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95화 (96/220)

95화 기계 도시 알마티 (3)

“혹시 잊었을까 봐 말해 두지만, 우린 길드 ‘도제’야. 똑똑히 기억해라.”

장인이 되고자 길드에 들어가 수련하는 직공, ‘도제[Apprentice]’.

알마티에서 비교적 흔한 신분일 뿐만 아니라 나름 자유로운 활동이 허락되는 계층이기도 했다. 도제 중에서는 일을 배우러 온 이방인도 제법 많기에 검문을 당할 경우 비교적 안전한 신분이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벌써 세 번째 당부이지만, 민호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페이진을 바라보았다.

“아, 누굴 바보로 알아?! 알겠다고, 알았어! 도저… 아니, 도제! 그 부하 같은 거! 알았다고!”

“부하가 아니라 견습… 하아, 됐다. 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냥 벙어리인 걸로 해 두지.”

“그편이 낫겠어.”

카츠미마저 민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페이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어?”

“쉿.”

태일의 경고에 페이진이 성난 와중에도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골목 반대편에서 LAPD 제복 차림의 경관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태일을 비롯한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최대한 태연하게 골목을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경관들의 시선이 슬쩍 태일의 일행 쪽으로 향한다.

거리에 사람이라고는 넷뿐이기에 주의를 끈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카츠미와 페이진이 들고 있는 가방 때문일 수도 있었다.

‘젠장…….’

초조하게 타들어 가는 속마음을 숨긴 채 아무렇지 않게 경관들의 옆을 지나친다.

“어이.”

“…….”

“거기, 너희들.”

경관들의 걸음이 멈춘다.

태일의 바로 뒤에 따라오던 민호의 시선이 태일과 마주쳤다.

타탁!

태일이 손을 움찔거리자, 푸른 스파크가 작게 튀어 올랐다.

카츠미와 페이진 역시 그 모습을 보고는 저마다 옆구리에 찬 권총과 단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다소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두 경관을 기절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민호는 세 사람을 향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내저은 뒤, 곧바로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힌 채 두 손을 마주 모으고 경관들을 향해 걸어갔다.

“네, 경관 나리들. 부르셨습니까?”

지금까지의 민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지닌 경관이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너희들, 뭐지? 이 근방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민호는 고개를 숙인 채 굽실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 저희야 애송이 도제일 뿐인걸요. 나리께서 기억하실 만한 얼굴도 아닙니다.”

“뭐야, 도제였어?”

경관이 피식 웃으며 옆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교적 깐깐해 보이는 동료 경관은 뱁새눈을 뜬 채 민호를 노려보았다.

“허참, 이런 골목에서 도제 놈들이 싸돌아다니는 꼴을 다 보네.”

“그러게나 말이야. 딱 보니 동부 원숭이들인 거 같은데… 뭐라도 배우러 왔나 보지.”

태일 일행을 원숭이라 칭한 콧수염은 노골적으로 넷을 무시하며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뱁새눈 경관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일행을 살폈다.

“그 가방들에 든 건 뭐지?”

“아, 저희가 시제품으로 만들어 본 물건과 외부에서 들여온 고물들입니다. 아무래도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어이, 거기, 너! 가방 좀 열어 봐.”

역시 묵직한 배낭이 시선을 끌었던지, 뱁새눈의 손끝이 페이진을 향했다.

페이진은 붉어진 얼굴로 어기적거리며 두 경관 앞으로 다가갔다. 배낭을 푼 페이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을 꿀꺽 삼키고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배낭 안에 든 물건들은 페이진이 들고 온 소총과 장비들이었다.

무기들을 꺼내 보여도 괜찮을지 확신하지 못한 페이진이 슬쩍 민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민호는 페이진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페이진은 긴장된 얼굴로 가방을 열었다.

“뭐야, 이거?”

“허참.”

피스톨, 소염기, 장전손잡이 따위의 부품과 리볼버, 라이플…….

가방 안을 헤집어 장비들을 꺼내 본 경관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심지어 줄곧 의심하는 기색이던 뱁새눈마저 허탈하다는 얼굴이었다.

“이것참, 고작 이런 녀석들을…….”

“반장님도 늙었어. 의심만 늘어서는.”

둘은 안심한 듯 중얼거리며 페이진의 물건들을 돌려주었다.

무기들에 대해 조금의 위협도 느끼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가 갖고 노는 새총 따위를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너희들, 아무리 뭘 모르는 녀석들이라지만, 이런 시국에 함부로 알마티 외부를 싸돌아다니나? 너희 때문에 우리들만 피곤해진단 말이다!”

콧수염이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 자재들을 얻으러 갔다가…….”

“딱 보니 동부에서 유통되는 고물들 같은데, 동대륙에 오가는 열차는 전부 끊긴 거 몰라? 괜히 의심 살 짓 하지 마라. 알겠나?”

“네, 감사합니다, 나리.”

‘고물’이라는 표현에 페이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다행히 두 경관은 그런 표정을 보지 못한 듯 혀를 찼다.

“하여튼 이놈의 판자촌에는 유난히 괴짜들이 많아.”

“냅 둬. 곧 개발될 곳이잖아. 제 놈들도 곧 주제를 알게 되겠지. 여차하면 아래로 가는 거고.”

콧수염이 킬킬거리며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렇게 태일 일행을 비웃은 두 사람은 뒤돌아서서 골목을 빠져나가 버렸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페이진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태일은 두 사람이 한 말을 떠올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노리고 온 거란 말이지.’

두 경관은 우연히 네 사람을 발견한 게 아니었다.

네 사람이 알마티 외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넷을 의심해 조직적으로 검문을 실시한 것이었다.

한편, 카츠미는 가만히 페이진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잘 참았어.”

“빌어먹을! 고물…이라고?”

페이진은 자신이 사용하던 무기와 애착을 가진 장비들이 경관들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굴욕감이고, 자괴감이었다.

무법자로 환락가를 거닐던 그의 무력이 이곳에서 그저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카츠미와 페이진이 소지한 총기와 도검들은 50구역에서 주 무기이지만, 알마티에서는 장인이 되고픈 도제들이 시험 삼아 건드리는 구시대 시제품 정도에 불과했다.

민호가 페이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부연했다.

“알마티의 LAPD들은 입자 빔을 방출해 내는 레이저 무기와 나노 방호복으로 무장하고 있어.”

“…….”

“당장 코앞에서 소총을 발사한다 해도 그들의 첨단 방호복을 뚫을 수는 없다는 뜻이야. 그게 바로 놈들의… 센트럴의 무력이다.”

페이진과 카츠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고, 태일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일 역시 처음 50구역에서 마피아들의 손에 들린 구식 무기들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던가.

이쪽 세계에서 50구역은 한참을 뒤처져 역사 시대 끝자락에 머물러 버린 유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50구역에서 군림하던 마피아는 자신들이 까마득한 우물 속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다.

저마다의 이유로 충격을 받은 카츠미와 페이진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둘은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태일과 민호를 그저 따라오고 있었다.

“여기에 지인이 살고 있다고 했던가?”

“그래. 지금껏 살아 있다면.”

알마티 내부에 민호의 지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태일 역시 상당히 놀랐다. 더구나 장인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당장 입이 쩍 벌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눈앞의 골목을 보자 민호의 자신 없는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마티 외곽의 허름한 골목.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거리에는 시대에 뒤처진 길드의 장인들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골목길의 장인이라면, 사실상 이번 일에 거의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따라와. 여기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기에 태일은 일단 민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골목에는 여러 가판대들이 늘어선 가운데, 흐리멍덩한 눈의 노인들이 갖가지 잡화들을 팔고 있었다.

정체 모를 프로그램 이름이 적힌 디스켓, 조잡해 보이는 엔진 장치, 미술품처럼 전시된 도검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판에 올려진 것들은 나름 장인이라 칭해지는 이들에 의해 제작된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흐름에 뒤처진 장인들은 외곽 골목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제 그런 장인들에게는 기술을 배우러 찾아오는 도제 따위 있을 리 없고, 고작해야 동대륙에 온갖 물건을 유통하는 업자들 정도가 거리에 찾아올 뿐이었다. 가판대 위 물건들은 업자들의 손을 거쳐 49구역의 장 영감과 같은 기술자나 50구역 마피아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늙은 장인들은 결국 죽거나 쫓겨나 그 지위를 상실할 것이고, 기술 역시 잊혀질 터였다.

“여기야.”

민호는 골목에서도 가장 안쪽, 초라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 옆에는 투박한 형태의 소형 용광로와 화덕을 비롯한, 단조 설비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대장간의 문조차 잠기지 않은 채 쇠를 벼릴 수 있는 연장들이 벽면에 잔뜩 매달려 있다.

기계들이 모든 것을 대체한 세상의 마지막 대장간이 알마티 구석에 남아 있었다.

똑똑.

“선생님, 계십니까?”

민호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다.

내부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사이, 카츠미와 페이진은 끌린 듯 작업 공간으로 다가가 용광로와 화덕을 살폈다.

“…깔끔해.”

“그렇군.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설비들은 낡고 시대에 뒤처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관리되어 있었다. 줄곧 풀이 죽어 있던 두 사람은 대장간 안에서 홀리기라도 한 듯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누구죠?”

백발의 자그마한 노파가 문을 열어젖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민호가 반가운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온 노파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노파의 시선은 민호가 아닌, 대장간 안의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당신들! 누구인데 남의 작업 공간에 멋대로 들어간 거예요?”

보란 듯 문을 열어 뒀으면서 다짜고짜 성을 내는 노파의 모습에 태일은 다소 놀랐지만, 페이진과 카츠미는 두말없이 달려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파 앞에 고개를 숙였다.

“허락 없이 발을 들여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것들에 신기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태일은 공손한 둘의 모습을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늘 자존심 강한 모습을 보이며 남 앞에 굽히기 싫어하던 두 사람이 자그마한 노파 앞에 고개 숙인 모습은 신기할 정도였다.

“바깥에 누구 왔는가?”

“나와 봐요, 발터. 손님인지, 도둑인지 누가 오긴 왔으니.”

“도둑? 허허, 여기 가져갈 게 뭐 있다고…….”

곧이어 집 안에서 거대한 몸집의 노인이 나타났다.

민호는 그런 노인을 보고 반색하며 다시금 인사했다.

“선생님도 계셨습니까?!”

“…음?”

집 밖을 나와 민호를 유심히 살피던 노인의 얼굴이 곧 밝아졌다.

“어어, 자네! 그 똘마니 아닌가?!”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저렴한 표현에 카츠미와 페이진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민호는 그조차 반가운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 역시 남편의 말을 듣고는 민호를 보더니 무릎을 쳤다.

“…똘마니? 아, 민호 군!”

“허허,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구만, 반가워. 대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게야?”

“그게 잠시 인사도 드릴 겸…….”

“그래, 박사님은 별고 없으시고?”

정작 민호의 용무를 물은 노인은 사실 그런 것 따위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끊으며 누군가의 안부를 물었다.

“…….”

딘은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을 열렬히 바라보는 노부부를 마주했다.

그제야 태일은 대강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았다.

눈앞의 노부부는 알렉세이 딘의 지인들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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