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4화 (85/220)

84화 포트리스의 기억들 (6)

“내 목을 가져가.”

첫째가 칼을 내려놓고 자신을 베라는 듯 앞으로 다가왔다.

성인식에서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이 공격을, 아니,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 했다.

싸움을 포기한 첫째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건 그 나이대의 소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공허였다.

지독한 심연과 마주한 카츠미와 꼴통은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둘 모두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칼을 찔러 넣는다면, 목을 벤다면 결코 첫째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둘 모두 도리어 그런 첫째를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난 마피아 따위 되고 싶지 않아.”

첫째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죽일 마음도 없고.”

더 이상의 미련도, 욕심도 없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 있다면, 결국 난 사람을 죽여야 할 거야. 아니, 아니지. 이미 죽였는지도 몰라.”

첫째의 시선이 카츠미에게 고정되었다.

처음부터 준을 죽이려 한 건 아니었다. 준뿐만 아니라 지금껏 자신을 공격해 온 이들은 전부 살려 보냈고, 자신은 그저 동생들을 지키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결과는 의도와 무관했다.

첫째는 ‘성인식’이라 불리는 지옥에서 동생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했지만, 그저 고아원의 소년으로 남기에는 지나치게 강했다.

“아무리 거부한다 해도 이 땅은 내게 살인을 강요하겠지.”

카게구미의 후계자인 준이 도전해 왔고, 이번에는 천중회의 꼴통이 첫째의 목을 노렸다.

고아원장은 누군가를 살해한 뒤, 마피아가 되기를 강요했다.

막다른 골목.

“피곤해, 이젠.”

첫째는 천천히 카츠미와 페이진을 향해 다가갔고,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한 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뒤쪽 지붕에서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안 돼!”

“형! 제발 그만둬!”

“으아아아앙!!”

울음소리와 함께 지붕 위에 숨어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칼을 든 채 거리로 나선다.

나약해 보이는 녀석들이 겁을 잊은 채 그렇게 골목에 나섰다. 첫째의 보호를 받던 아이들은 첫째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다.

“…됐어. 그만둘래.”

먼저 칼을 늘어뜨린 이는 꼴통이었다.

“재미없어졌어.”

카츠미 역시 준의 도를 늘어뜨렸다.

“저 또한… 그만두겠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죽인 건 첫째가 아니다. 준은 그저 첫째에게 오른팔을 잃었을 뿐이다.

“오라버니는 당신처럼 나약한 이에게 목숨을 잃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에게는 더 이상 용무가 없습니다.”

당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한 이는 바로 준, 그 자신이었다.

준은 자신이 사실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더 뛰어난 천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강하고도, 가장 두려운 적이었던 스스로를 이겨 내지 못했다.

“하아… 이번 성인식은 김이 새 버렸어. 선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쪽 내기는 나가리겠군.”

“…….”

꼴통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카츠미는 말없이 검을 회수해 검집에 넣었다.

공격을 멈춘 두 사람 앞에서 첫째와 페노제의 아이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성인식이 끝나기 약 한 시간 전, 셋은 전투를 멈추었다.

그러나 셋은 성인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인식은 투기장이다. 투기장에서 관중은 결코 검투사의 휴식을 바라지 않는다.

지이이이잉―

셋의 전투 장면에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 렌즈가 회전하며 지붕 위아래를 번갈아 살폈다.

카메라를 통해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원장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원장이 보건대, 첫째의 자질은 지금껏 보아 온 그 누구보다 압도적이었다.

이미 카게구미의 유력한 후계자를 꺾어 제 가치를 증명하지 않았던가.

만약 첫째가 페노제의 칼이 된다면, 페노제는 지금의 몇 배 규모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 해도 주인의 명에 따르지 않는 요검이라면 가치가 없다.

잠시 고민하던 원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나 역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지.”

원장은 시가를 입에 문 뒤, 중후한 철제 수화기를 들었다.

입에 문 코네티컷 셰이드(Connecticut Shade) 시가, 전화기 에릭슨 1001(Ericsson DBH 1001) 모두 역사 시대 말기에 사용하던 유물들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백여 년 전의 유물은 도리어 안전했다.

마니아만이 찾는 시가의 유통을 빙자하여 마약을 유통할 수 있었고, 구식 전화기의 폐쇄 통신망을 사용하면서 센트럴의 도청을 피할 수 있었다.

상대 쪽에서 누군가가 통신을 받는다.

“나요.”

상대편에서는 아무 말도 없다. 그런 상대를 향해 원장이 조용히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뭐가 최선인지. 이건… 당신에게 유리한 게임이야.”

원장은 상대방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수화기를 내렸다. 그러고는 카메라 너머의 첫째를 바라보았다.

제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운명을 거스르려 한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 * *

12년 전의 바로 그 자리.

민호와 페이진의 대치는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딸깍!

둘의 총알은 모조리 소진되었다.

페이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리볼버를 던져 버렸다.

페이진에게 있어 총기류는 탄을 모두 잃은 그 순간부터 거추장스러운 장식품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민호는 여전히 소총을 쥐고 있었다.

다만, 소총의 끝에는 대검이 끼워져 있다.

“총검술?”

“…….”

갖가지 무기와 총알이 풍부한 마피아들에게 총검술이란 무의미한 전투 기술이지만, 레지스탕스에게 총검술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악착같이 사람을 죽이려는 놈들이 최후에 쓰는 수단이지,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 같은 총기를 망가뜨려서라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집념의 산실.

페이진의 비아냥에 민호가 대검이 꽂힌 총기를 비스듬히 잡았다.

대검의 끝이 정확히 페이진을 향한다.

페이진은 역시 허리에 차고 있던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래, 재밌네. 어디 끝까지 해보자.”

페이진은 줄곧 12년 전 성인식 당시 만난 남자, 첫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배경도, 놈의 날렵함과 유연함도 첫째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총검술을 보는 순간, 페이진의 머리에 잠시 떠오른 의혹은 사라졌다.

모든 건 우연이 분명했다.

첫째가 총검술을 사용할 리 없다. 살인에 집착할 리 없다. 아니, 살아 있을 리 없다.

“간다!”

쾅!!

창의 형태를 이룬 소총의 대검 끝과 도끼날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맞부딪쳤다.

그 묵직함에 무쇠와 같던 페이진의 몸이 밀려날 정도였다.

민호는 저격수이지만, 동시에 근접전에서도 능숙했다. 게다가 묵직한 소총을 든 상태에서도 움직임이 날렵했다.

대검이 회수된 직후, 개머리판이 날아든다.

개머리판을 도끼로 쳐 내자, 횡으로 축을 옮긴 대검이 다시금 우측을 찔러 왔다.

마치 춤추듯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에 페이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낮췄다.

좌측으로 구르며 아킬레스건을 향해 도끼를 내려찍는다.

퍽! 퍽! 퍽!

연달아 쏟아지는 도끼질을 피한 민호가 공중제비를 돌며 뒤로 물러났다.

“젠장……!”

부드럽게 착지한 뒤, 거리를 벌리는 첫째… 아니, 민호.

지금의 이 장면은 데자뷔와도 같았다.

12년 전과 같은 전투가 그대로 필드 안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대검이 날아든다는 점만큼은 당시와 다르지만, 가벼운 몸놀림과 회피 습관은 틀림없이 첫째의 그것이었다.

“너, 첫째냐?”

“…….”

민호는 대답 대신 소총을 창처럼 비스듬히 꼬나잡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페이진은 공격 태세를 갖추는 대신 민호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아니, 어째서… 네가 레지스탕스에 있는 거지?”

레지스탕스는 단연코 50구역에서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지르는 조직이었다. 그들이 어떤 정의를 추종하든, 그들이 가장 많은 피를 부른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첫째가 그런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민호는 대답 대신 페이진을 향해 다시금 달려들었다.

“치잇, 젠장!”

페이진은 이를 악문 채 다시금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둘이 다시 격돌하려는 순간, 좌측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멈춰!”

카츠미, 그녀가 12년 전 그날처럼 골목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격돌이 멈추었다.

“당신, 첫째가 맞나?”

어설픈 존댓말로 첫째를 찾던 소녀는 당주가 되었다.

“첫째는 12년 전 그날, 죽었어.”

민호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살인을 극단적으로 피하던 소년이 총검술을 사용한다.

누군가를 지키던 소년이 테러 집단의 암살자로 활동한다.

살인을 혐오하던 소년은 50구역에서 가장 많은 피를 손에 묻힌 암살자가 되었다.

* * *

어째서일까?

“사, 살려 줘!”

“형… 컥!!”

대체 왜?

왜 동생들이 죽어간 걸까?

막 15세를 맞은 동생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 나갔다.

“그, 그만둬! 아직, 아직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는… 컥!”

다리를 다친 다섯째의 가슴팍에 칼이 박혔다.

“이런 빌어먹을, 도망쳐… 도망쳐, 얘들아! 으아아아아!!”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달려든 일곱째는 무참히 난도질당했다.

“어, 어째서… 어째서!!”

첫째와 카츠미, 꼴통의 전투가 끝난 직후, 까마귀 가면을 쓴 무리가 현장을 습격했다.

까마귀 가면들은 그때껏 첫째가 지키던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고, 그 와중에 가면 안쪽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킥킥, 킥킥킥.”

부상 때문에 귀환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폐기하기 위해 움직이는 성인식의 청소부, ‘폐기반’.

까마귀 가면을 뒤집어쓴 폐기반은 1, 2년 차 성인 마피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새내기 킬러들은 약자의 살해에 희열을 느끼며 날뛴다.

“멈춰…….”

분명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성인식이 진행되는 동안 성인은 개입하지 않는다.

원칙이 깨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원칙이 깨지리라 상상한 적조차 없었다.

“멈추란 말이야!”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첫째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폐기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채챙!

다섯이나 되는 까마귀가 첫째의 앞을 가로막은 채 발을 묶었다. 첫째를 죽일 마음은 없는 듯 치명적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놀리듯 주변을 맴돌며 전진을 막았다.

그 바람에 첫째는 눈앞에서 동생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대체 무슨 짓을……!”

“뭣들 하는 거야! 폐기반이 왜 벌써 나오는 거야?!”

카츠미와 꼴통 역시 눈앞의 잔혹한 광경에 놀란 나머지 고함을 내질렀다.

단 몇 분 사이에 첫째의 동생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곳곳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잠깐 사이에 주변 정리를 끝낸 폐기반은 첫째와 카츠미, 꼴통의 주변을 포위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렇게 비겁한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로 생각합니까? 당주께서 아신다면……!”

“한 사람.”

폐기반의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카츠미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싸워라. 너희 셋 중 단 한 사람만 살아서 나갈 수 있다.”

카메라 뒤쪽의 관객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싸움의 클라이맥스를 위해서 룰 따위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약해 빠진 아이들 몇 따위 살해당한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배팅장 역시 다시 열렸다.

그러나 검투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 마음대로?”

꼴통이 비딱하게 고개를 틀며 묻는다.

“당주를 제외하고, 감히 그 누구도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카츠미 역시 단호히 대답하며 검을 다시 뽑아 든다.

첫째 역시 이를 악문 채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어리석군.”

까마귀 가면의 뒤쪽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좋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녀석이 이긴 것으로 하지.”

첫째와 꼴통, 카츠미는 서로 등을 기댄 채 주변의 까마귀들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한 놈만 살려 둬라.”

명령과 함께 수십의 폐기반 까마귀들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