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기계 도시 알마티 (1)
49구역을 벗어날 즈음, 프랑켄은 여전히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린 녹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셸터를 박사님에게 맡겨도 괜찮겠어? 지금의 셸터는 사실 네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잖아.”
“괜찮아. 딘이라면 잘할 거야. 녀석이 데려온 기계병들도 꽤 믿음직하고.”
프랑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세이 딘은 코카서스와의 전투로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악착같이 로보티안들을 지켜 낸 남자였다. 이번에도 기계병들을 이끌고 코카서스의 백련과 앞장서 싸우지 않았던가.
“어떤 면에서 보면… 박사님보다 지금의 딘이 훨씬 믿음직해.”
프랑켄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려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에게 자신을 창조한 과학자 알렉세이 딘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 즉, 신과 같은 존재였다.
― 내가 가진 지식이야말로 나의 본질이다.
딘의 괴상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녹스에게 자신의 창조자는 오로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녹스는 자신을 만든 알렉세이 딘 본인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어쨌든 녹스가 딘의 클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것은 자못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박사님을 왜 그렇게 타박한 거야?”
“그냥, 재밌잖아.”
녹스는 자신의 말에 붉으락푸르락하는 딘의 얼굴을 떠올린 듯 킬킬거렸다.
한편, 프랑켄은 그런 녹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푸른빛의 영체일 때와는 달리 풍부한 감정들이 얼굴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생생히 전달된다.
다양한 종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공유할 수조차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포트리스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녹스는 담담히 말했다.
[나를 창조한 인간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 난 그저 그의 명령에 친절히 응할 뿐, 내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거든.]
당시 그 말을 하던 녹스가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면, 분명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녹스는 한때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아니, 스스로 그 사실을 잊기 위해 ‘시스템에 요구되는’ 말투를 흉내 냈다.
프랑켄 역시 다른 인간들과 있을 때면 감정을 숨긴 채 가면을 썼기에 그런 녹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의식적인 높임말, 인위적인 친절과 꾸며진 표정.
단 한 번,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직후 ‘로보티안’이 되었지만,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인간은 자신과 닮은 존재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조차 반기지 않는다.
그런 경험들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메타휴먼들은 자신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50구역 공장 지대의 노동자들이 그랬다.
‘그 녀석들, 포트리스에 오고 싶어 했는데…….’
50구역 공장 지대에 사는 반쪽짜리들은 프랑켄으로부터 셸터에 대해 전해 들었고, 셀터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감옥에 갇혀 있던 프랑켄을 구하겠다며 감옥을 부술 정도의 녀석들이다.
설마 자신이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에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한편, 아래쪽의 풍경은 어느새 사뭇 달라져 있었다.
장벽과 중규모의 마을들, 제법 잘 정비된 도로들이 보인다.
철로 보수를 위해 동원된 메타휴먼들이 작업에 매진하는 가운데, 황무지 곳곳에 온갖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근방 도로에는 펑크 라이더들의 바이크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건설기계들이 바삐 오가고 있다.
“허접해. 저런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녹스가 답답하다는 듯 불만을 토해 냈지만, 대륙에서 그 정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조차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하루아침에 요새를 만들어 내는 괴물을 보아 왔으니, 눈앞의 공사 현장이 녹스의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떨떠름한 얼굴로 공사 현장을 바라보던 녹스가 잠시 뒤, 흥분한 목소리로 전방을 가리켰다.
“어어?! 저기가 바로 ‘알마티’인가?!”
해발 900미터 높이의 고지에 세워진 도시, 알마티(Almaty).
“그래, 맞아. 저기가 바로 48구역이야.”
도시 수십 개 규모의 지역을 포괄하는 49구역과 달리 ‘48구역’은 오로지 알마티 한 곳만을 지칭한다.
한때 프랑켄이 근무하던 도시, 알마티는 메타휴먼이 최초로 만들어진 ‘기계 도시’였다.
Z―rail의 본사 역시 알마티에 위치한다.
곧이어 알마티를 눈앞에 둔 다빈치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 * *
조종실 안.
오토파일럿 모드가 적용된 가운데, 핸들과 조종대의 갖가지 손잡이들이 제각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키리릭… 키릭 키릭, 치이익…….
모듈들이 자아내는 소리가 마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스텔스 모드를 탑재하면서 엔진 소리와 프로펠러의 소음은 완벽히 차단했건만, 정작 조종대에서의 소음만큼은 그대로 들려왔다.
분명 알렉세이 딘의 실력이라면 그 소음들을 완벽히 없애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톱니바퀴 구르는 소리와 엔진의 작동음 따위를 좋아했고, 일부러 그 소리들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태일 역시 그런 녀석의 취향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지나친 고요보다 적절한 소음이 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소음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뭐라고?”
소음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사장과의 독대를 요청해서 설득하면 된다. 우리도 제법 자금력을 갖고 있으니, 나쁜 거래는 아닐 거야.”
세상 물정 모르는 당주 아가씨.
“말이 안 통하면 총으로 대화해야지. 감히 마피아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단순무식한 행동대장 똘마니.
“…….”
그나마 민호는 두 사람의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 이해하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조종실 원탁에 앉은 세 사람을 둘러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대체 내가 어쩌자고 당신들이랑 여길 왔을까?”
“무례해.”
카츠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태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현실을 말해 주었다.
“사장과의 독대는커녕 아예 만나 주지도 않을 거다.”
“…….”
“애당초 50구역 마피아 따위 여기에서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군.”
“아니. 너희가 상대를 무시하는 거지. 너희는 지금 대륙급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 대기업의 사장을 만나러 가는 거야. 무슨 구멍가게 주인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란 말이야.”
태일의 단호한 말에 카츠미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알마티에는 수천 개의 길드(Guild)와 수십 개의 컴퍼니(Company)가 존재한다.
50구역 마피아 조직 전부를 합친다 해도 그 규모는 알마티의 중규모 길드 수준에 불과했다.
태일의 말을 들은 페이진이 원탁을 내려치며 외쳤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라도 사장 놈의 얼굴을 보면 그만이야! 제 놈이 나오지 않고 버텨?!”
“그랬다가는 LAPD 수천 병력이 널 그 자리에서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LAPD? 지금 장난해? 내가 그런 녀석들을…….”
“두려워해야 할 거야. 50구역의 LAPD와는 달라. 알마티의 LAPD들은 준군사조직이다.”
태일은 혁명군을 이끌던 당시 48구역, 즉, 알마티의 LAPD와 격돌했다.
놈들과의 전투는 혁명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였다.
당시 혁명군은 13개 레지스탕스가 연합해 최대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세연, 알렉세이 딘을 비롯해 수십 명의 1급 수배자가 속해 있고, 딘이 만들어 낸 온갖 무기들이 총동원되었다.
서쪽 대륙으로의 진격을 위한 관문, 알마티에 대한 공격은 그처럼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혁명군은 알마티의 LAPD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LAPD가 먼저 후퇴하긴 했으나, 알마티를 점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군의 피해가 엄청났으니 사실상 패배였다.
정규군도 아닌 경찰 조직이 혁명군의 진군을 막아선 것이다.
LAPD 후퇴 직후, 센트럴 정부에서 정규군 파견을 발표하자, 혁명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결국… 클라이드를 비롯한 간부들이 태일을 배신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태일은 페이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금 당부했다.
“알마티에서는 절대 LAPD를 건드리면 안 돼.”
분명 이쪽 세계는 태일이 살던 세계와 다르다.
기술의 발전 수준 역시 태일의 세계에 미치지 못하며, 소울의 활용 역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쪽 세계에는 메타휴먼이나 로보티안, 클론 등 변수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센트럴’이 존재한다.
센트럴이 존재하는 이상, 알마티의 LAPD는 결코 약할 리 없는 집단이었다.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뭘 어쩌자는 거지? 그냥 전부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응?”
심사가 잔뜩 꼬인 페이진이 태일에게 따져 물었다.
그때, 줄곧 침묵하고 있던 민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마티에는 지하가 있다. 일단 거기로 가 보는 건… 어때?”
민호는 제안하면서도 확신이 없는 듯 말끝을 불안하게 흐렸다.
“지하?”
카츠미와 페이진이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물었다.
“…….”
그러나 민호는 다시 입을 다문 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계 도시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알마티의 ‘지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태일은 어두운 얼굴의 민호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가 본 적 있나?”
“…한 번.”
민호는 짧게 대답할 뿐,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일은 충분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마티의 지하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태일은 선언하듯 말했다.
“난 바로 그 지하로 들어갈 생각이야.”
“…하아.”
민호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페이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보를 모을 수 있는 곳이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래. 알마티에 대한 온갖 정보를 모으기에 거기만큼 좋은 곳은 없어.”
태일의 대답에 카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지하로 가서 정보를 모은 뒤, 사장과 만날 방법을 찾으면 되겠군.”
두 사람은 도시에 흔히 존재하는 뒷골목이나 암시장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환락가에서 살아온 두 사람에게 그런 장소는 도리어 번화가보다 편안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의견이 모일 때 즈음, 조종대 중앙 계기판의 바늘이 흔들리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도착한 모양이군.”
페이진과 카츠미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강 지역은 알마티에서 좀 떨어진 숲이야. 아마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할 거다. 준비하도록 해.”
“나한테 명령하지 마.”
태일의 충고에 페이진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뒤, 조종실을 나가 버렸다.
카츠미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페이진의 뒤를 따랐다.
마피아 조직을 무시한 것에 대한 나름의 항의 표시일 것이다.
한편,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카츠미와 페이진이 나간 뒤, 조용히 물었다.
“지하에 가도… 정말 괜찮겠어?”
민호의 목소리에서는 망설임과 거부감이 묻어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태일 역시 알마티의 지하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따라갈 필요는 없어.”
태일의 말에 민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성능 좋은 방독면이 필요할 거다.”
“…그렇겠지.”
태일 역시 시무룩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마티의 지하는 평범한 뒷골목 따위가 아니다. 그곳은… 전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쓰레기장이자 시궁쥐들의 천국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