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72화 (73/220)

72화 붉은 눈의 기계병단 (9)

“넌 알렉세이 딘이 아니야.”

헬멧을 쓴 남자는 당장에라도 총을 발사할 듯 딘의 뒤통수를 겨누었다.

‘알렉세이 딘을 아는 남자…….’

태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헬멧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한편,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분위기는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메타휴먼들의 총구가 전부 딘의 머리를 겨눈 헬멧사내에게 집중되었지만, 정작 표적이 된 그는 물러서는 기색 없이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 살기를 내뿜었다.

“하아…….”

태일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몇 방울을 더 할 이유는 없다.

“총 내려.”

“…….”

“네 말대로 이자는 알렉세이 딘이 아니야.”

“나는 알렉세이…….”

딘이 부정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태일이 말허리를 잘랐다.

“알렉세이 딘의 눈동자 색이 무슨 색인지 알고 있나?”

“…….”

어느새 딘을 똑바로 바라보는 태일의 태도는 단호했다.

지금껏 모호하게 굴었지만, 방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태일은 확실히 깨달았다.

눈동자의 색을 운운했지만, 정말 문제는 눈동자의 색깔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의 딘은 스스로에 대해 자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알렉세이 딘은 완벽주의 기술자가 아니라 메타휴먼으로서 판단을 내렸다.

기계병의 개조도, 골렘을 활용하는 방식도 태일이 알고 있는 알렉세이 딘의 방식이 아니었다.

성격이, 모습이, 지식이 알렉세이 딘과 비슷할지라도 정체성이 다른 이상 그는 결코 태일의 친구였던 알렉세이 딘이 될 수 없다.

“넌 알렉세이 딘이 아니야. 그 사실을 인정해.”

딘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지만, 태일은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헬멧을 바라보았다.

“구면인 거 같은데, 좋게 좋게 말로 하지. 오늘은 피를 너무 많이 봐서 말이야.”

[동감.]

뒤쪽, 빈 허공에서 영체와 더불어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체의 모습을 본 헬멧이 놀란 듯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냈다.

“녹스?!”

[오랜만이야, 민호. 아, 지금도 그 촌스러운 이름 그대로 쓰나?]

“뭐, 뭐야? 왜 이렇게 어지러워?”

영체의 옆에 함께 나타난 페이진은 차원을 이동하면서 나타나는 감각 이상에 적응하지 못한 듯 비틀거렸다.

요란을 떠는 페이진을 지켜보던 카츠미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가만히 좀… 있어. 곧 괜찮아지니까.”

정작 카츠미 역시 살짝 휘청이고 있었다.

녹스의 영체는 헬멧 안쪽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일단 총부터 내리는 게 좋겠어. 더는 싸울 이유가 없어.]

녹스와 마피아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헬멧사내는 결국 총구를 내렸다. 곧이어 그가 천천히 헬멧을 벗어 얼굴을 보였다.

“아니, 저 녀석은 시장의……?!”

페이진이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50구역 시장가의 쌀가게, 덕곡상회에서 일하는 젊은 사내. 민호는 시장 내 부지를 빼앗으려는 마피아들을 방해하는 시장 자경단의 일원이었다.

“레지스탕스…….”

그나마 페이진에 비해 조금은 더 알고 있는 듯 카츠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라는 표현조차도 ‘민호’라는 남자의 정체를 정확히 담아내지는 못했다.

민호는 시장 자경단의 일원이기에 앞서 레지스탕스이고, 레지스탕스이기 이전에 ‘셸터(Shelter)’라는 조직의 일원이었다.

태일 역시 목소리를 복기하면서 이미 정체를 파악한 뒤였기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헬멧을 벗은 민호가 태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어떻게 알렉세이 딘을 알고 있지?”

“친구였거든.”

태일의 짧은 대답에 민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알렉세이 딘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아니.”

혁명군이 무너지던 날, 딘이 어떻게 되었는지 태일 역시 알지 못했다.

“당신… 셸터인가?”

이번에는 카츠미와 페이진까지도 놀란 눈으로 태일과 민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심지어 민호의 질문에 알렉세이 딘조차도 놀란 것 같았다.

지금 민호의 질문은 자신이 ‘셸터’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무게는 앞서 딘의 권유와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졌다.

태일은 이번에도 짧고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태일과 딘은 물론, 카츠미와 페이진조차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카츠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고, 페이진은 불안한 듯 그런 카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아직 앳된 목소리였다.

“이봐, 거기!”

라비가 장 영감을 부축한 채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다.

장 영감의 옆구리에는 피가 흥건하다.

“도와줘! 하, 할아범을 살려 줘!”

[여기 내려 둬.]

“너, 너는?”

[서둘러.]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녹스의 영체는 인간이라기보다 유령처럼 보이기에 라비는 잠시 겁에 질린 듯했지만, 이내 서둘러 장 영감을 내려 두었다.

“으, 으윽…….”

“할아범!”

“나는… 괜찮아. 괜찮으니…….”

녹스의 영체는 천천히 장 영감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내장을 상하지는 않았어. 잘 지혈하고 치료를 받으면 괜찮을 거야.]

“그럼 괜찮다는 거지?!”

[나이가 있으니, 치료를 잘 받아야 해.]

“뭐든 해 줘!”

라비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리는 와중에 태일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방에 용병들의 시체가 널려 있고, 부서진 기계병들의 잔해가 나뒹굴었다.

끼기기긱… 끼릭…….

기계병들은 어느새 주변에 흩어져 전투의 흔적을,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잃은 동료의 잔해를 정리하는 와중에도 슬픔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더는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조각들을 맞추어 가지런히 눕혀 놓고 있었다.

그건 마치 경건한 의식처럼 보였다.

태일뿐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장 영감의 상처 확인을 마친 영체가 몸을 일으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요새 안으로 들어가지.]

* * *

태일은 요새 안, 원탁이 있는 회의실로 들어왔다.

페이진, 카츠미, 민호까지 세 사람이 태일과 함께 원탁 앞에 앉았다.

회의실에 들어온 뒤, 한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라비와 장 영감, 프랑켄은 로봇들의 도움을 받아 치료실로 향했고, 딘은 기계병단과 함께 전투 현장을 정리하는 데 합류했다.

회의실 안, 앞서 띄워 둔 홀로그램은 여전히 바깥의 상황을 비추고 있었다.

시신 수습은 별다른 소요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계병단은 구덩이를 깊게 파 용병과 펑크라이더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묻었고, 부서진 기계병들은 가지런히 진열해 놓았다.

그렇게 정리가 끝난 뒤, 숨이 끊어진 기계병들에 대한 추모가 이루어졌다.

― 메타휴먼에게는 영혼이 없다.

카츠미와 페이진, 심지어 민호까지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 홀로그램을 통해 보이는 장면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계 갑주의 메타휴먼들은 마치 전쟁영웅처럼 애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와중에 인간의 시신은 도살당한 짐승의 사체처럼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기괴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모습에 카츠미는 입술을 깨물었고, 페이진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나마 민호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한편, 그사이 깡통 로봇들이 부산히 회의실을 오갔다.

[지저분해진 옷들을 넘겨주시면 깨끗이 빨아 드리겠습니다.]

깡통 로봇들은 피와 땀, 먼지로 지저분해진 외투와 장갑 따위를 가져갔고, 통조림과 음료를 가져와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음식에 손대지 않았다.

심지어 카츠미는 로봇들마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으로 홀로그램의 상황을 지켜보던 태일은 깡통 로봇에게 자신의 코트를 넘겨주며 조용히 물었다.

“술 있나?”

[어떤 종류를 원하십니까?]

“독한 걸로.”

다른 세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태일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다.

잠시 뒤, 로봇이 브랜디 한 병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딘 녀석, 용케도 이걸 구했네.”

딘은 술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고급술에 대한 집착만큼은 유별났다. 덕분에 포트리스의 식량 창고에는 값싼 통조림과 어울리지 않게 유서 깊은 술들이 잔뜩 숨겨져 있었다.

오죽하면 레미제라블의 창고보다 포트리스의 창고가 더 술집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로봇이 가져온 술은 아르메니아 브랜디, ‘아라라트(Арарат)’. 대륙 동부에서 수백 년 전부터 가장 유명한 브랜드였다.

태일은 로봇이 함께 들고 온 잔을 원탁에 올려놓은 뒤, 바닥에 괼 정도의 양을 따랐다.

페이진이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실 건가?”

“그…….”

페이진이 슬쩍 카츠미의 눈치를 살핀다.

“추모의 의미로.”

“한 잔은 괜찮겠지.”

카츠미가 조용히 답하며 로봇이 가져온 잔 두 개를 원탁 위에 올렸다.

태일이 민호를 바라보자, 그 역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군에서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목숨을 잃은 동료를 추모할 때면 다 함께 쓰디쓴 독주를 나눠 마시곤 했다.

술은 통증을 아물게 한다. 고통을 잊게 해 준다. 동시에 무딘 감정을… 되살아나게 해 준다.

억누르던 슬픔도, 절제해 오던 괴로움도 맨얼굴을 드러낸다.

태일은 브랜디를 머금은 채 홀로그램 속 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가장 앞에 서서 경건한 얼굴로 파괴된 기계병들의 면면을 차례로 살피고 있었다.

그는 그저 딘을 닮은 메타휴먼이다.

알렉세이 딘은 괴짜 과학자, 까다롭고 깐깐한 완벽주의자, 동료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리고… 혁명군의 일원이었다.

‘딘, 너는 무사한 거냐?’

[도어 개방.]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녹스의 목소리와 함께 딘이 회의실로 돌아왔다.

브랜디와 잔을 본 딘은 말없이 회의실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셸터는 사라졌어.”

처음 입을 연 이는 민호였다.

“…5년 전에.”

5년. 세연과 알렉세이 딘은 이곳에서 5년 전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태일이 처음 그 둘을 만난 게 바로 5년 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닮은 세계를 오갔다.

“셸터의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조직은 활동을 멈추었어. 그러면서 조직원들끼리의 연락 역시 끊어졌지.”

셸터의 지도자들. 둘은 태일의 혁명군에 속하기 이전에 셸터라는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세연은 양쪽 세계에 ‘레미제라블’을 만들었고, 알렉세이 딘은 ‘포트리스’를 만들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 다른 세계에 자신들만의 거점을 만들고, 비밀스러운 활동을 펼쳐 왔다.

둘은 태일을 속인 걸까?

아니, 태일을 이용한 걸까?

둘에게 있어 혁명군이란 그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걸까?

태일은 감정을 숨긴 채 조용히 물었다.

“셸터는 무엇을 하는 조직이지?”

“종말을 막는 조직.”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보탰다.

“정확히는 각 세계의 종말을 막는 조직.”

“흥!”

페이진이 코웃음을 치더니, 거칠게 잔을 원탁에 내려놓았다.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겠군. 뭘 막아? 이거야… 아까 그 정신 나간 용병단과 다를 게 뭐지?”

페이진이 차갑게 비웃으며 독설을 날렸다.

카츠미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원탁을 톡톡, 두드렸다.

허무맹랑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그렇게 들릴 것이다.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는 백련의 용병단과 다를 바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태일에게는 아니었다.

태일은 셸터의 목표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민호는 분명 ‘각 세계’라 했다. 그것은 세계들이 여럿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태일은 이미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경험했다.

‘셸터’는 여러 개의 세계를 오가는 이들이 만든 조직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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