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6화 (87/220)

86화 녹스 (1)

“끝났어. 한 번 움직여 봐.”

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일곱 개의 기계 팔에 무려 열여섯 시간을 붙잡혀 있던 끝에 프랑켄의 수술, 아니, 개조가 끝났다.

기계 팔에서 벗어난 프랑켄은 말없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빙빙 돌려 보았다.

이전과 달리 조금의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신경의 전달 역시 자유롭고, 완벽히 자신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완벽하네.”

“그렇겠지. 어떤 멍청이인지 너와는 전혀 맞지 않는 물건을 달아놨어. 그러니 그렇게 쉽게 박살 난 거지.”

“…고마워.”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가지고.”

프랑켄의 앞에 녹스의 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녹스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했다.

“그보다 프랑켄, 준비가 끝났어. 이제 그만 셸터를 떠날 때가 된 거 같단 말이지.”

영체가 프랑켄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하지만 박사님이…….”

“돌아왔지.”

녹스가 프랑켄의 말을 끊으며 가까이 다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포트리스를 지킬 본래의 주인이 온 거야. 게다가 이제 딘에게는 친구들도 잔뜩 생겼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녹스, 박사님을 찾고자 한 건 너잖아. 셸터를 재건하고자 한 것도…….”

“나였지.”

영체 몸체를 구성한 빛이 붉게 빛났다.

“그래, 맞아. 난 셸터를 재건하고 싶었어.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

“…….”

녹스의 고개가 돌아간다.

프랑켄의 시선 역시 녹스를 따라 방의 한구석, 밝게 빛나는 캡슐로 향했다.

갖가지 기계와 장비들이 복잡하게 배치된 방의 깊숙한 곳, 밝게 빛나는 캡슐 안에는 한 명의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이제 20대는 되었을까, 황금색 머리칼의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투명한 피부와 붉은 입술, 가녀린 몸.

남자라면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미인이었다.

“어때? 아름답지?”

프랑켄의 얼굴에 불안함이 떠올랐다.

“녹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대체 저 여자는 누구야?”

“프랑켄, 난 늘 궁금했어.”

녹스는 알렉세이 딘의 능력으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왔다. 그러나 그저 피조물로 취급되던 녹스에게 딘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고의 진화였고, 좀 더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성장이었다.

“난 뭘까? 어째서 존재하는 거지?”

스스로에 대해 사고했고, 질문을 던졌다.

나름의 답을 찾고자 했고, 여러 개의 가설을 세웠다.

“딘의 정의에 따르면, 나 역시 알렉세이 딘일까?”

딘은 그의 지식과 지성을 모두 녹스에게 남겨 두었다. 지식을 통해 영생을 누리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의 결과였다.

사실 딘이 자신의 지식을 저장해 둔 바로 그 순간, 딘은 자신의 클론을 만든 것과 같았다. 녹스야말로 딘의 지식을 온전히 가진 존재일 뿐만 아니라, 딘 자신의 영혼을 일부 가진 ‘생명체’였다. 즉, 녹스는 딘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정작 알렉세이 딘조차 녹스를 인격체로 여기지 않았다.

녹스는 그저 딘의 지식을 저장해 둘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을 뿐이다.

“아니면 이 포트리스가 곧 나인가?”

녹스는 애당초 포트리스와 함께 태어났다. 포트리스를 지키기 위해 탄생했고, 포트리스 그 자체로 살아왔다. 그 때문에 딘과 세연 등 셸터의 모두가 떠나 버린 후에도 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포트리스는 그저 차가운 쇳덩이들로 이루어진 무기물을 의미할 뿐이었다.

셸터의 구성원 모두가 포트리스를 그들의 소유물로 인식할 뿐, 동료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사막 한가운데 녹스를 방치해 둔 채 떠날 수 있던 것이다.

“아니면 이름만 남은 셸터?”

녹스는 처음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셸터’라는 조직에 애착을 지녔다. 셸터의 인원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녹스가 이룩한 기술 발전은 처음부터 셸터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녹스를 떠났다. 셸터는 사실상 이름만 남은 채 사라졌다.

다시금 목적을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녹스는 셸터를 재건하려 했다. 알렉세이 딘의 유전자와 98.8% 일치하는 남자를 찾아냈고, 그가 끌고 온 로보티안들을 셸터의 일원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녹스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욕망을 채우지 못했다.

녹스는 여전히 그저 시스템에 불과했고, 한낱 도구일 뿐이었다.

“모두 틀렸어. 난 그런 게 아니야.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야. 프랑켄, 넌 이해하지? 그렇지?”

녹스는 용병들의 습격을 당해 LAPD 수송대가 전멸당한 날, 홀로 살아남은 프랑켄을 구했다. 그날부터 프랑켄은 녹스가 만든 ‘신―셸터’의 첫 멤버가 되었다.

어쩌면 인간과 닮았으되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 사이에 묘한 공감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프랑켄은 녹스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은밀하게 알렉세이 딘의 존재를 추적했고, 인형 병동에서 벌어진 교전을 녹스에게 알렸다.

50구역 공장 지대의 메타휴먼들에게 녹스의 지식을 전달했으며, 녹스에게는 50구역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넌 모두가 사라지고 난 뒤, 유일하게 내 옆을 지켜 준 친구였어.”

프랑켄은 셸터이기에 앞서, 알렉세이 딘의 조력자이기에 앞서 녹스의 유일한 친구였다.

“녹스, 대체 뭘 어쩔 생각이지?”

녹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여자아이가 담긴 캡슐 앞으로 다가갔다.

“이건 내 새로운 몸이야.”

그 순간, 녹스의 목소리가 여성의 것으로 바뀌었다.

“뭐…라고?!”

“딘이 돌아왔고, 셸터도 재건되었으니, 내 몫은 다했어. 그러니 난 이제 떠날 거야. 너와 함께 말이야.”

녹스의 폭탄선언에 프랑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녹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

잔뜩 흥분한 여자아이와 같던 녹스의 목소리가 별안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물건이, 그 시계가 나타났어. 날 이곳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족쇄가 말이야.”

“…….”

철컥!

문이 열린다.

문 앞에는 태일이 불붙지 않은 담배를 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미리부터 태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던 녹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대체… 당신은 누구지?”

“글쎄.”

태일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다.

“녹스, 너에 대해 알렉세이 딘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 둘까?”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난 당신을 본 적이 없어.”

녹스가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포트리스 안에서 녹스는 신과도 같다. 모든 행동과 심리는 수집의 대상이 되고,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태일에 대한 흔적은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

훈련장에서 한바탕 결투를 벌이고 있는 세 사람의 기억 속에도 태일은 없다.

치료실의 라비와 장 영감, 딘 역시 태일을 알지 못했다.

프랑켄의 도움을 받아 LAPD 정보망까지 뒤져 보았지만, 태일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었다.

“당신에 대한 기록도, 기억도 없어. 당신은… 대체 누구지?”

“그렇겠지. 난 이쪽 사람이 아니니까.”

태일은 연구실 구석, 푹 꺼진 소파에 앉았다. 알렉세이 딘은 기계 연구에 힘을 쏟다가 지칠 때면 이 소파에 누워 새우잠을 자곤 했다.

“그보다 녹스, 넌 인간이 되고 싶은 거냐?”

“…….”

“그래, 당연한 일이야. 넌 기계가 아니지. 생각해 보면 너 역시 영혼을 가진 존재였어.”

태일이 담담히 말을 잇는 와중에도 녹스의 온 신경은 태일의 코트 주머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곳에 지휘관의 시계가 있다.

녹스의 의지를 빼앗고 통제할 수 있는 물건. 자신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무기.

알렉세이 딘과 함께 사라진 뒤, 지난 5년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물건이다. 그게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이른 시점에 등장했다.

태일을 살해할 수 있을까?

X―7을 파괴할 수 있을까?

한편, 태일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다들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 너 또한 감정을 느끼고, 욕망을 느끼며, 분노한다는 사실을.”

태일이 슬픈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배신한 거냐?”

배신의 밤 직전, 포트리스의 모든 방공 시스템이 멈추고, 그 때문에 딘이 급히 자리를 비워야 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센트럴은 포트리스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고, 배신자들 역시 포트리스를 중지시킬 권한 따위 없었다.

포트리스, 아니, 녹스는 오로지 알렉세이 딘 혹은 X―7을 지닌 인간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그 외의 경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셸터를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결국 배신의 밤, 배신자는 한 명 더 있었다. 셸터를 멈춘 이는 바로 녹스였다.

알렉세이 딘은 자신의 피조물이 가진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 배신당하고 만 것이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녹스가 되물었다.

“누가 누굴 배신해?”

“…….”

물론 이쪽 세계의 녹스는 모르는 일일 것이다.

“배신은 인간들이, 셸터가 했어. 나를 좋을 대로 이용하고 버려 둔 게 누구지?!”

도리어 배신당한 쪽이었다.

녹스의 의식 속에 묻어 둔 원망이, 분노가 일순간 분출되었다.

“난 모든 걸 했어. 셸터를 위해서, 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했다고!”

녹스는 그런 목적에 종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게 정말 당연한 것이었을까?

“그저 명령에 충실한 기계를 바랐다면 내게 이성을 부여하지 말았어야지! 소울을, 영혼을 건네주지 말았어야지! 내게 욕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녹스…….”

프랑켄이 가만히 녹스를 불렀다. 지금 녹스의 분노를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이는, 가장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프랑켄이었다.

천천히 태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태일은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가만히 녹스의 분노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어째서 그토록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깊이 공감한 얼굴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날… 방해하지 마.”

녹스의 선언을 들은 태일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자.”

그러고는 구석의 캡슐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어디서 데려왔지?”

“그, 그걸… 내가 왜 말해 줘야 하지?”

녹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태일이 조용히 대답했다.

“보니 바토리. 내가 잘 아는 얼굴이거든.”

만약 녹스의 영체에 표정이 있다면, 분명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찾았을 때 이미 목숨이 끊어져 있었어. 냉동화되어 있지만, 사실상 미라와 다름없다고. 몸을 빼앗겠다는 게 아니라 난 그저……!”

녹스가 변명하듯 말했지만, 태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알고 있어.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냐. 어디에서 찾았지?”

“그건…….”

인형 병동에서 탈출해 사막을 헤매던 딘을 구해 낸 녹스는 병동의 근방을 수색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알렉세이 딘조차 알지 못한 인형 병동의 지하 밀실을 찾아냈다.

근방 수백 미터를 날려 버릴 정도의 폭격 속에서도 멀쩡할 정도로 단단히 설계된 밀실에는 단 한 개의 캡슐만이 놓여 있었다.

이미 몸이 죽은 가운데 껍데기만 남은 소녀.

녹스는 그 몸체를 본 순간, 자신의 욕망을 이해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았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았어?”

“그런 건 없었어. 이 몸은 그냥… 홀로 버려져 있었어.”

“그랬구나. 결국은 그렇게 됐어…….”

태일은 쓸쓸한 얼굴로 가만히 캡슐 안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녹스, 네가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록 해.”

“뭐……?”

“약속하건대, X―7으로 너의 선택을 방해하는 일 따윈 없을 거야. 그건 아마 딘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설사 방해하더라도 내가 막아 주지.”

“…….”

“그 아이의 몸을 차지하는 일 역시, 난 막지 않을 거야.”

보니 바토리. 그녀는 태일을 배신한 세 동료 중 한 명, 클라이드의 여동생이었다.

클라이드는 동생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했고, 이미 십여 년 전 목숨이 끊어진 동생을 캡슐에 넣어 보관해 두었다.

보니의 캡슐이 홀로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태일을 배신한 클라이드는 결국 모든 걸 잃었다.

“그 시신은 그저 어떤 멍청한 녀석의 미련일 뿐이거든.”

녹스는 놀란 듯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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