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56화 (57/220)

56화 열차는 멈춰 서고 (4)

― 마피아와 손을 잡아라.

제안을 들은 민호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대장 역시 조금 전까지의 미소를 완전히 지운 채 태일을 바라보았다.

애당초 이 문제만큼은 속임수나 회피 따위로 피해 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자켄과 강필은 센트럴에 대한 저항을 블러핑이라 했지만, 아크는 50구역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아크는 센트럴 역시 무너뜨릴 생각이었고, 혼란을 격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목적이었다.

열차가 운행하든 멈춰 서든 50구역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50구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피아와 레지스탕스가 손을 잡아야 한다.

“…방금 뭐라고 했지?”

“들으셨지 않습니까.”

“잘못 들은 듯하네만.”

대장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태일을 노려보았다.

그 표정은 영락없이 하얀 늑대의 얼굴 그대로였다.

그러나 태일 역시 지지 않고 대장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50구역은 무너집니다.”

“글쎄.”

“마피아는 센트럴에 저항할 생각입니다.”

“같은 적을 상대한다고 해서 아군이 되는 건 아니야.”

하얀 늑대는 훗날 SB가 풀려 50구역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선택을, 방관을 후회했다. 그는 마피아를 증오했기에 마피아와 LAPD의 공멸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50구역 자체가, 삶의 터전 자체가 파괴되었다.

SB 사태가 끝나고 마피아가 사라졌을 때, 레지스탕스가 되찾고자 한 땅 역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장은 당시의 하얀 늑대와 같은 길을 걸으려 하고 있었다.

“센트럴은 고작 열차를 멈춰 세운 것만으로 50구역을 마비시켰습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마피아 놈들이 자초한 일이야.”

사거리에서의 총격전은 분명 50구역 봉쇄의 원인 중 하나다.

“의원들의 죽음이야말로 결정적인 이유일 겁니다.”

그러나 결국 센트럴 의회가 움직인 것은 의원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하얀 늑대는 냉정한 눈으로 태일을 노려보았다.

“지금 감히 우리들에게…….”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닙니다. 놈들은 50구역을 무너뜨리기로 이미 마음먹었고, 그에 맞서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할 겁니다.”

대장이 가만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분노 때문인지 미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대장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의 의견에 동의한다 치지. 그렇다 한들 동지들은 납득하지 못할 거네. 상인 연합은 놈들을 결코 용서하지 못할 거야.”

시장의 주요 고객은 환락가 주민들이고, 환락가 주민들은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한다. 결국 시장과 환락가는 이미 공생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경멸했다.

토착 세력인 시장 상인들에게 환락가는 이방인들이 빼앗은 땅이었고, 환락가 주민들의 입장에서 시장은 구질구질한 옛 유산에 불과했다.

센트럴은 오랫동안 환락가의 뒷배가 되어 주었고, 마피아들은 캐피탈 클럽의 자본력을 등에 업은 가운데 호시탐탐 시장 지역을 노렸다.

시장 상인들은 레지스탕스와 함께 기어코 이 손바닥만 한 땅을 지켜 냈다. 물론 그 와중에 수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원한이 깊어졌다.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

그저 지도부 간 약간의 교감이면 충분하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기만 해도 족하다.

태일의 말에 대장은 침묵했다.

사실 그런 건 말장난에 불과했다. 결국 태일은 마피아와 손잡으라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조직이 결합할 경우,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방인에게 문제의 화살을 돌려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분노와 혐오의 표출은 쉽다.

그러나 그게 곧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니, 반대로 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만든다.

“우리의 적은 센트럴입니다.”

대장은 결국 확답을 주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자켄의 몫이었다.

“그쪽의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 주십시오. 그게 제 부탁입니다.”

“…자네 덕에 동지들이 목숨을 건졌네.”

대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자네의 말이니 들어주는 게 도리겠지. 놈들과 한 번은 만나 보도록 하겠네.”

대장의 입장에서는 최대한의 타협일 것이다.

줄곧 말없이 듣고 있던 민호는 어지간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감사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대장은 진지한 얼굴로 태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일은 이미 대장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에 들어오게.”

“…죄송합니다.”

“자네의 결정에 따라 마피아와 손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함께 싸울 수도 있어. 자네가 레지스탕스에 들어와 함께해 주기만 한다면, 난 기꺼이 자네의 말에 따를 걸세.”

그러나 태일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마피아와 손잡는 일도, 센트럴과 싸우는 일도 제 선택이 아니라 레지스탕스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그런가.”

대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짙은 아쉬움이 떠올라 있었다.

“자네는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마피아에도, 레지스탕스에도 속하지 않은 채 뭘 할 생각이냐는 말이네.”

“열차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 겁니다.”

열차를 움직이는 곳은 대륙 철도를 독점하고 있는 Z―rail.

결국 50구역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대장 역시 그 의미를 알고 있기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짧은 침묵 뒤, 대장은 조용히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태일은 레지스탕스에도 속해 있지 않고, 마피아도 아니다.

“레미제라블의 재료들 대부분이 대륙에서 조달해 온 거거든요.”

태일은 그저 바 ‘레미제라블’의 사장일 뿐이다.

대장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잠시 뒤, 찻잔를 비운 태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무는 끝났다.

대장은 자켄과 만날 것이고, 이후 손을 잡든 잡지 않든 그것은 레지스탕스의 선택이었다.

“그때 자네가 부탁했던 건 말인데…….”

등 뒤에서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게 밖으로 나가려던 태일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태일은 2주 전, 대장에게 LAPD를 습격해 프랑켄을 탈출시킨 이들에 대해 파악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셸터(Shelter)…라고 들어 봤나?”

“…….”

그 순간, 대장의 옆에 서 있던 민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태일은 표정을 감춘 채 가만히 대장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방주에 대한 정보를 빼냈을 당시, ‘셸터’라는 조직에 대한 보고서가 함께 있었네.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은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지. 처음에는 그게 우리 레지스탕스를 지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네. 아마 LAPD를 습격한 건 그자들일 게야.”

듣고 있던 민호가 급히 덧붙였다.

“대장님, 방주에 대한 정보는 함정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빼낸 정보들 역시…….”

“그래, 무의미한 정보일 수도 있지. 전부 허황된 가짜일 수 있어.”

어느새 대장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그 말이 맞다.

셸터는 실존한다.

프랑켄이 셸터였고, 민호 역시 그 일원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이 이상 둘의 뒤를 캘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셸터는 자신들이 ‘50구역을 지키는 쪽’이라고 했다.

“지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곳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대장은 순순히 태일의 말에 동의를 표했고, 민호 역시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대장은 여전히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듯 태일을 바라보았다.

“부디 조심하게. 자네는 이미 너무 눈에 띄었어.”

“…….”

태일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비슷한 말을 지난밤 자켄과 강필에게도 들은 참이었다.

* * *

레미제라블로 돌아가던 태일은 엉뚱한 장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긴, 여기도 들르긴 해야지.’

자켄의 옷가게는 현재 무기한 휴업 상태였다.

마담이라고 불리던 가게 주인 히나코는 자신의 이름을 버렸고, 과거의 칼잡이로 돌아갔다.

그 대신 히나코를 기억하는 이들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똑똑.

“예, 나갑니다.”

문을 두드리자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린다.

끼기긱… 끼익.

문이 열리는 가운데 귀에 거슬리는 쇠붙이 소리가 끼어 있었다.

“…신태일 씨!”

문을 연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덩달아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태일은 문을 열어 준 프랑켄의 팔과 다리를 살펴보았다.

프랑켄이 움직일 적마다 관절부에서 마치 비명 같은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딘가에서 조달해 온 팔과 다리는 본래의 것에 비해 자연스럽지 못했다. 물론 거미 로봇으로 개조되어 호텔 지하에 던져진 메타휴먼을 생각한다면, 그조차 다행한 상황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젠 좀 괜찮아진 모양이지?”

2주 전, 자켄의 가게가 습격당했을 당시, 프랑켄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전장에 나서지 못했다. 어쩌면 그 덕분에 프랑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프랑켄이 팔과 다리를 보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서글픈 웃음은 프랑켄이 단순히 인간을 모방한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요한의 죽음을 처음 그에게 전했을 때 프랑켄이 보인 슬픔… 아니, 절망감은 결코 흉내 낸 감정이 아니었다.

강필은 굳이 프랑켄을 추궁하지 않았다. 아니, LAPD 자체가 반란으로 마비된 상황에서 프랑켄의 ‘사소’한 일탈 정도는 어느새 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들어오십시오.”

프랑켄이 문을 열어젖히는 찰나, 뒤쪽에서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가 왔어요?”

“…이런.”

태일이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하필 이곳에 있었다.

“어머, 태일 씨? 얘들아, 나와 봐! 너희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왔어!”

카렌 텔로스의 호들갑에 뒤쪽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어머, 제가 여기 오려면 태일 씨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카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태일은 그런 카렌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애꿎은 아르바이트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지은, 너는? 기껏 퇴근하고 왜 여기에 와 있지?”

“아, 저는…….”

“어머, 왜 지은 씨한테 그래요? 지은 씨는 다만 저를 보러 온 거뿐이에요.”

카렌이 다시금 나섰다.

지은은 전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CEO 카렌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카렌의 팬은 지은뿐만이 아니었다.

“형, 이 누나를 왜 그렇게 싫어해요?”

지우는 팔짱을 낀 채 뚱한 얼굴로 태일을 바라보았고, 심지어 앨리스까지도 고개를 갸우뚱한 채 카렌의 한쪽 손을 잡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닮았다.

“그러게 말이야. 이 누나는 너무 슬프지 뭐니.”

그 영악함도…….

“아저씨, 저기… 카렌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카렌 씨가 제 몸에 맞는 부품을 수배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도…….

드림코퍼레이션의 이사, 카렌 텔로스는 태일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연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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