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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9화 (90/220)

89화 녹스 (4)

“요새가 나타나자마자 문을 두드린 게 구걸하러 온 거지란 말이지?”

태일은 주저앉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소년은 겁에 질린 나머지 제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두드려? 아예 총을 쏴 대는 거 같던데?”

찡그린 채 포트리스 방벽을 살피던 딘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애당초 구식 총기 따위로는 딘이 설계한 방벽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럼에도 딘은 총탄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만인 듯 마치 똥 씹은 표정이었다.

“은폐장이 풀리지마자 벌레가 꼬이다니,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냐?”

“이제 겨우 시작일 텐데. 온갖 놈들이 네 물건을 노릴 거야.”

이전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알렉세이 딘의 발명품은 하나하나가 전 대륙 최고의 보물로 여겨진다. 그런 녀석의 거처가 사막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냈으니,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흥, 꿈도 크지.”

“맞아. 내가 그동안 그것들 지킨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듣고 있던 녹스가 발끈 성을 내며 작은 주먹을 휘두르자, 딘이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사달은 녹스 때문이었다. 인간이 되겠답시고 이상한 실험을 벌이는 바람에 귀찮은 일이 생긴 것이다.

한편, 스캐빈저는 멀찌감치서 요새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요새에서 나오는 이는 고작 세 사람. 셋 모두 비무장 상태다. 그중 한 명은 고작 10대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기상천외한 병기와 엄청난 규모의 군단을 상상하며 한껏 긴장했던 스캐빈저는 생각지 못한 상황에 한동안 눈을 껌벅거렸다.

특히나 백련을 무너뜨린 흉흉한 요새에서 웬 소녀란 말인가.

“대장, 저 중에 누가 사막여우일까요? 게다가 그 옆에 있는 여자애는 대체…….”

“사막여우 놈의 딸이겠지.”

“오, 예쁜데?!”

부하들 역시 의외의 모습에 놀란 듯 수군거렸다.

한편, 요새에서 나온 세 사람은 겁에 질린 막내에게 손조차 대지 않은 채 저희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긴장감이나 걱정은커녕 방금의 소동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얼마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캐빈저가 이를 부득부득 갈기 시작했다.

“사막여우, 이 자식. 우리를 무시하는 거군.”

“…예?”

“멍청아, 생각을 좀 해 봐. 우리를 얼마나 병신으로 봤으면 저렇게 맨몸으로 나왔겠어? 게다가 딸내미까지 데리고 나오다니!”

“듣고 보니 그러네요, 대장.”

“정말 셋 다 빈손인데요?!”

“총소리도 들었을 텐데, 이건 우릴 무시한 거야!”

“사막여우라는 놈, 너무 오만한 거 아닙니까? 저렇게 허술하다니!”

스캐빈저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덩달아 화가 난 듯 성난 얼굴로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스캐빈저 무리는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전투 중 버려진 전리품을 노린다.

‘비열한 하이에나’, ‘약아빠진 도굴꾼’…….

용병과 펑크 라이더들은 스캐빈저 일당을 비난하며 손가락질했다.

심지어 49구역 주민들 역시 시체에 손을 대는 스캐빈저 일당을 경원시했다.

그러자 스캐빈저 일당은 세력이 약해진 펑크 라이더 일당이나 마을을 습격하며 자신들의 잔혹함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전투에 패배한 직후의 펑크 라이더들이나, 경비가 허술한 마을을 습격해 모조리 도륙해 버리는 것이다.

저열한 짓이었지만, 열등감을 매우기 위한 나름의 대처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스캐빈저는 요새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셋을 재물로 삼을 생각이었다.

“저 망할 놈들이……!”

“전부 없애 버립시다, 대장. 저놈들 고작 셋이잖아?!”

“사막여우의 몸뚱어리는 뭐 강철로 만들어졌나? 마구 쑤셔 대면 제깟 것도 죽겠지.”

사납게 으르렁대는 부하들을 본 스캐빈저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그냥 물러날 수는 없지. 어이, 터틀!”

“예, 대장!”

“가서 전부 때려눕히고 살려서 데려와.”

“맞겨만 주십… 네? 살려서요?”

왜 그래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터틀을 본 스캐빈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내가 이런 것들을 데리고……!’

그러나 애써 끌어 올린 사기를 떨어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사막여우를 손에 넣을 수만 있으면 그 녀석이 만드는 무기는 다 우리 거잖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란 말이야. 그러니까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 알겠어?”

“네, 대장!”

터틀은 새삼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이크 위에 올랐다. 그러고는 짐짓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얘들아!!”

“오오!!”

곧이어 터틀을 비롯한 선발대 열 명이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는 요새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펑크 라이더들에 비해 제대로 싸우는 일이 드물지만, 수차례 패잔병들을 습격해 격파할 정도로 나름의 저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철저하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사막여우 일행을 잡는 일 정도는 그야말로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란하게 바이크를 달리던 중, 갑자기 주변의 땅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뭐, 뭐야?!”

“으아아아악!!”

바이크 몇 대가 갑자기 나타난 둔덕들에 부딪쳐 그대로 엎어지고, 라이더들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끼이이이이익!!

터틀 역시 놀란 나머지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갑자기 생겨난 둔덕 한가운데에서 튀어나온 팔이 터틀의 몸뚱어리를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잠시 뒤, 둔덕 속에서 붉은 안광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괴, 괴물이다아아아아!!”

터틀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입에 거품을 물고 말았다.

* * *

전투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아니,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꼴사나운 숨바꼭질에 가까웠다.

스캐빈저 당사자를 비롯한 펑크 라이더 무리 32명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붙잡혀 요새 앞에 무릎 꿇었다.

주변을 포위한 기계병들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펑크 라이더들은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잘도 이런 걸 타고 다녔네.”

녹스는 신기하다는 듯 펑크 라이더들이 타고 다니던 바이크를 살폈다.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진짜 고물이네?”

절반은 브레이크가 망가져 있고, 거의 전부 바퀴 바람이 빠져 있다. 엔진들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고, 차체를 조립한 나사들 역시 규격이 맞지 않아 큰 충격에서는 삼단 분리가 될 게 분명해 보였다.

심지어 기름이 새는 것마저 있으니, 그런 바이크들을 타고 아직껏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쇼. 저희는 그저 지나가다가…….”

“뭐? 물 한 모금만 달라고?”

“…….”

딘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스캐빈저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태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붙잡힌 이들을 바라보는 찰나, 문득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뚱뚱한 녀석의 허리에 끼워진 물건.

마치 계기판처럼 보이는 물건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태일이 뚱뚱한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스캐빈저를 비롯한 무리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러고는 계기판을 빼 들자 스캐빈저가 입을 딱 벌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그건 그냥 평범한 나침반…….”

“나침반?”

급히 둘러대던 스캐빈저가 태일의 표정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태일뿐 아니라 딘과 녹스의 얼굴 역시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것이다.

황동색의 시계 모형, 푸르게 뿜어져 나오는 빛,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계기판 바늘까지.

틀림없었다.

“로그(Log)가 어째서… 네놈들 손에 있는 거지?”

특정 장소를 기록하고 거기에 이르는 신호를 전달하는 물건. 언뜻 보기에 나침반과 비슷한 형태다.

태일이 가진 회중시계에 탑재된 장치의 원류가 된 알렉세이 딘의 작품이다.

“아, 그, 그건…….”

“어디서 얻은 거냐고 물었을 텐데!”

태일의 손에 들린 로그를 본 딘이 이를 뿌득 갈며 스캐빈저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듯 손을 움찔거리자, 기계병들 역시 거기에 반응한 듯 스캐빈저 무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히, 히익! 마, 막내가 우연히 주운 겁니다. 네! 그저 멋있어 보여서… 선생님들 물건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딘과 태일은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막내는 얼굴이 창백해진 가운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는 있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행자들이 쓰기 좋은 좌표계라고…….”

“좌표계?”

태일은 헛웃음을 터뜨렸고, 딘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긴 이 물건의 가치를 몰랐으니 대장이란 놈이 부하의 손에 이 보물을 맡겨 두었을 것이다.

로그는 알렉세이 딘의 표현에 따르면, ‘역대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로그의 의미는 그저 좌표를 찍고 그 장소로 인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로그의 특이점은 멤브레인 안쪽에까지 좌표를 남겨 둘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로그가 있다면 가공간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그건 곧 로그를 손에 넣을 경우, 걸어 다니는 포트리스처럼 아공간을 제멋대로 누빌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물건을 스캐빈저는 나침반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스캐빈저 일당이 멍청한 것은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센트럴이나 히트맨 따위의 손에 들어갔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한편, 딘은 어지간히 충격이 컸는지, 녹스를 향해 고함을 질러 댔다.

“어이, 녹스! 넌 대체 물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로그가 이런 놈들 손에 있지?!”

“뭐?”

한창 바이크들을 살피던 녹스가 고개를 돌려 딘을 노려본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관리를 못 했다고? 다시 말해 봐!”

딘은 격한 녹스의 반응에 다소 당황한 듯 움찔거렸지만, 천천히 말을 이었다.

“녹스, 이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나도 알아! 너한테 지식을 전달해 준 게 누구인지 벌써 까먹기라도 하셨나?!”

“…….”

“난 내 요새 밖으로 그 어떤 물건도 내보낸 적이 없어! 로그는 늘 딘이 직접 소유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 자식이 나가서… 나가서…….”

“…….”

그 결말은 태일도 알고 있었다.

알렉세이 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녹스를 버려 둔 채.

알렉세이 딘이 결코 몸에서 떼어 놓은 적 없던 물건을 엉뚱한 녀석들이 갖고 있는 것이다.

딘의 클론인 눈앞의 붉은 눈 남자는, 딘이 아니다.

녹스는 그대로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고, 딘은 한숨을 내쉬며 태일의 손에 쥐어진 로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 저희는 살려 주시는… 거죠? 로그인지 뭔지, 전부 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은…….”

스캐빈저가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 * *

회의실 안.

깜박이는 불빛 아래, 원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첫째라 불리던 민호, 꼴통이라 불리던 페이진, 사생아 카츠미.

12년 전, 성인식을 치른 아이들은 지하조직의 간부, 마피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페이진은 고작 몇 주 전 카츠미를 살해하려 했고, 카츠미는 조금 전까지 민호를 죽이려 했다. 얽히고설킨 인연 속에서 셋은 다시 12년 전 성인식 날로 돌아갔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페이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날, 그 골목에서 생존자는 없다고 했어, 분명.”

“레지스탕스가 나를 구했어.”

모든 범죄에 면죄부가 약속된 그날, 무법자들은 제멋대로 날뛴다. 그런 가운데 레지스탕스 활동 대원들 역시 나름의 작전에 나섰다.

무방비하게 남겨진 약자를 지키기 위해, 혹은 난동을 틈타 적을 암살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성인식이 끝나기 직전,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피비린내 나는 골목의 현장에 도착했고, 거기서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이끌던 하얀 늑대가 소년을 거두었고, 그날부로 ‘첫째’는 하얀 늑대의 죽은 아들, ‘민호’의 이름을 이었다.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어떻게…….”

카츠미는 말을 하다 말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눈뜬장님이었던 거군, 우리는.”

민호와는 몇 차례나 마주쳤지만, 그가 첫째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건 페이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이진과 카츠미는 12년 전의 성인식을 잊은 적이 없었다.

결투를 치러야 할 때면, 둘은 장난 같은 체스 게임 따위로 말없이 그날의 기억을 공유했다.

페이진이 카츠미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당시 떠올린 이름이 바로 첫째였고, 카츠미가 패배한 페이진을 뇌옥에서 꺼냈을 때 떠올린 이름 역시 첫째였다.

그처럼 두 사람의 관계에는, 두 사람의 행동에는 첫째라는 그늘이 언제나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첫째는 두 사람의 가까이에서 살아 있었다.

“그동안 네가 든 그 총으로 몇 명이나 죽였지?”

“수도 없이.”

그것도 이전과 달리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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