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포트리스의 기억들 (2)
태일이 라비를 따라 병실에 들어가기 직전, 딘이 태일을 멈춰 세웠다.
“이봐, 잠깐 멈춰 봐.”
“뭐지?”
불만스럽게 태일을 바라보던 딘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역시 안 되겠어. 신태일 씨, 그쪽은 그냥 회의실로 가 있어.”
“…….”
“뭐, 뭐야? 그걸 왜 당신 맘대로 정해?”
정작 태일은 침묵했지만, 라비가 뱁새눈을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 당신?”
“할아버지랑 나를 살린 게 이 아저씨야. 난 오히려 당신을 못 믿는다고!”
“이 꼬맹이가……!”
회의실에 있던 태일을 끌고 나온 이는 라비였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와중에 그나마 전투 중 장 영감과 자신을 구해 준 일 때문에 태일을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태일은 둘의 유치한 말싸움을 제지한 뒤, 딘을 향해 물었다.
“이유가 뭐지?”
“우리 의사가 인간을 무서워해.”
“…….”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 탄압받던, 그래서 부서진 몸뚱어리로 병동에 방치되었던 로보티안이다.
인간에게 본능적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당신처럼 무뚝뚝하고 반말 찍찍 퍼붓는 왕재수를 보면 벌벌 떨면서 울음이라도 터뜨릴걸?”
“…….”
악의 가득한 딘의 말에 태일은 물론, 라비마저도 잠시 침묵했다.
라비가 태일을 보며 슬쩍 물었다.
“아저씨, 저 사람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글쎄.”
아마 DNA에 각인된 감정일지도 모른다.
딘과는 친구 사이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악우(惡友)에 가까웠다.
“그보다 너, 그 말 하면서 죄책감 같은 거 안 드냐?”
‘무뚝뚝하고’, ‘반말 찍찍 퍼붓는’, ‘왕재수’.
하나같이 정확하게 알렉세이 딘을 표현하는 단어들이었다.
딘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태일의 앞을 막아섰다.
“어쨌든 당신은 안 돼. 그니까 그냥 돌아가 있어.”
“조심하도록 하지.”
태일은 짧게 대답한 뒤, 딘을 밀쳐 내며 병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어, 어어… 이봐! 야!”
밀려난 딘이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태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잠시 뒤.
“신태일이라고 합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딘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아, 아니에요. 뭘요.”
신사적인 태일의 태도에 이네사의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녀에게 겁먹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도리어 소녀처럼 얼굴까지 붉히고 있다.
“아니, 뭐 저런……?!”
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라비 역시 태일의 180도 달라진 모습에 어지간히 놀란 듯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와! 보기보다 뻔뻔하네, 저 아저씨.”
라비가 본 태일은 아예 기계처럼 느껴질 정도로 감정 표현이 적고 차가운 인간이었다.
전투 중 닥치는 대로 번개를 쏘아 대던 남자가 따뜻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구는 모습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편, 뒤쪽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장 영감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오오, 역시! 자네가 사막여우인가? 아까 그 번개 능력부터 범상치 않았지. 그래, 이 모든 테크놀로지의 근원은 역시 막대한 에너지이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아오, 하여튼 주책…….”
라비는 해맑게 외치는 장 영감의 모습에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장 영감의 부상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눈물까지 보였건만, 정작 깨어난 장 영감의 행동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 와중에 ‘사막여우’ 알렉세이 딘은 단단히 열을 받았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태일은 황당해서 화조차 내지 못하는 딘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가장 환영받는 건 그쪽 같은데, 회의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아.”
“뭐 이런……!”
예나 지금이나 딘은 태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 * *
[맥주가 더 필요하십니까?]
“아, 그래! 그거 좋지. 한 병 더 부탁해.”
카츠미와 민호 사이에서 어색하게 맥주만 들이켜던 페이진은 빈 병을 회수하러 온 로봇이 묻자 반가워하며 급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페이진은 맹물과 다를 바 없는 맥주 대신 독주를 주문하려 했지만, 석상처럼 굳어 있는 카츠미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됐어. 그냥 맥주로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모처럼 불편한 침묵을 깨 준 로봇이 회의실을 나가 버리자, 페이진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태일과 딘이 자리를 비우고, 녹스의 영체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금, 카츠미와 민호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고 있었다.
카츠미는 맥주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살기 어린 눈으로 민호를 노려보는 중이고, 민호 역시 보란 듯이 자신의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카게구미의 당주를 살해한 셸터의 일원, 그리고 카게구미 당주의 후계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벌써 누군가의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당주, 차라리 나가지. 요새나 좀 살펴보자고.”
어떻게든 둘을 떼어 놔야겠다는 생각에 페이진이 급히 제안했다. 그러나 카츠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민호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민호라고 했나?”
“…….”
“레지스탕스에 셸터까지… 꽤 험한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전투에는 자신이 있나?”
“그럭저럭.”
민호는 피식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민호가 적당히 굽히기를 바란 페이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 자식이……!’
카츠미가 검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결투, 해 본 적 있나?”
“당주!”
말이 좋아 결투이지, 이건 숫제 ‘널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민호는 가소롭다는 듯 턱을 치켜올리며 쏘아붙였다.
“그런 어린애 놀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이 목숨을 건 실전이지.”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마피아에게 있어 결투란 그 무엇보다 경건하고 중요한 의식이다.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며 그 결과에 승복한다. 그 한 가지 원칙 아래서 오랫동안 행해진 결투는 곧 마피아의 명예이며 정체성이었다.
그런 결투가 민호의 혀끝에서 한낱 ‘어린애 놀음’으로 매도되어버렸다.
“하, 하하… 하하하!”
짝, 짝, 짝!
카츠미를 말리던 페이진이 박수까지 쳐 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네, 아주 재밌어.”
그러나 정작 페이진의 웃는 얼굴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민호는 카츠미뿐 아니라 마피아 전체를 모욕했다.
페이진 역시 그런 도발을 그냥 넘길 정도로 대인배는 아니었다.
“시장에서 굴러먹던 쥐새끼 주제에 입은 살아 있어. 땅굴에서 기던 주제에 감히 뭐가 어쩌고 어째?”
“뭣하면 둘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아. 난 늘 그런 싸움을 해 와서 익숙하거든.”
“…감히!”
“이 새끼가!”
카츠미와 페이진이 고함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바로 그때, 녹스의 영체가 회의실 원탁 정중앙에 앉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치직!
“이런, 이런… 여기서 이러지들 마.”
녹스가 싸움을 막으려는 듯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말투에 걱정이나 염려는 없었다.
눈, 코, 입조차 불명확한 녹스의 영체에는 표정이랄 게 없지만, 만약 있다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갑작스러운 녹스의 등장에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녹스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들어 봐. 마침 포트리스에는 적절한 공간이 있어.”
“…….”
“당신들이 말한 결투가 얼마든지 가능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아.”
“헛소리군.”
“그건 결투가 아니야.”
녹스가 담보하는 ‘안전’은 마피아에게 사실상 모욕과 같았다.
결투란 살과 피가 튀는 의식이며, 결투 중 어느 한쪽이 목숨을 잃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양쪽 모두 전혀 다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민호의 말처럼 ‘어린애 놀음’이 되어 버릴 뿐이다.
“죽거나 다치지 않지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줄 수는 있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라는 표현에 카츠미와 페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죽거나 다치지는 않지만, 그와 동일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야.”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팔짱을 꼈다.
“장담컨대, 승부를 가리기에 그보다 나은 곳은 없어.”
녹스는 셋의 답변을 듣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튕겼다.
탁!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곧이어 원탁 위 녹스의 영체가 한순간 사라졌다가 열린 문 앞에 다시 나타났다.
“따라와. 자신 있으면 말이야.”
이렇게 판을 깔아 준 이상 피할 도리가 없다.
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중얼거렸다.
“…악취미군.”
녹스는 그야말로 관객의 입장에서 싸움을 즐기려 하고 있었다.
5년간 방치되었던 인공 생명체 녹스는… 심심했다.
치이익!
문이 열린다.
나선형의 복도를 걸어 도달한 훈련장은 전차 몇 대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이건… 대단하군.”
당당하게 들어선 페이진마저 기가 질려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내부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훈련장 한가운데 원형의 거대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투명한 막이 반구 형태로 감싸고 있다.
원형 공간은 완벽히 밀폐되어 있었다.
투명하게 내부가 비치지만, 천장까지 완전히 막혀 있으며, 입구나 출구도 없다.
특이한 것은 유리막 주변에 설치된 수십 개의 캡슐이었다. 캡슐은 사람이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룰은 간단해.”
녹스는 경기장 주변에 둘러쳐진 캡슐들을 가리켰다.
“캡슐에 들어가면 결투장 안에 ‘분신’이 만들어져.”
“분신?”
“분신이라 해도 감각, 신체 능력, 의식은 고스란히 유지되지. 소지한 무기까지도 그 상태 그대로 복제될 거야.”
민호는 이미 훈련장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기에 녹스의 설명을 듣지 않은 채 경기장 반대쪽 끝 캡슐로 걸어갔다.
반면, 카츠미와 페이진에게는 녹스가 설명하는 기술 하나하나가 충격, 그 자체였다.
분신, 복제… 하나같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아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터무니없는 기술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녹스의 태도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었다.
“분신의 최대 유지 시간은 한 시간. 저 안에서 분신이 느끼는 통증과 공포는 본체가 고스란히 느끼게 돼. 조심할 건 그 과정에서…….”
녹스가 솜씨 좋은 이야기꾼처럼 목소리를 낮춘 채 은근하게 말했다.
“…정신이 붕괴되는 일도 가끔 생기지.”
온몸을 난도질당하거나 팔다리가 날아가는 감각이 그대로 이어진다.
그 고통은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본체에 그 상처가 남지 않을지라도 정신은 그 통각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기억한다.
그리고 때때로 정신은 그 고통과 공포를 이겨 내지 못한다.
“능력의 사용도 가능한가?”
카츠미가 검을 움켜쥔 채 조용히 물었다.
“물론.”
“충분하군.”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캡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주, 잠깐!”
페이진이 황급히 캡슐 앞에 선 카츠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춘 채 조용히 말했다.
“저 자식들 말을 어떻게 믿고 이 수상한 기계에 들어간다는 거야?”
민호는 녹스를 알고 있고, 포트리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반면, 카츠미와 자신은 포트리스에 대해 무지했다.
설명을 들었다 한들 체험하지 않은 방식이고, 익숙하지도 않다. 아니,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했다.
당장 캡슐 안에 들어갔을 때, 어떤 문제가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이건 애당초 불리하게 설계된 게임이고, 불확실한 도박이었다.
“당주, 일단 나한테 기회를 줬으면 하는데…….”
그 의도를 눈치챈 카츠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페이진을 노려보았다.
“저놈은 우리 카게구미의 원수야. 복수는 내가 직접…….”
“난 카게구미가 아니라 자격이 없다는 뜻인가?”
페이진의 말에 카츠미가 멈칫했다.
단지 페이진의 말에 담긴 의미나 섭섭한 감정 때문이 아니다.
페이진의 말투와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당주.”
페이진이 카츠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평소 다혈질에 저돌적이던 페이진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뇌옥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내 목숨은 물론, 부하들의 목숨까지 전부 당주의 손에 맡겼습니다.”
처음으로 카츠미를 향해 말을 높였다.
“당주의 안위는 곧 나와 내 부하들의 안위라는 뜻입니다.”
카츠미는 갑자기 달라진 페이진의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껏 격 없이 굴던 페이진이다. 그의 굴복은 오로지 자켄의 무력 덕분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페이진이 보이는 진심은 오롯이 카츠미로 인한 것이었다.
“부디 기억하십시오. 누가 당주인지, 이 페이진이 누구에게 목숨을 맡겼는지.”
이미 실패해 끝나 버린 삶을 카츠미가 다시 건져 올렸다. 그 대가로 페이진은 카츠미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페이진이 충성을 맹세한 이는 카츠미였다.
“싸구려 시대극이라도 찍는 건가?”
진지한 고백의 와중에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새 원형 결투장 안에 선 민호가 총을 꺼내 든 채 카츠미와 페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페이진이 그런 민호를 바라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기다려, 이 쥐새끼야. 내가 직접 박살 내 줄 테니까.”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