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광기는 달린다 (1)
태일의 방문에 반가움을 표한 것도 잠시, 프랑켄과 앨리스, 지우는 구석에서 못다 한 포커 게임에 집중했다.
“마셔요. 내가 특별히 조달해 온 원두예요. 맛도 아주 좋죠.”
태일은 고급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채 카렌, 지은과 마주하고 있었다.
율무의 부드러운 향에 비해 커피의 ‘고급’스러운 향은 어째서인지 매스껍게 느껴질 뿐이었다.
“당신이 어째서 아직도 50구역에 남아 있는 거지?”
태일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아 있었다.
“어머,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날뛰던 분이 왜 이러실까?”
“…하아.”
카렌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태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2주 전, AL―13을 회수한 뒤, 레미제라블로 돌아온 태일은 꽤나 피곤한 상태였다.
아마 그 피곤함이 착각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태일은 바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았고…….
“어머, 왔네요. 반가워요! 난 제인의 친구인…….”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동안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세연, 그녀였다. 아니, 그녀라고 생각했다.
태일은 다짜고짜 세연에게 달려가 포옹했다.
“사, 사장님!”
지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세연 역시 놀랐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말해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했는지, 얼마나 그녀를…….
그러나 세연은 태일을 힘껏 밀어냈다.
“세연아, 나는…….”
그러나 태일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짝!
“이 변태 새끼가!”
뺨을 후려갈긴 그녀가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태일이 주머니에 넣어 둔 회중시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째깍째각.
회중시계는 평소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세연의 소울에 반응해야 하지만, 시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세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드림코퍼레이션의 이사, ‘카렌 텔로스’였다.
“상호 반갑지 않은 첫 만남이었던 것 같은데, 그쯤 해 두지.”
태일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분명 세연과 닮은 얼굴, 세연과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어머, 뻔뻔하기도 하셔라. 나는 몰라도 그쪽 입장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첫 만남이었을 텐데요? 내가 아니었으면 그날 그 알바생은 죽을 뻔했지, 아마?”
“…….”
지은은 당시 도영이 방주로 향했다는 사실을 태일에게 털어놓아야 할지 갈등하고 있었다. 아니, 갈등 수준이 아니라 아예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리고 지은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눈치챈 이는 당시 한창 태일을 몰아세우고 있던 카렌이었다.
입사 후, 늘 편하게 대해 준 사장님과 지금껏 가장 존경해 온 그녀의 우상 카렌.
두 사람 앞에서 지은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레지스탕스와 테러 같은 일에 얽히기에 그녀는 너무 겁이 많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지은 씨를 진정시킬 수 있었을까? 안 그래요, 지은 씨?”
“그, 그렇죠. 하하…….”
펑펑 울어 젖히던 자신의 모습이 새삼 떠오르는지, 지은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당시 지은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엿들은 이야기를 정신없이 털어놓았다.
도영이 레지스탕스라는 것뿐만 아니라, 방주로 향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말이다.
그런 내용을 드림코퍼레이션의 이사에게 털어놓는 것은 도영에게 더욱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은에게는 그런 것을 판단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쨌든 그 결과, 태일은 간발의 차이로 도영을 비롯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카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뭐가요?”
“당신 동생이 벌인 짓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카렌 텔로스는 드림코퍼레이션의 이사다.
그녀의 동생은 레지스탕스를 함정에 빠뜨렸고, 50구역을 박살 내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렌은 중요한 정보를 손에 넣고도 무시했다. 뿐만 아니라 열차가 끊어진 지금껏 환락가에 남아 있었다.
“내가 드림코퍼레이션의 이사라는 이유로 아크에게 모든 정보를 넘겨야 하나요?”
어느새 카렌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
“50구역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아크와 달라요. 난 50구역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온 것이지, 망치러 온 게 아니에요. 정확히는 아크와 반대되는 목적으로 왔죠.”
“그게 드림코퍼레이션의 적을 내버려 두는 이유라고?”
“적이라… 순진하네요. 후후.”
지금까지와 달리 음산한 카렌의 웃음소리에 지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마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본모습일 것이다.
카렌은 태일의 말이 꽤 재밌다고 여겼다.
‘드림코퍼레이션의 적’… 50구역 레지스탕스 따위에게 그런 호칭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만약 레지스탕스가 그 정도로 위협적인 세력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본가는 철저하게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조금이라도 더 벌어들이기 위해 방해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당연히 자비심 따위 존재하지 않았고, 레지스탕스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사업가인 그녀가 무언가를 남겨 두었다면, 그것은 아직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아크가 레지스탕스를 이용해 의원들을 살해했듯, 카렌은 태일을 이용해 아크의 일을 방해했다. 그리고 덤으로 태일의 실력까지 직접 확인했다.
카렌은 다시금 사업가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보다… 내 제안은 생각해 보았나요?”
카렌은 사업가였고, 그녀에게 있어 태일은 반드시 손에 넣고 싶은 존재였다.
그게 위험한 50구역에 아직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글쎄…….”
카렌이 내놓은 계약서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렌은 태일에게 개인 첩보팀까지 약속했다.
50구역뿐 아니라 대륙의 모든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금력과 팀을 약속했다.
카렌은 태일이 세연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제인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태일이 가장 혹할 만한 조건을 내건 것이다.
“제인도, 도영 씨도, 심지어 신태일, 당신까지 혼동할 정도로 나와 닮은 사람…….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가긴 해요.”
물론 고작 흥미만으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때요? 나와 손잡는다면 한 시간 이내에 그녀를 찾을 수도 있어요. 우리 정보팀은, 아니, 태일 씨 밑에서 일할 정보팀은 꽤 유능하거든.”
태일이 그녀의 손에 들어온다면 여자 한 명 찾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가 봐야겠군. 급한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카렌이 자랑하던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순간, 카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태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커 게임에 한창 집중 중인 앨리스 쪽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벌써 가려구요?”
“그래. 좀 바빠서 말이야. 얘길 들었더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면서?”
“…….”
“네 힘은 나의 것을 훔친 게 아니야. 부담 갖지 말고 단련하도록 해.”
태일의 부드러운 말에 앨리스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앨리스가 당신 때문에 힘을 쓰지 않겠대요. 가서 말 좀 잘해 줘요. 그 재능을 썩히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자켄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더는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카렌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 밖으로 나서는 태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니, 괜찮아요?”
대놓고 면박을 당한 카렌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카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빙긋 웃었다.
“그럼! 뭐든지 쉽게 손에 넣으면 재미없잖아? 너희 사장님, 제법 흥정을 할 줄 아는 거 같은데?”
그러나 정작 카렌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 * *
아직 새벽 시간임에도 숨 막히는 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뿌옇게 내려앉은 붉은 흙먼지 속에서 봄의 따뜻함과 가을의 선선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50구역에는 극단적인 더위와 추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덥군.”
온몸이 휘발유와 땀으로 진탕된 강필이 한숨을 내쉬며 개조 차량의 보닛을 닫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LAPD 승합차에 불과하던 차량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LAPD 마크는 지워 버렸으며, 엔진의 출력을 두 배 이상 강화했다. 유리와 차체는 방탄용으로 갈아 끼웠고, 트렁크에는 스파이더 체인을 비롯한 온갖 부품들을 가득 채워 넣었다.
언뜻 보면 전쟁터라도 향하는 전차처럼 보일 정도였다.
태일은 슬쩍 차체를 둘러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거, 너무 튀는 거 아냐?”
순간, 강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인마? 이거 개조하는 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뚫린 입이라고!”
“차, 참으십쇼, 서장님!”
기름 범벅 상태의 장량이 펄펄 뛰는 강필을 뜯어말렸다.
한편, 프랑켄은 신기하다는 듯 차량의 상태를 이곳저곳 뜯어보며 말했다.
“G7―캐리어 버전이군요. 게다가 초경량 티타늄까지…….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내가 지금껏 모아 온 것들 전부 털어 넣은 거야. 진짜 이거야말로 드림 카라고, 드림 카! 웬만한 총알들은 뚫지도 못할 강도에 불길 속에서도 끄떡없지.”
차량을 바라보는 강필의 얼굴에서는 미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저걸 운전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장량은 강필의 말을 칼같이 잘랐다.
“서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치안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젠장…….”
강필이 못내 아쉬운 눈으로 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에 프랑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서장님. 제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고 오겠습니다.”
“…….”
프랑켄을 바라보는 강필의 눈매는 그리 곱지 않았다.
프랑켄에게 씌워진 혐의는 아직 벗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서장 암살 미수 혐의에 경찰서를 탈옥 사건까지 있으니, 당장 감옥에 처넣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LAPD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가운데, 강필은 프랑켄의 혐의를 조용히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임무, 제대로 완수하고 와라. 열차를 다시 가동시켜. 그렇게만 된다면 네 혐의는 전부 잊어 주지.”
“네, 알겠습니다.”
프랑켄은 기계적으로 대답했고, 강필은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침을 탁, 뱉었다.
그 와중에 태일은 차량 뒷좌석에 떡하니 들어앉아 있었다.
강필이 그 꼴을 보며 내뱉듯 말했다.
“차 조심히 몰아. 멀쩡히 가져와라. 망가지면 전부 비용 청구할 거니까.”
한편, 차 뒤쪽에서는 한창 조용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당주님, 꼭 가셔야겠습니까?”
흙먼지를 가리기 위해 붉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자켄이 자신의 앞에 선 소녀, 카츠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직 앳된 소녀에 불과한 카츠미의 눈은 마치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인처럼 담담해 보였다.
지난 2주 동안 카츠미는 수많은 배신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숙청했다.
늘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던 대장들이 등 뒤에서 칼을 찔러 넣었다. 카츠미가 그저 한 명의 무사에 불과했다면 그들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주가 된 이상, 카츠미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죽기 직전, 그들은 비굴하게 빌기도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어느 쪽도 카츠미가 기억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모조리 숨이 끊어졌고, 할아버지를 섬기던 12대장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이는 오로지 자켄뿐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 부하들을 잘 부탁해요, 자켄.”
“…당주님.”
자켄은 어떻게든 카츠미를 말리려 했다.
당주가 자리를 비우고 대륙을 건너 Z―rail 본사로 향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츠미의 뜻은 굳건했다.
“부하들은 나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아요. 지금은 그저 자켄 때문에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죠.”
“당주님…….”
“그래요, 나도 더 이상 자켄에게 내 자리를 맡아 달라고 조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자켄, 내가 당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힘을 증명해야만 해요.”
카츠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자켄 역시 더는 막지 못했다.
대신 자켄은 카츠미의 옆에서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페이진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페이진은 그런 자켄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처음 녀석이 풀려 나왔을 때, 자켄은 펄쩍 뛰며 당장에라도 베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카츠미가 그런 자켄을 막았다.
카츠미는 페이진을 이용해 천중회 잔당들을 포용하려 했으며, 상징적으로 이번 여정에 페이진을 동행시켰다.
동의하기 어려운 결정이지만, 자켄은 기꺼이 당주의 뜻에 복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페이진을 신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주님을 잘 모셔라.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네 목은 내가 반드시 거둔다.”
살 떨리는 협박에 페이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켄은 다시 시선을 돌려 걱정스레 카츠미를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늘 신태일, 저 사람을 곁에 두세요. 저자라면 능히 당주를 지켜 낼 겁니다.”
카츠미는 그런 자켄을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럴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겠어요.”
페이진은 그런 카츠미의 말에 짧게 혀를 찼고, 자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