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비공정 다빈치 (2)
“제가 최대한 무사히 가져다 놓겠습니다.”
“…….”
프랑켄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지만, 녹스에 이어 비공정까지 보내게 된 딘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상이었다.
그런 딘의 옆에 선 장 영감이 등짝을 두드려 대며 껄껄 웃어재꼈다.
“허허허!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대 또 만들면 되잖나! 사내가 그렇게 쪼잔해서야! 내가 도울 테니까, 말만 하게! 더 멋지게 한 대 만들어 보자고!”
“이봐요, 영감님. 남의 물건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좀 말하지 마시죠!”
“에헤이, 이제 믿을 만한 조력자에 조수까지 생겼는데… 이득이지, 이득!”
거기에 라비까지 은근슬쩍 가세해 보태자, 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누가 내 조력자고 조수야?! 누구 맘대로?”
“어허, 설마 이렇게 병약한 노인내랑 아이를 쫓아낼 생각인가, 자네? 아구구, 허리야.”
“아오, 진짜! 거참, 치사하게! 밥만 꼬박꼬박 주면 임금 같은 거 안 받는다, 까짓것. 공짜네, 공짜! 우리가 나름 49구역 고급 인력이야! 필요한 물자는 다 조달해 올 수 있다고!”
억지를 쓰는 장 영감과 라비를 본 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이, 프랑켄! 거기서 뭐 해? 얼른 타라고!”
녹스의 외침에 프랑켄은 급히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다빈치 쪽으로 달려갔다.
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작동을 시작한 다빈치를 올려다보았다.
녹스는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딘을 바라보며 팔을 마구 흔들어 대는 중이고, 태일은 조종실 벽에 몸을 기댄 채 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정말이지.”
포트리스 전력의 80% 이상을 담당하던 녹스가 떠난다. 그 와중에 포트리스는 사막 한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골치 아프게 됐어.”
아마 지금쯤 놓아 보낸 스캐빈저 일당의 입을 통해 49구역 주민 대부분이 포트리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딘은 이마를 감싸 쥔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일과 눈을 마주쳤다.
“포트리스는 이전과 다른 역할을 해야 해.”
태일은 스캐빈저 일당을 살려 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스캐빈저 일당을 모조리 죽여 입을 막아도 포트리스의 존재 자체를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력을 다시 모아 멤브레인 안에 숨어들려면 최소 몇 년은 소울을 축적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포트리스는 수많은 이들의 표적이 될 터였다.
“버림받은 로보티안들을 이곳에 데려왔듯, 네 힘이 필요한 자들을 이곳에 모아. 그들이 너의 힘이 되어 줄 거야.”
지금껏 셸터의 비밀 기지로서 존재하던 포트리스였다. 그러나 셸터의 멤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서 방치되었고, 버려진 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수많은 오버테크놀로지 장비들과 기술력이 그저 녹스의 보호 아래 봉인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태일은 포트리스가 드러난 지금, 사람들을 모으라고 설득했다.
기술은 인간을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딘은 처음 그런 태일의 제안에 꽤 놀랐지만, 곧 자신이 데려온 로보티안들과 펑크 라이더들을 떠올렸다.
사막의 허술한 시설에 버려진 채 숨이 끊어지기만 기다리던 로보티안들.
엉성한 바이크에 목숨을 내맡긴 채 의미 없이 죽어 나가는 아이들.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하며 규칙 따위 사라진 땅.
포트리스의 힘과 기술력이라면, 그런 지옥에서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 새로운 터전을 일구어 나갈 수 있다.
우우우우우우웅!
천정의 가림막이 열리며 다빈치가 부유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다빈치를 지켜보던 딘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다빈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 영감과 라비를 바라보던 딘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일이 많겠어.”
포트리스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49구역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한편, 다빈치의 조종실에서 그런 딘의 모습을 바라보던 태일은 회중시계를 매만지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기술이라 해도 광부들의 손에 들리면 일손을 덜어 주는 폭약이 되고, 군인의 손에 들리면 무수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폭탄이 된다.
포트리스의 기술력 역시 양날의 검과 같기에 자칫하면 49구역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적인 미래로 인도할 수도 있었다.
‘괜찮겠지… 너라면.’
알렉세이 딘은 그저 기술의 개발에만 열을 올릴 뿐, 자신의 기술이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녀석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포트리스의 새로운 주인이 된 딘은 달랐다. 로보티안들의 생존을 위해 기술을 사용했으며, 그들을 위해 직접 싸우기까지 했다. 지금의 딘이라면 포트리스에 잠들어 있던 기술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에 태일은 포트리스를 세상으로부터 숨기려 하지 않았다. 포트리스를 다시 멤브레인 안에 은폐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태일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회중시계를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 * *
민호, 카츠미, 페이진.
50구역에서 온 세 사람은 다빈치 내부의 구조와 기술력에 감탄한 가운데, 곳곳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게 정말 가능한 건가?”
상공을 유유히 비행하는 와중에 흔들림은 물론, 소음도 거의 없다. 편안한 승차감 덕분에 멀미 역시 더는 겪지 않았다.
“세상에……. 저 아래 보이는 게 정말 49구역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광대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사막을 누비는 펑크 라이더의 모습이 마치 작은 점처럼 보였다.
“기가 막히는군. 당주, 돌아가서 이런 얘길 한다면 다들 날 미친놈 취급하겠지?”
“…아마 그렇겠지.”
사막 한가운데에 감춰진 요새와 요새를 지키는 로보티안 기계병들, 인간의 몸을 갖게 된 시스템 녹스와 하늘을 나는 비공정 다빈치까지…….
믿기 힘든 기술과 거짓말 같은 사건들을 연달아 겪다 보니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페이진은 도리어 놀라움 대신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이, 첫째. 넌 나름 셸터라면서 이런 기계 한 번 안 타 봤다는 게 말이 돼?”
“당시 간부들은 기술들을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고물 철도 따위 멈춰 선다 해도 이런 기술만 있으면 상관없을 텐데 말이야.”
당장 Z―rail에서 철도를 멈춰 세우는 바람에 50구역을 벗어나 고생을 하고 있었으니, 비공정을 보자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아마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술을 숨긴 거겠지.”
카츠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주, 그게 무슨 뜻이야? 이런 기술이 있다면 50구역도 지금처럼 답답하게 살 필요가…….”
“철도 이외에 다른 운송 수단이 생긴다면, 그걸 달갑지 않게 여길 게 누굴까?”
“…….”
“더구나 이런 기술이 전투에서 사용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무기를 모조리 동원한다 해도 이 비공정에서 떨어뜨리는 폭탄 하나 제대로 막아 낼 수나 있을까?”
카츠미의 말에 페이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나하나가 문명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기술로서 최소 몇 백 년은 앞서간 기술들이다.
카츠미 역시 정확하게 기술의 가치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경험하는 기술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직을 이끄는 보스가 된 이상, 그 모든 기술들이 조직과 집단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계산해야만 한다.
“철도 외에 다른 수단이 생긴다면, 당장 캐피탈 클럽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겠지. 더구나 비공정이 무기화될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센트럴이 그냥 둘 리 없어.”
결국 오버테크놀로지의 등장은 전쟁이나 파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맞는 말이야.”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셸터의 기술력은 쉽게 세상에 나올 만한 것들이 아니야. 그래서 간부를 제외한 조직원들에게는 꼭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는 공개되지 않았어.”
“일부 공개를 하긴 했다는 뜻이지?”
호기심 가득한 물음에 민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페이진과 카츠미에게 건넸다.
“이건 뭐지?”
기묘한 물건을 본 카츠미와 페이진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민호가 자신의 귀에 끼워져 있던 물건을 빼 손바닥 위에 올렸다.
“통신 장비야. 반영구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이 작은 게 통신 장비라고?”
페이진과 카츠미는 각자의 손에 올려진 물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고 동그란 물건에서는 묘하게 작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 각자 하나씩 갖고 귀에 끼워 둬. 내 채널과 맞춰 뒀으니,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나와 통신할 수 있어.”
철컥.
귀에 끼우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장착된다. 조금의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통신 장비라… 조금은 허무한데?”
한창 비공정과 요새 등을 본 입장에서 자그마한 통신 장비는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당장 무전기라면 50구역에서도 꽤 많이 사용되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러나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페이진과 달리 카츠미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이거, 통신 가능 범위가 얼마나 되지?”
“이 대륙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살아만 있다면.”
“…말도 안 돼. 농담이겠지?”
카츠미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50구역의 통신 장비는 대게 50구역을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쉽사리 전파가 차단되고 끊어진다.
전선망은 불안하기 짝이 없고, 범위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민호가 건넨 통신기의 의미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당장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 때, 빠른 정보 전달의 가능성에 따라 승패가 달라진다.
“이 물건, 몇 개 더 얻을 수는 없는 건가?”
“내가 가진 건 세 개뿐이야.”
민호는 짧게 대꾸했다.
“이걸 우리에게 건네줘도 괜찮은 거야? 너희 셸터에서 사용하던 물건이잖아.”
“그래. 얼마 전까지는 이 기기로 통신하던 녀석들이 있었지. 하지만 전부 목숨을 잃었어. 이제는 50구역에서 이 장비를 가진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
언뜻 쓸쓸하게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에 페이진과 카츠미는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손 위에 놓인 기기를 바라보았다.
민호는 마지막 남은 셸터의 잔당이었다.
50구역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카게구미의 전대 당주를 살해한 셸터. 그런 조직에 속한 민호를, 어릴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첫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카츠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 *
조종실 안.
녹스는 태일을 노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정말 말 안 할 거야?”
“…….”
“진짜 답답하네. 아까 그 말이 뭐냐니까? 다빈치의 초기 버전이라는 그 말. 그럼 알렉세이 딘이 다른 어딘가에서 다음 버전을 만들어 냈다는 거잖아.”
“그래. 지금은 없지만.”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지금 뭐 수수께끼라도 하자는 거야?”
태일의 무성의한 대답에 녹스는 골이 난 듯 발을 굴렀다.
“내가 아직 포트리스 시스템으로 보이나 본데, 난 인간이야. 아무리 X―7을 가졌다고 해도 이젠 내가 당신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네 복종을 기대한 적 없어. 네 말처럼 그럴 이유도 없고.”
“아오, 진짜!”
태일의 대답에 녹스는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처럼 볼을 잔뜩 부풀렸다.
태일이 너무나 능숙하게 다빈치를 조종하는 바람에 녹스는 제대로 된 협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투정이라고는 다빈치의 조종을 방해하겠다는 협박 정도였지만, 태일은 미리 파악한 듯 앞서서 경고했다.
“멋대로 따라온 건 아무래도 좋지만, 우리 일을 방해하진 마. 최소한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만약 방해한다면, 당장 바로 밑에 내려 두고 갈 거다.”
“흥, 나중에 도와 달라고 징징거리지나 마시지!”
녹스는 그렇게 화를 내고는 조종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태일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뒤, 녹스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프랑켄을 바라보았다.
“프랑켄, 네가 잘 관리해. 저 녀석 사고 못 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태일 씨.”
“뭐지?”
“정말 말해 줄 수는 없겠습니까? 대체 당신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언젠가는 말하고 싶어.”
태일이 조용히 바깥 하늘을 살피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나도 모르는 게 많아.”
자신이 온 세계와 이쪽 세계는 대체 어떤 관계인지.
자신이 어떻게 이쪽 세계로 오게 된 것인지.
세연과 딘을 비롯한 셸터 멤버들은 어떻게 세계를 넘나든 것인지.
태일 역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