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47화 (48/220)

47화 명예를 잊은 자들 (5)

100여 년 전만 해도 대륙은 물론, 바다 건너에까지 수많은 국민국가가 존재했다.

그러나 센트럴의 성립 이후 국민국가들은 차례로 멸망했고, 대륙의 50개 구역이 남았다. 국가가 무너지면서 역사가 사라졌고, 역사 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센트럴로부터의 독립과 역사 시대로의 회귀를 원하는 사람들이 남아, 그들을 ‘레지스탕스’라 불렸다.

카츠미의 외할아버지이자 카게구미의 당주였던 우에스기는 그런 레지스탕스를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페이진이 만난 우에스기는 그 누구보다 레지스탕스와 닮은 사람이었다.

“무사의 명예를 기억하거라. 우리에게 명예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무사(武士)’란 고대의 어떤 계급을 말했다.

역사 시대보다도 앞선, 지금은 아예 잊혀 버린 고대. 이젠 그 고대의 무사들이 뭐라 불렸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에스기는 그처럼 정체조차 불명확한 고대 무사의 정신, 명예를 숭배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페이진은 그 고상한 명예가 박살 나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

뻐걱!

“끄, 끄으으윽…….”

용병에게 달려든 마지막 무사의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 나고, 입에서는 피를 뿜어냈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무사는 기어코 검을 고쳐 잡았다.

캉!

그러나 힘없이 휘두른 검은 이번에도 용병의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냉정한 표정의 용병이 주먹을 치켜들어 그대로 무사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으적!!

끔찍한 소리와 함께 붉은빛의 건틀릿이 무사의 미간에 정면으로 꽂혔다.

별다른 준비 자세도, 기교도 없는 단순한 주먹질. 그러나 그 주먹질로 얼굴이 함몰되어 버린 무사는 피를 내뿜으며 뒤로 나자빠졌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천중회의 마피아 중 상당수는 질려 버린 듯 시선을 슬쩍 돌렸다.

“흐하하하! 이거 대단하구만! 재밌어!”

그러나 페이진은 휘파람을 불어 대며 만족스럽게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그는 스포츠 경기의 관중마냥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온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카이. 하아, 하아…….”

피투성이 상태가 된 코우는 쓰러진 무사를 바라보며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가장 뒤편에 선 카츠미 역시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카츠미, 이제 좀 알겠냐? 너희들이 말하는 명예라는 건 그렇게 우스운 거야!”

페이진이 카츠미를 조롱하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미와 코우만이 버티고 선 가운데, 나머지 카게구미 무사 다섯은 무카이를 끝으로 전부 숨이 끊어졌다.

그사이, 천중회의 마피아들은 단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

카츠미의 호위 무사들을 잡는 데에는 A급 용병 한 명이면 충분했다.

이레귤러 용병의 몸뚱어리는 강철보다 단단했고, 무사들의 칼은 용병의 몸뚱어리를 베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사들은 달아나지 않고, 전투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무사들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악착같이 검을 휘둘러 댔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의미 없는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용병 역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사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그는 건틀릿 하나만을 끼운 상태로 표정 변화 없이 무사들을 전부 때려죽였다.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면서 무사들의 몸은 하나같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그러나 정작 무사들을 때려잡은 용병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무사 대 무사의 승부, 명예를 건 결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그런 것과 전혀 무관했다. 그저 일방적인 도살에 불과했다.

“이게 바로 진짜지! 압도적인 힘 말이야!”

두 눈이 충혈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페이진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이레귤러 용병의 압도적인 강함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페이진이었다.

만약 캐피탈 클럽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버지처럼 놈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용병의 손에 죽게 되는 쪽은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페이진에게 있어 카게구미 무사들이 맞아 죽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지금만 해도 페이진의 옆에는 A급 용병 여섯이 더 버티고 있다. 만약 용병들의 고용주가 마음을 바꾼다면, 페이진을 비롯한 천중회는 그 즉시 끝장날 것이다.

결국 공포를 숨기기 위해 페이진은 필사적으로 눈앞의 상황을 즐겨야 했다. 아니, 즐기는 척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끔찍한 현장에서 페이진의 신경을 건드린 이는 다름 아닌 카츠미였다.

“카츠미, 너희가 대체 뭘 할 수 있지? 이 압도적인 힘 앞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느냔 말이다!”

페이진의 얼굴은 공포를 숨기느라 이미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러나 막상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 카츠미의 표정은 한없이 담담했다.

피스톨을 쥔 페이진의 손은 이 순간에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칼을 쥔 카츠미 손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페이진은 뱃속에서부터 밀려오는 열등감과 자괴감을 애써 부정했다.

천중회 부하들조차 알지 못했지만, 사실 이건 전부 ‘쇼’였다.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해 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

공중에서는 스텔스 상태의 드론이 사거리의 광경을 촬영하며 비행하고 있었다. 캐피탈 클럽의 부자들은 화면을 통해 환락가의 살육을 관람하고 있을 것이다.

페이진은 그 리얼리티 쇼에서 살아남는 쪽을 택했고, 캐피탈 클럽의 부자들을 위해 리얼한 쇼를 연출해야만 했다.

결국 이 쇼는 카츠미를 주연으로 한 포르노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다.

“전부… 끝났어, 카츠미. 끝났다고!”

처음 코헨의 손을 잡을 적만 해도 캐피탈 클럽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들의 힘을 빌려 환락가의 마피아들을 전부 발밑에 꿇린 뒤,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을 물 먹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페이진은 곧 깨달았다. 캐피탈 클럽 부자들에게 있어 50구역의 대량 학살은 한낱 유흥거리에 불과하고, 마음만 먹는다면 페이진 따위 손끝 하나로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그들의 오버테크놀로지와 자금력, 무력은 애당초 페이진의 상상 범위를 아늑히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페이진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웨이창이 경고한 것처럼 그들의 개가 되었다.

카츠미는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한 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광기에 휩싸인 채 소리를 질러 대는 페이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용병,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호위 무사들.

상황은 최악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그녀의, 카게구미의 마지막 날인지도 모른다.

이미 12대장 중 열 명이 항복했다고 했으니, 남은 이는 둘뿐이다. 한 명은 바로 옆의 코우이고, 다른 한 명은 아마 오래전 은퇴한 자켄일 것이다.

승산은… 없다.

“코우, 물러서.”

카츠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주님……!”

“명령이야.”

당주의 명령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이다.

코우가 절뚝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무사의 명예의 근간에 깔린 충성심을 코우는 이 순간까지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사실 페이진이 애써 깔아뭉갠 명예라는 건 그토록 사소한 것이었다.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최악의 순간에마저 이성을 유지하고 신념을 지킬 수 있으니, 낡아 빠지긴 했을지라도 충분히 위대한 가치였다.

“끝까지 지켜봐라, 코우.”

“…명을 받듭니다.”

용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앞으로 나선 당주 카츠미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개미를 마구 밟아 죽일 때의 눈처럼 그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죄책감이나 고민도 없었다. 그저 벌레가 꿈틀거리는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볼 뿐이다.

카츠미는 자신보다 머리 두 개 정도가 더 큰 용병을 바라보며 양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는 충분히 힘이 실리지 않아요.”

한때 최강의 검사였던 자켄, 그녀에게 배운 대로 검을 단단히 쥔다.

자켄이 단 한 차례 보여 준 극검은 그토록 부드럽고도 자연스러웠다.

“베는 것은 억지로 상흔을 남기는 게 아니랍니다.”

바람이 불고, 그 안에서 흐름을 읽는다.

“그저 결을 읽고, 따라가는 거예요.”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긋는다.

위에서 아래로.

갑자기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켄의 극검을 보고 난 후로 매일같이 수만 번씩 검을 휘둘렀지만, 지금처럼 사방이 고요해진 적은 없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 짧은 순간, 카츠미에게는 그 어떤 욕심도, 두려움도 없었다.

“어, 어어…….”

지금껏 입을 꼭 다문 채 연달아 무사들을 살해하던 용병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카츠미의 칼날은 용병의 몸뚱어리 근처에도 닿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은 지금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쩌저저저.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마가, 입술이, 목이, 가슴이, 배가, 낭심이 차례로 갈라진다.

용병의 입에서는, 세로로 잘린 혀와 목구멍에서는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잠시 뒤, 용병의 몸이 좌우로 갈라지고 엄청난 양의 피가 튀었다.

곧이어 스텔스 모드를 유지하며 공중에서 떠 있던 기계, 드론이 반으로 쪼개져 추락했다.

퍽!

핏물 속에 부서진 기계 조각들이 힘없이 떨어진다.

반 토막이 난 용병의 시신과 갑자기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기계의 잔해.

그 광경 앞에서 천중회의 마피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 하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광소를 터뜨리던 페이진마저 입을 다물었다.

“인정하지.”

뚜벅뚜벅.

침묵 속에서 구릿빛 피부에 근육질의 다부진 몸을 가진 용병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3대 용병단 중 하나인 ‘바토르’의 대장, 수부티였다.

황야에서 가장 강한 용병을 꼽는다면, 많은 이들이 수부티를 꼽을 정도로 그는 용병들 사이에서도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수부티가 직접 나서자 페이진을 비롯한 천중회 단원들은 물론, 용병들 역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넌 꽤 강하다.”

동료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았건만, 수부티의 말투는 잔잔했다.

“…….”

카츠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부티는 기묘한 형태의 머스킷 소총을 한 손으로 들어 카츠미의 머리를 겨누었다.

철컥.

카츠미의 표정은 마치 꿈꾸는 것처럼 보여 주변의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코마 상태로군.”

일정 경지를 넘어선 직후, 한계를 넘은 이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 심연에서 빠져나온 이는 더욱 강해질 수 있지만, 카츠미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쉽구나.”

꽤나 뛰어난 자질이지만, 그녀는 수부티의 부하를 살해했다. 때문에 수부티는 카츠미를 살려 둘 수 없었다.

바토르 용병단의 단 한 가지 규칙 때문이었다.

― 피의 값은 피로 받는다.

뿐만 아니라 애당초 바토르 용병단이 받은 의뢰는 카게구미 당주의 살해였다.

수부티는 못내 아쉬움을 느꼈지만, 조금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수부티의 소총 총구에서 보라색 빛을 휘감은 산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수십 발의 총알들은 마치 유도탄처럼 기묘하게 회전했고, 카츠미의 정면뿐 아니라 좌측과 우측, 심지어 머리 위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술 같은 산탄 사격에 페이진을 비롯한 천중회 단원들은 넋이 나가 버렸지만, 용병단원들은 그저 담담했다.

수부티의 명성은 표적을 반드시 살해하는, 그의 신묘한 사격 실력에서 비롯되었다.

용병들은 방아쇠가 당겨지는 그 순간, 이미 카츠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구들이 카츠미를 향해 몰려드는 바로 그 순간, 카츠미의 몸뚱어리가 갑자기 뒤로 밀려났다.

찰나의 순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수부티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카츠미의 뒤쪽에서 그녀의 마지막 남은 호위 무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코마 상태의 카츠미를 밀어낸 이는 다름 아닌 코우였다.

“커어억…….”

수십 발의 총알들이 일제히 코우의 몸에 박혀 들었다.

죽음.

늘 각오해 온 일이었다.

아가씨를, 카츠미를 대신해 죽는 것이야말로 그의 숙명이고 바람이었다.

코우는 오랫동안 그 충성심이 그저 무사로서의 명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정작 그런 코우의 속내를 먼저 눈치챈 이는 다름 아닌 태일이었다.

다리를 제대로 못쓰게 된 와중에도 카츠미를 걱정하는 그를 보며 태일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네 사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고?”

“감히 나는 아가씨에게 그런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격렬히 부정하는 와중에 코우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다.

사실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카츠미의 생존을, 그녀의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사적인 감정이었다.

“아가…씨…….”

숨이 끊어지기 직전, 코우의 눈에 푸른 번개가 비쳤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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