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센트럴 오더 (1)
[누나, 대체 언제까지 거기 있을 생각이야?]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아크 텔로스가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나 정작 홀로그램 앞에 선 카렌 텔로스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아크, 너…….”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누나. 꽤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카렌은 의뭉스럽게 웃는 동생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50구역에서 벌인 파괴 공작과 방주에서의 의원 암살 사건, 49구역 인형 병동 테러 사건까지.
그 사건들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아크가 있다.
허수아비일 뿐이라 해도 50구역 대표자들의 죽음은 타 구역 의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센트럴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는 구역마다 얼마간 남아 있었고, 따라서 50구역 의원에 대한 테러는 그저 남의 이야기일 수 없었다. 공포에 질린 각 구역 의원들은 토벌군의 편성을 주장했다.
― 모든 것을 불태워야 하오. 지역 자체를 초토화시켜야 합니다!
― 물론이오. 센트럴에 대한 도전의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 줘야 하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레지스탕스의 소탕 수준이 아니었다. 50구역을 잿더미로 만들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했다.
49구역 병동 테러 사건 이후에는 로보티안 연맹이 들고일어났다. 로보티안들의 마지막 안식을 위해 준비된 공간마저 테러로 인해 피습당하자, 49구역에 군의 파견과 더불어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다.
― 로보티안 병동의 파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라!
― 49구역의 용병들과 히트맨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라!
― 코카서스와 결탁한 49구역 용병과 히트맨들을 체포하라!
로보티안 연맹은 기다렸다는 듯 49구역의 히트맨과 용병 조직을 물어뜯었다.
히트맨과 용병들은 메타휴먼을 도구처럼 쓰다 버렸고, 로보티안에 대한 학살에도 앞장서곤 했다. 이번 사건은 차라리 로보티안 연맹에게 좋은 기회일 것이다.
49구역과 50구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구역 의원들과 로보티안 연맹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결집되었고, 센트럴 상원의원을 강력히 압박해 들어갔다.
모든 것은 아크가 의도한 그대로였다.
“파괴는 답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아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쇠를 놓자, 카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아크는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전쟁은 돈이 된다. 드림코퍼레이션은 이미 센트럴과 각종 방산 계약을 맺고 있었고, 토벌군이 조직된다면 엄청난 양의 신무기를 팔아 치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49구역과 50구역은 지금껏 대륙의 온갖 지저분한 일들을 대행해 왔고, 그 과정에서 히트맨, 용병, 마피아 등 온갖 사적 무력 집단들이 힘을 키워 왔다.
전쟁의 향방이 어찌 흘러가든 질서가 무너지고, 무수한 희생이 생길 것이다.
“아크, 당장 모든 걸 그만둬.”
[누나에게는 날 막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어.]
아크는 50구역의 파괴를 위해, 카렌은 50구역의 재건을 위해 50구역에 왔다.
각자의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고, 텔로스 가(家)의 가주인 아버지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기회…라고?”
[그만 포기하고 돌아와. 이제 50구역은 위험해질 거야.]
“…….”
[전용기를 보낼게.]
“나한테 기회는 없었어. 이미 결론이 나 있었잖아. 안 그래?”
억울했다.
카렌은 센트럴에 상주하는 상원의원들을 표적으로 로비 활동을 벌였다. 로비스트 법인 여덟 개가 동원된 대규모 로비였다.
소모적인 전쟁을 막기 위한 조치로는 과할 정도의 자원 투입이었고, 카렌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각 구역을 대표하는 하원의원들은 몰라도, 센트럴에 상주하는 상원의원들에게는 전쟁을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센트럴의 상원에서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토벌군은 조직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비는 모두 실패로 들어갔다. 지금껏 카렌의 말이라면 넙죽 엎드리던 상원의원들이 로비스트들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아크의 영향력이 그 정도일 수는 없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거지?”
그러나 카렌의 말을 들은 아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내가 단독으로 진행했어.]
“…뭐?”
[총 열세 개의 공장, 292개의 부동산, 법인 일곱 개, 그리고 수중에 있던 현금 전부.]
“지금 대체 무슨……!”
[내가 이번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투입한 자산들이야.]
아크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반대로 카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상원의원들이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은 이유를, 카렌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크는 이번 일에 본인이 가진 자산의 90% 이상을 쏟아부었다.
카렌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미쳤어?”
이번 일이 실패할 경우, 아크는 사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
드림코퍼레이션의 계승권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고작, 고작 토벌군을 위해 그렇게까지 한다고?! 너 대체…….”
[누나.]
아크가 고개를 젓더니 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고작 토벌군이나 꾸리자고 내가 그렇게 판돈을 키웠겠어?]
“……!”
카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문득 한 가지 단어가 머리를 스친다.
“아냐, 그럴 리가…….”
[맞아. 센트럴 오더.]
아크의 담담한 한마디에 카렌은 표정이 무너졌다.
센트럴 오더(Central Order).
이는 대륙 전체의 전시 체제 최상위 단계를 의미한다.
발동하는 순간, 센트럴에 속한 전 지역, 즉 대륙 전체는 오로지 전쟁을 위해 움직인다.
사람과 물자는 전쟁을 위해 동원되며, 대상을 철저히 파괴할 때까지 오더는 멈추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해.”
센트럴 오더는 오로지 센트럴의 체계 자체가 위협받을 경우에만 발동할 수 있다.
상원의원 3/4의 동의와 수상의 동의.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요건이었다.
그렇지만 카렌을 알고 있었다.
아크가 자신에게 의도를 드러냈다는 의미는, 이미 해냈다는 뜻임을.
[센트럴로 돌아와, 누나. 동부 지역은 곧 지도에서 사라질 거야.]
“아크, 이건 미친 짓이야.”
자본주의의 기본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긴급조치.
센트럴 오더가 발동할 경우, 사실상 군수사업 외에 드림코퍼레이션의 모든 사업이 중지된다.
모든 공장들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설비로 대체되며, 상품의 공급량과 가격까지도 모조리 센트럴의 통제를 받게 된다.
센트럴은 이러한 조치로 수많은 국가들을 무너뜨렸고, 대륙을 집어삼켰으며, 역사 시대를 끝장냈다.
그게 바로 센트럴 오더였다.
“…대체 왜?”
카렌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센트럴 오더의 발동은 드림코퍼레이션에게 큰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조치가 아니다.
“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거지?”
망연한 얼굴의 카렌을 바라보던 아크가 조용히 말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카렌은 홀로그램이 꺼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홀로그램이 꺼진 어둠 속.
“아가씨.”
뒤쪽, 빈 허공에서 누군가가 카렌을 부른다.
카렌 탈로스의 경호원이자 1급 히트맨, ‘기란’.
카렌의 그림자로서 늘 그녀의 명에 복종한다.
카렌은 홀로그램이 떠오른 자리를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란, 난 지금부터 서장과 자켄에게 연락을 돌릴 거예요.”
“…….”
“덕곡상회에 다녀와야겠어요.”
이젠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
50구역을 지키기 위해서, 아크를 막기 위해서는 그 누구의 힘이라도 빌려야만 했다.
그게 설사 레지스탕스라 해도.
“레미제라블에서 앞으로 한 시간 뒤, 50구역의 리더들이 모두 집결하도록.”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검은 망토의 사내가 가만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 * *
대륙의 모처.
통신을 종료한 아크는 싸늘한 얼굴로 카렌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크는 알고 있다. 카렌은 결코 50구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다.
‘그래, 이게 최선이겠지.’
50구역, 카렌의 자금력을 기반으로 마피아와 LAPD, 그리고 레지스탕스까지 모두가 결집할 것이다.
49구역, 사막여우의 기계병단을 비롯한 유민(遺民)들이 사막지대를 지키고 있다.
계획이 상당 부분 어그러졌지만, 아직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이 정도면 동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크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뒤쪽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이봐. 아무리 누이라지만, 그렇게 다 말해 줘도 괜찮은 건가?”
하얀 옷에 하얀 피부, 하얀 머리칼.
스스로를 ‘신’이라 자처하며 49구역에서 날뛰고 다니던 용병단의 대장, 백련.
엉망이던 그의 매무새는 어느새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크가 가만히 뒤돌아서서 백련에게 시선을 보냈다.
백련의 옆에는 그를 데려온 독수리 한 쌍이 횃대에 앉아 아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련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엎드려서 절이라도 해 드릴까, 도련님?”
“…….”
아크는 그의 그런 태도가 가당찮은 허세임을 알았지만, 그저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당신은 놈들에 대해 알고 있었어. 그렇지? 아니지, 아니야. 혹시 당신이 그놈들을 키운 건가?”
벼랑 끝에 몰린 백련은 제 나름대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말을 해 보라고. 나를, 이 나를 이용한 건가?”
애써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백련의 목소리에서는 분노와 절박함이 묻어났다.
백련은 그동안 거침없이 조직을 불려 왔고,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렸다. 그것은 그저 용병단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종교 국가였고, 그 국가에서 백련은 왕이었다.
49구역의 ‘관리자’. 그게 바로 백련이었다.
그러나 백련은 정예 부대원을 한순간에 모조리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처참하게 패퇴했다. 터무니없는 힘을 가진 괴물이 나타났고, 개조된 버그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영토로 돌아간다 해도 재기는 어렵다.
센트럴 놈들에게 고용되어 50구역에 발을 들였다가 자랑하던 무기를 빼앗기고, 그 자신마저 폐인이 되어 버린 바로트의 수장, ‘수부티’. 지금 백련은 그 멍청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곧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아크의 지원을, 재기의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
비굴하지 않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서.
“백련.”
이윽고 아크의 입술이 열렸다.
아크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분노도, 짜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난 지금껏 당신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 왔습니다. 당신들을 3대 용병단으로 끌어 올린 천문학적인 자금, 그건 시작에 불과했죠.”
백련의 얼굴근육이 불안하게 떨렸다.
“당신이 그 어쭙잖은 신 행세를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게다가 로보티안들을 마음껏 부술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죠.”
인공 비와 의도된 가뭄, 로보티안으로 편성된 오합지졸 토벌군.
그 모든 것은 아크의 지원이었다. 지금껏 백련은 아크의 그늘 아래에서 힘을 키웠다.
그리고 이젠… 버려질지도 모른다.
“…….”
백련은 손을 덜덜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빌어야 할까? 무릎을 꿇어야 할까?
아니, 아니다. 약한 이는 혐오의 대상이 될 뿐이다.
머릿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아크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이어졌다.
“그렇게까지 당신을 도운 이유가 뭘까요? 당신이 강해서? 똑똑해서?”
독수리들은 이제 고개를 돌려 백련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아니,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나는!”
누그러진 말투로 새어 나오던 백련의 목소리가 아크의 고성에 묻혀 버렸다.
“당신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왜? 악랄했으니까! 탐욕스러웠으니까!”
“…….”
“49구역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어야지! 완전히 집어삼켰어야지!”
아크의 목소리에서 숨겨 둔 분노가 일제히 쏟아져 나온다.
당장에라도 백련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모습 앞에서 백련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애당초 49구역과 50구역을 중심으로 판을 짠 것은 아크였다.
50구역의 마피아들도, 49구역의 용병들도 모조리 손에 넣은 뒤, 한바탕 전쟁놀이를 벌여 볼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전쟁의 시작과 끝을 모조리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50구역에 이어 49구역까지 이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의회와 캐피탈 클럽의 돼지들을 다루는 것조차 쉽게 해내던 그가 49구역과 50구역에서 연달아 물을 먹은 것이다.
신태일, 그 남자로 인해.
한동안 분노를 삭이던 아크는 뒤돌아서서 차갑게 말했다.
“방을 내줄 테니, 몸을 추스르세요.”
“…….”
백련은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련이 방을 나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크는 가만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약간의 변수일 뿐이다.
결국 모든 일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그렇게 되뇌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완전히 삭여 내지는 못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