐인가.

포트리스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 몇 번이나 참전했고, 포트리스를 지키던 녹스가 인간이 되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내 생애 가장 황홀한 경험이었지. 그 엄청난 기술력과 발명품들 하며…….”

그 뒤로 발터와 막야는 수십 분 동안 자신이 목격한 기술들을 갖가지 용어로 설명했다.

상식을 벗어난 알렉세이 딘의 오버테크놀로지를 목격한 두 장인이 느낀 감정은 질투나 절망이 아닌, 경이로움과 순수한 희열이었다.

“몇 개월을 그곳에 머물렀다네. 그사이 장비들이 만들어지는 과정들도 직접 보았지. 하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겠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네.”

한창 흥에 겨워 설명하던 노부부의 얼굴에 언뜻 쓸쓸함이 떠올랐다.

“우리 수준으로는 박사님의 기술을 결코 모방할 수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거든. 침팬지에게 아무리 단조 기술을 가르친다 한들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조차 버린 채 스스로를 침팬지에 비유하고 있지만, 정작 발터의 얼굴은 깨달음을 얻은 승려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태일은 두 사람이 포트리스를 떠나온 데 다른 이유가 있음을 곧 알았다.

알렉세이 딘은 뛰어난 기술력을 지니고 있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장인의 삶을 영위하지 않았다.

장인은 오로지 한 분야에 통달해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 장인은 한 갈래 길을 평생 묵묵히 걷고, 또 걷는다.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같은 작업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딘은 장인이라기보다 창조자의 길을 걸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추구했으며, 모험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기존의 방식을 따르기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결국 두 장인은 딘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나 다시금 자신들의 거처로, 낡은 대장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딘에 대한 존경심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다만, 이제 소원이라면 죽기 전 한 번만 더 박사님을 뵙는 것이라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태일은 두 장인의 순수한 열정 앞에 저도 모르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구식 기술에 대한 노인의 집착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흐름을 무시한 채 망치를 두드린 둘의 작업은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둘은 신념을 갖고 자신들의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거기에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그런 두 장인 앞에서 누가 감히 시대에 뒤처졌다며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둘이 만들어 낸 작품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그런데 자네들, 메고 온 그 배낭들은 다 뭔가?”

발터의 물음에 페이진이 앞서 경관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이유로 얼굴을 붉혔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제가 갖고 온… 고물…들입니다.”

고물이라는 말에서 페이진은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발터는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고물(古物)이라 불리는 장비들을 제작하는 게 우리 부부의 일이라네. 어디 한번 보지.”

페이진이 달아오른 얼굴로 가방을 열자, 카츠미 역시 도검류가 담긴 자신의 배낭을 주섬주섬 열었다.

“오오?! M1917! 콜트 모델이 아닌가? 이 물건을 여기서 보는군! 좋은 물건이지.”

“네, 맞습니다! 그리고 이건 스미스 앤 웨슨의 물건입니다.”

페이진은 흥이 난 듯 아예 배낭을 뒤집어 온갖 총기류와 장비들을 늘어놓았고, 곧이어 발터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허허, 아니, 유감이지면, 이건 모조품 같군. 프레임이 묘하게 달라.”

“하지만 각인을 보십시오. 이건 틀림없이 S&W의 것입니다.”

“그래, 맞아. 각인은 그럴듯하게 새겨 놨군.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렇게 허술한 리볼버가 생산된 적은 없어. 이 물건은 구조적으로 너무 부자연스럽거든. 좀 살펴봐야겠지만, 구조가 이래서야 금세 고장 날 거네.”

“아무래도 제가 무기상에게 속은 모양입니다. 젠장.”

“허허허, 어쩔 도리가 없지. 요새 같은 세상에는 진품에 대한 기록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까 말이야. 잠깐 기다리게. 내게 역사 시대 말기에 생산된 총기류에 대한 도감이 있는데…….”

“그런 게 있습니까?!”

한편, 바로 옆에서는 한결 조용한 분위기에서 도검에 대한 품평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건… 친애하는 한조 군의 문양이로군요. 진품이에요.”

“맞습니다. 선생님의 도검만큼은 아니지만, 아끼는 검입니다.”

“난 이렇게 거칠고 강인하게 다듬어 내진 못해요. 한조의 걸작이죠. 아까운 인재였는데… 너무 일찍 떠났어요.”

“전 오히려 선생님의 도검이 구현해 낸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좋습니다.”

“호호. 듣기 나쁘지는 않네요. 그래서 난 내 아이들을 ‘아가씨’라고도 부르죠. 다음 아이들을 좀 볼까요?”

막야가 조심스럽게 한조의 검을 내려놓자, 카츠미는 공손히 배낭에서 꺼낸 단검을 막야 앞에 내려놓았다.

처음 대장간에 발을 들인 페이진과 카츠미를 향해 고함을 질러 대던 노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도검을 보는 눈은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편, 카츠미는 마치 스승을 대하듯 무릎을 꿇은 채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막야의 말을 경청했다.

알마티의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인해 겁에 질려 있던 카츠미도, 경관의 비웃음에 좌절하고 절망하던 페이진도 지금은 순수하게 장인들과의 대화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방해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태도였다.

그렇게 대화에서 배제된 채 우두커니 앉아 있던 중, 민호가 태일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태일이 고개를 돌리자 민호는 손을 들어 올려 문 쪽을 가리켰다.

무기에 대한 열띤 토론 속에 자신이 낄 자리가 없음을 깨달은 건 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저분들이 우리의 잠입을 도와주실 거 같진 않은데.”

다양한 작품들이 생산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의 길드는 이른바 기업들의 하청 조직이었다. 갖가지 부품과 원자재를 공급해 주는 조직들이 곧 ‘길드’라 불린다.

장인이라는 자들 역시 대부분은 하청을 받아 분업화된 일에 종사하는 톱니에 불과했다.

그런 가운데 발터와 막야 같은 ‘진짜 장인’들은 도시의 외진 곳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태일 일행에게 필요한 건 도리어 진짜 장인이 아니라 Z―rail에 하청을 받는 길드였다.

“난 그저 여기에 방독면을 받으러 왔을 뿐이야.”

“…….”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지하에 내려가려면 방독면이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민호의 대답에 태일은 피식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말이야.”

두 장인은 알렉세이 딘의 오버테크놀로지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주눅 들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신기술에 경탄하고 경의를 표했으나,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그들은 그저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관철했다.

민호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발터와 막야는 카츠미와 페이진에게 꼭 필요한 멘토들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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