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포트리스의 기억들 (4)
키릭, 키릭.
리볼버의 실린더를 여닫으며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거리를 걷는 와중에도 페이진의 모든 감각은 주변 곳곳에 뻗어 있었다.
상대는 저격용 소총을 주로 다룬다. 아마 건물 어딘가의 지붕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저격수는 숨어서 적을 겨눌 때 가장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하지만, 자신의 위치가 적발된 바로 그 순간부터 불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놈이 숨어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필드가 넓긴 하지만, 복잡하지는 않다.
그래 봐야 숨을 수 있는 곳은 골목길 안쪽이나 지붕 위쪽 정도일까. 더구나 사격을 위해 각도를 감안한다면, 답은 어딘가 지붕 위에 자리 잡고 있을 터였다.
“어이! 쥐새끼처럼 계속 숨어만 있을 건가?”
짐짓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상대 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몇 분을 걸었을까?
걷다 보니 알 것 같았다.
‘그래, 이제야 알겠군.’
낮은 지붕, 정비되지 않은 건축물들, 판잣집들이 가득한 골목까지.
지금 걷는 환락가의 거리는 현재의 환락가가 아니다. 정확히 12년 전, 페이진이 성인식을 치른 바로 그 거리였다.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과거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페이진 역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바로 이 거리에서… 놈을 만났다.
탕!
* * *
12년 전, 천중회의 선배들이 고아원을 찾아왔다.
성인식이 있기 전날이면 마피아가 된 선배들이 선물을 사 들고 찾아온다.
평소 맛보기 힘든 비싼 요리와 장난감, 깔끔한 옷이 고아원 아이들에게 주어졌다. 물론 그건 단순한 호의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다음 날 벌어질 ‘게임’에 대한 관람료와 같았다.
고아원 아이들은 말쑥한 차림으로 선물을 싸 들고 찾아오는 선배를 보며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페노제 쪽 ‘첫째’라는 놈은 건들지 마라.”
선배들은 성인식을 앞둔 아이들에게 같잖은 조언들을 건넸다.
“첫째? 이름이 첫째입니까?”
“그래. 그 또라이 자식들은 애들한테 이름도 제대로 안 붙여 주거든. 들어온 숫자대로 이름을 붙인다니까?”
“…….”
차라리 그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천중회 쪽에서는 아이들에게 장난식으로 욕설과 다를 바 없는 이름을 붙이곤 했으니까.
“어이, 꼴통! 난 이번에 너한테 걸었어. 그래서 해 주는 조언이니까 새겨들어.”
소년은 고아원에서 ‘꼴통’이라 불렸다.
꼴통은 15세에 이미 선배들을 압도하는 칼솜씨와 담력을 가졌고, 몸집만 보아도 이미 웬만한 성인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꼴통은 성인식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그 첫째라는 놈이 그렇게 셉니까?”
“세지. 지난 5년간 최고의 유망주였으니까.”
“5년간요? 그렇게 오랫동안 성인식을 치렀다는 겁니까?”
“그래. 그 자식, 약한 놈들을 지키면서 몸을 사리고 있었거든.”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그 자식, 성인식 내내 임무 따위 집어치우고 겁쟁이들이나 지키고 있었어.”
“…….”
“한편으로 보면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는 놈이긴 하지. 놈이 보호하는 꼬마들을 노리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올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해 주는 선배는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꼴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응?”
“선배는 저한테 걸었다고 하셨죠?”
“어? 그, 그랬지.”
꼴통은 선배의 어색한 표정을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함께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선배다. 꼴통의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가 굳이 첫째 이야기를 해 주는 까닭이 뭘까?
이건 첫째를 찾아서 없애 보라는 도발이다.
“첫째 모가지는 제가 따겠습니다.”
내기의 내용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성인식이 시작되자 환락가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어둠이 내렸다.
바로 작년까지 고아원에 갇혀 이 밤을 보내는 게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실력도 떨어지는 머저리들이 먼저 조직에 들어가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야 한다는 게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꼴통에게도 기회가 왔다.
“다들 떨어지지 마! 집단으로 뭉쳐 다녀야 유리하다.”
“아, 아무것도 안 보여…….”
“소리 내지 말고!”
작년에 운 좋게 살아남은 겁쟁이들과 처음 성인식에 참여한 아이들이 저희끼리 모여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칼을 꼬나잡은 꼴통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 어어? 야, 꼴통! 어디가?!”
“혼자는 위험하다고, 인마!”
뒤에서 놀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어설프게 방해되는 애송이들을 끼고 다니느니, 혼자 싸우는 편이 낫다.
환락가는 사거리를 중심으로 세 개 조직의 구역이 어설프게 나뉘어 있었다. 꼴통은 곧바로 대로를 내달려 페노제의 영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꼴통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페노제의 ‘첫째’라는 놈이었다.
오래지 않아 페노제 쪽 가게 앞쪽에서 어슬렁거리는 놈을 하나 발견했다.
“뭐야? 거기 누구야? 도망치는 거냐?”
설마 다른 조직의 아이가 벌써 페노제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상대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꼴통이 당연히 자신들 쪽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꼴통은 말없이 몸을 낮추고 내달렸다.
“뭐, 뭐야?!”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꼴통의 모습에 놀란 상대가 황급히 칼을 치켜올렸지만, 손발이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듯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푹!
“으흑!”
꼴통은 빈틈투성이인 놈에게 접근해 팔뚝에 칼을 쑤셔 박았다.
쨍그랑!
꼴통에게 공격당한 소년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유일하게 들고 있던 무기인 칼을 허무하게 떨어뜨렸다.
“아, 아아…….”
“어이, 너, 페노제냐?”
“아, 아파!!”
꼴통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대로 칼의 손잡이를 돌려 상처를 헤집었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통증에 상대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 댔다.
아마 이 정도면 페노제 구역에 있는 모두에게 들렸을 것이다. 꼴통은 아직 쓸모가 있는 녀석을 쉽게 죽일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 성인식의 통과 징표로 이런 머저리의 목을 가져간다는 건 면이 서지 않았다.
“쉿, 안 죽여, 네가 내 말에 답만 잘하면.”
“흐, 흐흑…….”
“너, 페노제냐?”
놈이 울먹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첫째라는 녀석, 알아?”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좋아, 어디에 있지?”
“그, 그건 나도 잘… 아악!!”
꼴통이 칼을 빙글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지, 그 대답이 아니야. 모르면 장땡이야? 잘 생각해 봐야지.”
“지, 지붕…….”
“응?”
“지붕 위에 있을 거야. 지붕 위에 숨어서…….”
“흐음.”
문득 첫째가 약한 녀석들을 보호한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지붕 위는 여러모로 안전한 곳이다. 지붕에 좀처럼 오를 녀석이 없기도 하지만, 시야 확보를 위해서도 높은 곳은 유리하다.
하지만 주변에는 건물들이 너무 많았다. 지붕 위를 일일이 뒤지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다.
잠시 생각하던 꼴통이 히죽 웃으며 공포에 질린 포획물을 바라보았다.
“이봐, 너 목소리가 꽤 크던데.”
“제, 제발 살려…….”
“살려 줄게, 살려 준다니까. 네가 힘껏 고함을 질러서 첫째를 불러내기만 하면 돼.”
“그, 그런……!”
자신 없는 그의 목소리에 꼴통이 히죽 웃어 보였다.
“누가 너더러 선택하라고 했어?”
그러면서 칼을 뽑아 다시금 놈의 허벅지를 찔렀다.
“으아아악!!”
사냥감이 나오지 않는다면, 불러내면 된다.
페노제의 영역 깊숙한 곳.
“안 나오면 재미없을 거다! 어?!”
꼴통은 덤비려면 덤벼 보라는 듯 당당하게 고함을 질러 댔다.
그 와중에 사로잡은 사냥감의 상처를 헤집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혀, 형! 제발, 제발 살려 줘!”
“작아! 더 크게 소리 질러! 그래야 놈한테 들릴 거 아냐!”
“아아아아악!!”
“젠장, 왜 안 나와?”
꼴통도 슬슬 짜증이 치미는 참이었다.
벌써 성인식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성인식은 해가 지고 난 뒤, 9시부터 12시까지 단 세 시간 동안 진행된다. 12시가 넘으면 8월 29일이 끝나고, 면죄부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널 끌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상처 입은 약자를 갖고 노는 것은 꼴통의 입장에서도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깔끔히 숨을 끊어 주는 편이 낫다.
“아, 아아…….”
“단번에 끝내 줄게. 괴롭혀서 미안했다.”
칼을 고쳐 잡고 그대로 놈의 목에 가져다 댄다.
그러고는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잠깐.”
멀쑥한 키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혀, 형!”
“다섯째, 괜찮아?”
“흑…….”
“네가 첫째냐?”
“동생을 놔줘.”
“질문에 대한 답부터.”
꼴통이 히죽 웃으며 칼을 포로의 목덜미에 더욱 깊숙이 가져다 댔다.
순간, 상대가 터무니없는 속도로 꼴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쨍!
그대로 포로를 저만치 던져 버린 뒤, 상대의 칼을 맞받아쳤다.
손에 울리는 묵직한 칼의 감각.
알 수 있다.
“맞구나, 너. 첫째지?”
그러나 정작 꼴통을 향해 매섭게 공격해 온 첫째는 칼을 거둔 채 다친 동생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니?”
“형, 미안해. 흐윽… 나는…….”
“조금만 힘내. 저 뒤쪽에 일곱째가 기다리고 있어. 갈 수 있겠어?”
다섯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상처를 감싸 쥔 채 비틀거리며 뒤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 순간, 첫째의 뒤쪽으로 칼이 날아들었다.
챙!
“이거, 진짜 듣던 거보다 미친놈이네. 싸움 중에 한눈을 팔아? 이 나를 두고?!”
부드럽게 몸을 돌려 칼을 쳐 낸 첫째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만 물러나라. 난 싸울 마음이 없어.”
“누구 마음대로?”
꼴통은 첫째의 목덜미, 옆구리, 낭심 부위를 연달아 노리며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명중한다면 단박에 치명상에 이를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검을 피하며 꼴통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사이, 몇 번의 기회가 있음에도 꼴통의 몸에 첫째의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 자식이!”
성이 난 꼴통은 그대로 바짝 몸을 낮췄다. 사실상 땅을 기다시피 바짝 낮춘 자세였다.
키가 큰 녀석들은, 더구나 경험이 부족한 녀석들은 허리 아래로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들에, 땅을 구르며 악착같이 달려드는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칼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콱! 콱! 콱!
땅을 기다시피 하며 첫째의 아킬레스건과 무릎, 발등을 노렸다.
그러나 첫째는 몇 차례 뒷걸음질하다가 그대로 몸을 날려 공중을 돌았다. 마치 새처럼 떠올라 공중제비를 도는 첫째의 모습에 꼴통은 이를 갈고 말았다.
“젠장!”
부드럽게 착지한 뒤, 거리를 벌린 첫째가 담담하게 말했다.
“천중회의 기대주라는 녀석이 너겠지?”
“…….”
“네 실력이라면 성인식을 치르는 데 무리가 없겠지. 하지만 우리 애들은 건드리지 마라.”
“위선자 새끼.”
꼴통의 차가운 한마디에 첫째가 입을 다물었다.
“동생들 죽는 꼴은 못 보겠고, 네 손에 피를 묻히기도 싫다, 이거지? 그러니까 날더러 다른 놈을 대신 죽이라는 뜻이잖아?”
“…….”
“약속하지. 네놈이 승부를 피하면 난 네 동생들을 전부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야. 찾기도 쉽잖아? 둘째, 셋째, 넷째… 순서대로 전부 목을 따서 진열해 주지.”
“너…….”
“날 막고 싶어? 그럼 날 여기서 죽이든지, 내 손에 죽어.”
어둠 속에서 첫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꼴통이 다시금 달려들려는 찰나.
“한창 싸움 중에 죄송합니다만…….”
좌측 골목 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당신들 중 ‘첫째’라 불리는 분이 계십니까?”
성인식의 잔혹한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높임말. 무엇보다도 아직 앳된 여성의 목소리에 첫째와 꼴통 모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넌 또 뭐야?”
꼴통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여자아이.
“첫째라는 분 외에는 볼일이 없습니다.”
“나를 찾는 건가?”
첫째의 대답에 소녀가 천천히 옆구리에 찬 검을 빼 들었다.
챙!
성인식에서 사용되는 조악한 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도검이다.
“당신의 목을 가지러 왔습니다.”
소녀의 모습을 본 첫째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동시에 꼴통은 고함을 내질렀다.
“넌 또 뭐야?! 내가 먼저야!”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