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3화 (84/220)

83화 포트리스의 기억들 (5)

투명하던 훈련장 필드의 유리막 내부는 결투의 시작과 함께 검은 암막에 뒤덮였다.

그 직후, 굉음이 들려오며, 필드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소형 홀로그램에 그대로 구현되었다.

철컥!

카츠미는 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다.

12년 전, 성인식 날. 바로 그날의 거리를.

그저 유사한 수준이 아니었다. 건물의 배치, 심지어 당시 공사 중이던 건축물까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이게 대체……!”

한편, 페이진은 자연스럽게 페노제의 영역이었던 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페이진 역시 그날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탕!

총성과 함께 거리에 들어선 페이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이젠 ‘레미제라블’이라는 가게가 들어선 바로 그 건물의 지붕.

민호가 저격 소총을 거치한 채 페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탕! 탕!

페이진의 리볼버에서도 불을 내뿜었다.

위치가 드러난 민호는 소총을 회수한 뒤, 지붕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사이, 민호의 소총 끝에는 대검이 꽂혀있었다.

총검술.

역사 시대 이후, 이미 오래전 실전된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은 복고주의자이자 늘 탄약이 부족한 레지스탕스뿐이다. 즉, 민호는 레지스탕스로 자란 남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익숙하게 12년 전의 지형을 이용하는 모습과 재빠른 움직임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럴 리 없어.’

탕! 탕! 탕!

다시금 페이진의 리볼버가 연달아 불을 뿜는다.

그러나 카츠미는 이미 홀로그램에서 눈을 뗀 채 캡슐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녀석이 첫째일 리… 없잖아.’

* * *

카츠미[勝美]는 사생아였다.

카츠미에게는 ‘성(姓)’조차 없었다. 사생아이기에 ‘우에스기’라는 성을 받지 못했다.

3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남은 가족이라고는 엄격한 할아버지와 양어머니, 배다른 오빠 ‘우에스기 준’뿐이었다.

언뜻 비극적인 삶을 상상할 법한 여건이지만, 정작 카츠미의 유년 시절은 그리 불우하지 않았다.

조용한 성품이던 양어머니는 카츠미의 존재를 불쌍히 여겨서인지 잘 돌봐 주었고, 준은 친동생처럼 여기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오른 다리를 축으로… 손목에 힘을 단단히 줘야 해. 그렇지!”

준은 카츠미의 검술 스승이었고…….

“뭐야, 다케다를 왜 그렇게 무서워 해? 하하하, 너무 미워하지 마, 카츠미.”

절친한 친구였으며…….

“넌 누가 뭐라 해도 무사의 핏줄을 타고난 아이야. 그러니 늘 당당해야 해.”

믿음직한 오라비였다.

무엇보다도 준은 뛰어난 무사였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부하들을 이끄는 리더십, 과감한 결단력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당주인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신들이 준에게 기대를 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준은 환락가의 무법자 세계를 종식시키고 50구역을 차지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기대는 준의 성인식 날, 완전히 무너졌다.

“방심한 게냐?”

당주 우에스기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숨긴 채 물었다. 성인식을 치르고 돌아온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싸늘했다.

“죄송합니다.”

15세 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흉계에 빠진 것이냐? 비겁한 수에 빠진 게야?”

우에스기는 설명을 요구했다.

이미 보고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

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후계자라 해도 성인식은 피해 갈 수 없다. 오히려 반드시 치러 내야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단련한 후계자가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에게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준은 성인 무사와 비견해도 지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었다.

성인식에서 준의 숙제는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느냐, 그것이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식이 끝난 지금, 준의 오른팔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준은 성인식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무사의 생명을 잃었다.

“나약한 놈.”

당주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꼴도 보기 싫다. 썩 나가거라.”

축객령을 내리는 당주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실망감, 그 이상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부하들이 모두 진의 패배를 보았다.

후계자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했다.

그 의미를 당주는 잘 알고 있었다.

준은 당주의 명령에 따라 묵묵히 집무실을 나왔다.

“오라버니!”

당주 집무실 문 앞에 서 있던 카츠미는 밖으로 나온 준을 위로하려 했다.

‘팔을 잃었다 해도 센트럴의 사이보그 기술이라면 새로운 팔을 얻을 수 있다.’

‘적응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준의 실력과 자질이라면 다시금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준의 눈동자를 보고 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시장에 진열된, 죽은 물고기의 눈이었다.

준은 아무 말 없이 카츠미의 옆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카츠미는 진심으로 준을 믿었다. 준이 다시 검을 들고 훈련을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다. 한 번은 실패했지만, 다음 성인식에서 설욕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준은 그날 밤, 스스로 배를 갈랐다.

남편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아들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양어머니 역시 준의 시신을 확인한 뒤,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맸다.

당주였던 할아버지는 며느리와 손자의 죽음 앞에서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카츠미의 일상은 준의 죽음과 함께 깨어졌다.

페노제의 ‘첫째’.

조용히 치러진 장례식에서 들은 원수의 이름이었다. 그가 준의 오른팔을 잘랐다고 했다.

심지어 놈은 죽이지도 않은 채 살려 보내기까지 했다. 준에게는 그런 온정이 더욱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장례식 이후, 열흘 동안 집무실의 문을 잠근 채 칩거에 들어간 당주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카츠미를 불렀다.

“오늘부로 네가 우에스기의 이름을 이어라.”

우에스기 카츠미.

그렇게 사생아는 성을 하사받았을 뿐 아니라 후계자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런 당주의 조치를 반기는 이는 없었다.

‘여자는 무사가 될 수 없다. 또한 무사가 아닌 자는 당주가 될 수 없다.’

‘사생아에게는 당주의 자격이 없다.’

‘카게구미는 무사의 조직이지, 우에스기 가문만의 것이 아니다.’

1년 사이 대장 몇이 반란을 일으켰고, 전부 실패하여 목이 달아났다. 살아남은 대장들 역시 당주의 죽음 직후,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사이, 사업 구역 상당수가 페노제와 천중회의 손에 들어갔다.

당주는 그럴수록 핏줄에 대한 집착을 보이며 하나 남은 손녀, 카츠미를 모질게 훈련시켰다.

“그 누구도 너를, 우리 우에스기 가문을 얕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네가 더욱 강해져야 한다. 알겠느냐?”

“네, 당주님.”

그리고 카츠미는 두말없이 훈련에 임했다.

우에스기의 혈통, 무사의 가치… 사실 카츠미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검을 쥔 카츠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단 하나, ‘복수’만이 있었다.

준의 팔을 자른 원수, 페노제의 첫째를 향한 분노뿐이었다.

12년 전 성인식.

당시 카츠미는 13세였고, 준이 목숨을 잃은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성인식을 치르기에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카츠미는 남몰래 임청각을 빠져나왔다.

첫째는 이미 20세. 이번 기회를 놓치면 성인식에서 그를 영영 벨 수 없었다.

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인식에서 그의 목을 잘라야만 한다.

그렇게 임청각을 나온 카츠미의 손에는 준이 생전에 사용하던 도검이 들려 있었다.

평소와 달리 어두침침한 거리에는 빛 한 줄기 없었다.

“으아아악!!”

고요한 와중에 드물지 않게 비명이 들려왔고, 그 뒤에는 어김없이 피 냄새가 풍겼다.

고아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사냥에 나서거나 숨어 있었다.

카츠미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었지만, 그래 봐야 서투르고 어설픈 애송이에 불과했다.

카츠미가 마음만 먹는다면 성인식에서 수십 명을 베는 것 따위 쉬운 일일 것이다.

‘오빠도 마찬가지였겠지.’

준은 약한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강한 이의 목을 전리품으로 취하려 했고, 패했다.

카츠미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교전을 피하며 페노제의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미로 같은 길을 헤매다 보니, 금세 한 시간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당주를 비롯한 가신들이 카츠미의 일탈을 눈치챘을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골목을 헤매던 중 무딘 칼날의 파공음과 무언가 어지럽게 휘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전투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이와 그런 공격을 부드러운 동작으로 회피하는 이.

공격하는 쪽은 철저하게 목과 옆구리, 아킬레스건을 노렸고, 땅바닥을 구르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피하는 쪽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칼의 궤적을 읽어 냈으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공격을 피했다. 마치 춤추듯 동작을 연계하고 있다.

둘의 실력은 이미 아마추어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였다.

전투를 지켜보며 카츠미는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둘 중 한 명이다.’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한창 싸움 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당신들 중 ‘첫째’라 불리는 분이 계십니까?”

겸손한 말투에 둘 모두 놀란 듯 바라본다.

카츠미에게 ‘예의’를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준이고, 원수를 갚는 현장에서도 준의 가르침은 충실히 이행되어야 했다.

“넌 또 뭐야?”

“첫째라는 분 외에는 볼일이 없습니다.”

“나를 찾는 건가?”

줄곧 공격을 회피하기만 하던 남자, 그가 바로 첫째였다.

준의 도검을 꺼내 그 끝을 첫째에게 향했다.

“당신의 목을 가지러 왔습니다.”

“넌 또 뭐야?! 내가 먼저야!”

카츠미에 앞서 첫째를 노리던 꼴통이 성을 냈지만, 카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첫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조악한 칼에 비해 카츠미가 쥔 검은 우에스기 가에서 후계자에게 전해 내려오는 명검이었다. 긴 리치를 차치하더라도 가볍고 날카롭다.

첫째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은 그만큼 재빠르고도 매서웠다.

그러나 첫째는 카츠미의 검을 가볍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는 대신 곧바로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첫째의 회피 기술과 움직임 연계는 그야말로 동물적인 감각에 가까웠다.

“큿!”

유연하게 피함과 동시에 가까이 파고드는 첫째의 모습에 당황한 카츠미는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축이 되는 발을 바꾸며 몸을 틀었다.

그사이, 첫째의 칼이 살아 있는 뱀처럼 궤도를 만들며 카츠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고작 한 수.

그 한 수에 카츠미는 완벽히 승기를 빼앗겼다.

수초 사이에 카츠미는 어깨를 내준다는 각오를 다지며 몸을 회전시켰다.

어깨를 내주더라도 그 칼을 잠시 잡아 둘 수 있다면, 놈의 목을 벨 수도 있다.

그러나 첫째의 칼이 다시금 방향을 바꾸었다.

챙!

그의 칼이 준의 검신을 때린다. 더불어 카츠미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몸체가 뒤로 밀려났다.

첫째의 공격은 카츠미를 뒤쪽으로 밀어냈다. 단지 그뿐이었다.

카츠미는 첫째의 맥 빠지는 공격에 당황한 나머지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그것은 애당초 공격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완벽히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그저 가볍게 밀어내는 행동. 준이 카츠미와의 훈련에서 가끔 보여 주던 방식이었다.

그것은 훈련이거나 장난이다.

“대체 무슨 짓을……!”

“너야말로 뭐 하는 거지, 꼬맹이?”

채챙!

“크윽!”

갑작스럽게 날아온 공격을 막아 낸 카츠미의 몸이 저만치 밀려났다.

첫째를 노리던 꼴통이 카츠미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끼어들지 마! 네 눈에는 지금 이게 소꿉놀이처럼 보이냐?!”

한 차례 매서운 공격으로 카츠미를 밀쳐 낸 꼴통이 다시금 첫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마! 싸우란 말이야, 이 새끼야!”

꼴통이 발악하며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어지럽게 펼쳐지는 칼의 궤적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꼴통은 변칙적으로, 본능적으로 칼을 썼고, 그만큼 공격의 위치와 방향성은 무차별적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그런 공격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흘릴 뿐만 아니라 틈틈이 카츠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싸울 이유는 없어.”

“지랄하네!”

첫째는 실력자다. 어째서인지 공격에 소극적이지만, 그는 분명 카츠미와 꼴통보다 우위에 있었다.

준의 오른팔을 벨 정도의 남자라면, 마땅히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카츠미는 이를 악문 채 검을 고쳐 잡은 뒤, 둘의 교전에 다시금 끼어들었다.

수십 분 사이, 세 자루의 칼날이 정신없이 맞부딪쳤다.

“끼어들지 말라고!”

“저 사람의 목은 제 겁니다.”

“망할 꼬마가……!!”

카츠미는 꼴통의 항의를 무시한 채 첫째의 목을 겨누었고, 꼴통 역시 이를 악문 채 첫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사이, 카츠미와 꼴통은 서로를 밀어내고 공격을 방해했기에 전투는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첫째는 카츠미와 꼴통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내며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쿵!

크게 발을 굴러 벽 근처까지 물러난 첫째가 입술을 깨문 채 둘을 바라보았다.

잠시 전투를 멈춘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묻는다.

“너희는 뭐지? 대체 왜 나를 그렇게까지 노리지?”

“우에스기 준.”

카츠미의 한마디에 첫째와 꼴통의 표정이 변했다.

“제 오라버니입니다.”

“뭐, 뭐야?! 너 우에스기 가문 녀석이었냐?!”

꼴통의 호들갑에도 카츠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작년, 당신에 의해 오른팔을 잃은 오라버니는 자결을 택했습니다.”

“…그랬군.”

첫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내려놓았다.

“무슨 짓을?!”

“너 이 새끼, 뭐 하는 거야?”

“내 목을 가져가.”

첫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했다.

첫째의 눈은 마치 성인식을 치른 직후, 당주의 방을 나오던 준의 그것과 같았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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