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55화 (56/220)

55화 열차는 멈춰 서고 (3)

카게구미의 당주가 상주하는 임청각 지하에는 지하 뇌옥이 숨겨져 있다.

임청각의 지하 뇌옥은 카게구미가 50구역에 들어오기 훨씬 전인 역사 시대 때부터 당주의 거처에 설치된 시설이었다.

당주를 꿈꾸었으되 당주가 되지 못한 자를 가두기 위한 공간.

카게구미의 당주 자리는 대대로 우에스기 가(家)의 자손들이 이어 왔다. 그 때문에 우에스기의 이름을 지고 태어난 이들은 필연적으로 당주의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했다.

당주가 되는 이는 결국 한 사람뿐이고,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갔다. 즉, 패자는 모든 것을 잃었다.

승자는 후환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자칫 승자가 이른 죽음을 맞이할 경우, 패자는 언제고 다시금 그 자리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원하지 않기에 승자는 패자와 그 처자식들을 살해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에스기 가의 선조 중 누군가가 그 일을 망설였다.

‘우에스기’의 이름을 갖고 태어난 이상,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은 명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무사로서 전장에서 죽거나, 승자로서 편안히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러나 경쟁에서 패배하여 같은 가문의 형제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은 결코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기괴하기까지 한 고민 끝에 카게구미 가의 지하 뇌옥이 만들어졌다.

당주 경쟁에서 패배한 이와 그 처자식들은 호적에서 이름이 지워진 채 평생을 구금당한다. 최소한의 삶을 위한 음식만 제공될 뿐, 패자는 평생 해를 볼 수 없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경쟁자도 뇌옥에 갇히게 되면 오래지 않아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가 어떻게 죽어 가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즉, 지하 뇌옥은 패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공간이었다.

끔찍한 관습의 증거인 지하 뇌옥은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전대 당주는 카츠미가 태어나기 전, 자신의 자리를 위협했던 핏줄을 마지막으로 뇌옥에 가두었고, 그가 사망한 뒤로 한동안 뇌옥에 들어온 이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뇌옥에는 카게구미 자체를 없애려 한 남자, 페이진이 갇혀 있었다.

“이렇게 보니 반갑군.”

근육질을 자랑하던 그의 몸은 눈에 띄게 마른 상태였고, 제멋대로 수염이 자란 그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카츠미.”

호롱불을 든 채 뇌옥을 찾아온 카츠미는 페이진의 공허한 눈을 응시했다.

뇌옥은 끔찍한 공간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공간에서 패배자들은 비참하게 죽어 갔다.

어둠 속에 짐승처럼 방치된 수감자들은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했고,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수감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으며, 완전히 미쳐 자해하거나 스스로 굶어 죽는 결말을 택했다.

카츠미는 호롱불을 내려놓고 페이진 앞에 마주 앉았다.

“이런 결말을 바란 적은 없었어.”

“…….”

“우리의 인연도 벌써 십여 년. 그동안 여러 번 마주쳤지.”

카츠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다.

불처럼 타오르며 맹수 같은 면모를 보이던 페이진과 달리 카츠미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강처럼 고요했다.

둘은 전장에서 만나면 병기를 부딪치기에 앞서 간단한 게임을 벌여 룰을 정했다. 체스일 때도 있고, 장기나 바둑일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에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둘 모두 그 과정을 즐겼다.

체스 게임도, 병장기를 맞댄 결투도 승률은 5할에 가까웠다. 둘의 성품은 완벽하게 달랐지만, 항상 호각을 이루면서 경쟁해 왔다.

“페이진, 당신은 성급했지만, 그 와중에 대개 정확한 판단을 내렸어.”

페이진의 능력은 차라리 동물적인 육감에 가까웠다.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할 정도로 꼼꼼하지는 못하지만, 대강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이 가졌고, 뛰어난 행동력까지 겸비했다.

“결국… 실패했지.”

페이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페이진의 눈동자는 한없이 공허했다.

이전의 불같던 투지도, 젊은 부하들을 휘어잡던 카리스마도 없다.

페이진은 사업가로 안주해 버린 보스를 쳐 낸 뒤 환락가를 통합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용병과 캐피탈 클럽의 힘을 이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페이진은 자신의 보스를 살해한 배신자로 전락했고, 외부 세력에게 환락가를 통째로 넘기려 한 쓰레기가 되었다.

“아니. 당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카츠미의 목소리를 들은 페이진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애당초 우리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각오로 들어온 놈들이고, 우리에게 승산은 없었으니까.”

“…….”

페이진은 그들과 손잡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의 힘을 깨닫고 굴복했다. 도저히 마피아의 한 줌 세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넌 이겨 냈지.”

“요행이었어.”

자켄과 강철, 특히 신태일이라는 비대칭 전력이 상황을 반전시켰지만, 그건 결코 카츠미의 능력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패했을 전쟁이다.

그리고 이겨 낸 뒤가 더 큰 문제였다.

“간신히 이겨 냈지만… 적은 더 강력하게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어.”

적의 입장에서 간단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50구역은 고사 직전의 위기에 놓였다.

“페이진, 당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차라리 놈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놈들은 이제 50구역 자체를 아예 지워 버릴 거야.”

카츠미는 본래 말이 거의 없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페이진은 카츠미를 오랜 시간 알아 오면서 이토록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페이진은 뇌옥에 갇혀 모든 것을 포기한 이 와중에도 카츠미의 언변에, 카츠미의 진심 어린 고백에 놀라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페이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50구역을 두고 교섭이 벌어질 거야.”

“…….”

“도와줘.”

페이진이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 협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놈들과 한 번 손을 잡아 봤으니까?”

일을 주도한 드림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 페이진 따위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잔챙이에 불과했다.

아크는 아마 페이진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협상에 페이진이 낀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그러나 카츠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교섭에서 50구역은 한목소리를 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페이진, 당신의 힘이 필요해.”

페이진은 웨이창의 목을 날려 버린 직후, 별다른 저항 없이 천중회의 보스 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페이진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는 대단한 것이고, 여전히 페이진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페이진에게는 카츠미가 갖지 못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페이진이 나서면, 많은 이들이 따를 것임을 카츠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선택이 항복이든 저항이든 페이진은 여전히 환락가에 필요했다.

* * *

레미제라블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즈음, 창밖으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강필과 자켄이 떠나고 난 레미제라블은 조용했다.

레미제라블은 호화로운 장식 하나 없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바다.

하지만 지난밤, 이곳에서 꽤 많은 이름이 언급되었다. 강필과 자켄은 사람들을 장기판 위에 올려 두고 최선을 고민했다.

태일은 50구역 사람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가만히 듣고 있어야 했지만, 둘의 대화는 너무나도 익숙했고, 또 그만큼 불편했다.

가게 문을 닫고 담배를 입에 문다.

혁명군을 이끌던 당시, 태일은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 중 상당수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이길 수 없는 전장에 파견되었고, 미끼 역할로 내던져졌으며, 위험천만한 첩보 작전에 투입되었다. 태일은 작전을 세우거나 결정하는 주체였고, 그들의 죽음에 분명한 책임이 있었다.

물론 태일 역시 그런 이들의 등 뒤에 비겁하게 숨어만 있던 건 아니었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으며, 가장 위험한 현장에 앞장섰다.

태일은 그 가운데 수차례 살아남았지만, 그때마다 누군가를 잃었다. 그런 상실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익숙해져서도 안 될 경험이었다.

어쩌면 태일은 그런 경험들 속에서 차츰 망가져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태일은 모든 것을 잃고 전혀 다른 세계에 던져진 뒤, 거리를 두면서 앞에 놓인 문제에서 피하려 했다. 그러고 싶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태일은 가게 문을 잠근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열차가 멈춰 섰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50구역에 들어오던 열차는 화물과 여객을 합쳐 하루 평균 30여 대에 이르지만, 2주간 50구역에 들어온 열차는 열 대뿐이었다. 그렇게 실려 온 물품들은 전부 공장 지대에 공급되었다.

열차의 가동은 사실상 중지되었고, 그것만으로도 50구역은 유령도시처럼 변해 버렸다.

그나마 메타휴먼으로 자동화된 50구역 공장 지대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은 9할이 센트럴로 향할 것들이었다.

공장 지대는 센트럴의 필요에 따라 운행되고 있을 뿐, 이미 50구역 주민들의 생활과는 완전히 유리된 공간이었다.

솟아오른 공장의 굴뚝 연기를 바라보던 태일이 고개를 돌려 시장 입구를 응시했다.

‘…조용하군.’

본래부터 북적이던 곳은 아니지만, 새벽부터 소소하게 거래가 이루어지던 시장은 사실상 정지된 상태였다.

환락가에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연쇄적으로 시장에도 손님이 사라졌다. 환락가 상인들이야말로 시장의 주요 고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생필품을 판매하던 상인들은 때아닌 호황을 맞이했지만, 그조차도 물량이 들어오지 않아 판매대는 곧 비어 버렸다.

생필품의 가격은 하루에도 몇 배씩 뛰었고, 불안감은 그만큼 커져 갔다.

시장 입구에는 시뻘건 글씨가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열차를 가동하라! 상인들 다 죽는다!>

시장 건물들의 벽면에는 차마 공식적으로 쓰여지지 못한, 온갖 욕설과 악의적 낙서들이 가득했다.

의도적으로 남겨 둔 글과 욕설들은 상인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적은 센트럴이나 행정기관이 아니었다.

50구역에는 다섯 명의 의원과 LAPD 정도가 그나마 행정기관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의원들은 모두 살해당했고, LAPD는 마비되었다.

설령 의원들과 LAPD가 모두 멀쩡히 기능한다 해도 지금의 사태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의원들은 50구역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자들이고, LAPD 경찰은 당장에라도 다른 구역으로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난 공무원들이니까.

그들의 무용함을 주민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애초에 분노는 행정기관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표적은 이 일을 촉발한… 혹은 촉발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향했다.

<쪽발이 OUT! 짱깨 OUT! 양키 OUT!>

<우리의 땅에서 꺼져라!>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오랜만이군. 안 그래도 내가 직접 한 번 찾아가려 했지.”

덕곡상회에 들어서자, 대장이 자못 반갑게 태일을 맞아 주었다.

대장의 옆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넌 들어가서 차라도 내와라.”

명령을 받은 사내는 선뜻 가게 안으로 들어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대장은 쌀가게 안에 먼지 쌓인 탁상을 걸레로 가볍게 훔친 뒤, 자리를 내주었다.

“앉지.”

“…실례하겠습니다.”

쨍그랑!

순간, 안쪽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민호야…….”

“죄, 죄송합니다.”

안쪽에서 제법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태일은 그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지금껏 몇 차례나 함께 움직였던 저격수, 민호라는 사실을 알았다.

차가 나오기 전까지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흰머리에 주름살 가득한 대장의 얼굴은 자꾸만 하얀 늑대와 겹쳐보였고, 태일은 그런 대장과 마주하는 것이 썩 편하지 않았다.

하얀 늑대는 태일의 유년 시절 스승이고, 종국에는 비참한 끝을 맞았다.

태일은 그의 죽음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태일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여기 있습니다.”

잠시 뒤, 민호는 대장과 태일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순 율무의 구수한 향이 풍겨 온다.

“환락가에 유통되는 것들에 비하면 그리 고급스러운 물건은 아니네만…….”

“괜찮습니다.”

태일은 선뜻 대답하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하얀 늑대 역시 율무차를 가장 좋아했다.

각종 고급 차에 비해 율무차는 흔하디흔한 물건이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좋아했다.

한편, 민호는 공손한 태일의 모습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귀신 보듯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가면을 쓴 대장과 만났을 당시에도 거침없이 반말을 쏟아 내며 거칠게 굴던 태일이었으니 지금의 달라진 태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대장이었다.

“지난번에는 고마웠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전부 살아 돌아오지 못했겠지.”

대장은 부하들의 생환에 대해 태일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땡땡이친 직원을 찾으러 갔을 뿐입니다.”

“어쨌든 자네의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지.”

대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푸근한 쌀집 아저씨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레지스탕스의 대장이었고, 부하들을 위험한 작전에 투입한 당사자였다.

물론 태일에게는 그런 대장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딱히 감사 인사를 들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닙니다.”

“그렇겠지. 설마 쌀을 사러 온 것도 아닐 테고…….”

“마피아와 손을 잡으십시오.”

태일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실내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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