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46화 (47/220)

46화 명예를 잊은 자들 (4)

갑자기 결투의 한가운데에 태일이 나타나자, 자켄은 잠시 주춤하고 말았다.

강필 역시 기다렸다는 듯 힘을 거두었다.

그런 둘 사이에 선 태일은 단숨에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센트럴, 캐피탈 클럽, 천중회, LAPD 배신자들까지 전부 한통속이야.”

앞뒤 맥락도, 근거도 없다.

사실 구구절절한 설명은 불필요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퍽!

태일은 기절한 굴드를 짐 덩이마냥 앞으로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LAPD와 카게구미 전부를 날려 버릴 생각이야. 50구역을 ‘청소’하겠다고 하더군.”

강필과 자켄 모두 굴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름 천중회에서 부두목 타이틀을 달고 있는 녀석인 만큼 환락가에서 놈을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태일은 볼썽사납게 기절해 있는 굴드를 바라보며 그로부터 털어 낸 정보를 읊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 다 50구역을 지키는 쪽 같은데… 아닌가?”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목적이 같다면 손을 잡고, 이 마당에도 고집을 부린다면 기꺼이 상대해 줄 뿐이다.

강필은 자켄을 바라보며 방금 태일에게 들은 말을 곱씹고 있었다.

‘50구역을 지키는 쪽’.

50구역 LAPD인 강필에게 지금 그 이상의 목표가 있을 리 없다.

콰앙!!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금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초조하게 검을 거둔 자켄이 태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카츠미는?”

“지금 만나러 가 볼 생각이야. 아마 사거리에 있겠지.”

아직까지 사거리 방향에서는 폭발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천중회는 분명 카게구미의 보스인 카츠미부터 잡기 위해 이미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이곳에 발목을 잡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지.”

염동력으로 조각들을 회수한 강필이 경찰차 열쇠를 꺼내 들었다.

자켄은 그런 강필을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지우는 세 사람을 태우고 멀어지는 경찰차를 바라보았다.

태일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방금 괴물 같은 힘을 보여 준 두 사람과 태일이 함께 움직인다면, 환락가에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태는 곧 마무리될 것이고, 그때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상황 판단을 마친 지우는 넋이 나간 채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앨리스에게 달려갔다.

거리의 상황은 끔찍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거리 전체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고, 눈을 뜬 채 숨이 멎은 시체들이 곳곳에 굴러다녔다.

“앨리스, 괜찮아?”

“으응…….”

태일은 지우와 앨리스를 보고도 아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앨리스 역시 딱히 그의 무심함이 섭섭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것을 앨리스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 앨리스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지금껏 앨리스는 자신이 사용하던 번개의 소울이 오롯이 자신의 힘이라 여겼다.

하지만 마담에게 힘을 전달하는 순간, 앨리스는 일종의 이질감을 느꼈다.

그 이유도, 원리도 모른다.

그러나 앨리스는 마담에게 힘을 전달하려는 바로 그때, 태일의 소울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태일의 소울을 끌어왔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앨리스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만약 내 힘이 도둑질한 거라면? 나로 인해 아저씨한테 피해가 간다면?’

물론 착각일지도 모른다. 태일이 의도적으로 도와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앨리스에게는 계속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앨리스!!”

지우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앨리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게 안에 들어가 있자. 여긴 위험해.”

“으, 으응…….”

바로 그때, 태일이 버려 두고 간 굴드가 신음 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크으윽…….”

퍽!!

지우는 들고 있던 총으로 머리통을 강하게 내려쳤고, 굴드는 그대로 다시 기절해 버렸다.

지우는 잠시 굴드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지우가 제아무리 어른인 척 굴어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총을 겨눈 지우의 손이 덜덜 떨려 온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다.

약간의 힘을 주기만 하면 천중회의 부두목의 머리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지우야…….”

“하아, 하아…….”

앨리스가 겁에 질린 눈으로 잔뜩 흥분한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와 앨리스는 그저 아이들일 뿐이었다.

툭!

얼마간 굴드의 머리를 겨누던 지우는 결국 총구를 내린 뒤, 총을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앨리스의 손을 붙잡았다.

“드, 들어가자!”

지우와 앨리스는 황급히 자켄의 옷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서인지 이 순간, 지우의 귀에 태일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너희 같은 꼬마들에겐 죄가 없어. 죄는… 어른들에게 있는 거야.”

* * *

강필이 운전대를 잡은 가운데, 차 안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흘렀다.

뒷자리에 앉은 자켄은 초조한 표정으로 도신을 매만지는 중이고, 강필은 말없이 운전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한편, 조수석에 앉은 태일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경찰차를 탄 것은 어디까지나 힘을 온존하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

그러나 정작 숨 막힐 듯한 차 안에 있으려니, 1분이 한 시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싸우던 두 사람이니, 이런 분위기는 당연한지도 몰랐다.

태일은 무거운 분위기라도 풀어 볼 겸 나름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뭣 때문에 그렇게 서로 죽일 듯 싸운 거지?”

굴드를 붙잡을 당시만 해도 강필이 자켄을 구원하러 온 그림이었다.

수많은 침입자에게 공격당한 쪽은 자켄이었고, 강필은 그 소란을 끝내러 갔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어쩌다 두 사람이 죽자 살자 싸우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싸움을 걸어오시기에 응했을 뿐이에요.”

먼저 대답한 쪽은 자켄이었다.

순간, 운전대를 잡은 강필의 팔뚝에서 힘줄이 솟았다.

“난 그저 무기를 버리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지시?”

자켄이 별 헛소리 다 듣는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환락가에서 나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오만하군.”

“그럴 자격이 되니까.”

이젠 아예 반말로 서로 맞받는다.

고고하던 마담 히나코도, 과묵하던 서장 강필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두 사람은 격앙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50구역이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아니지. 50구역이 이 모양 이 꼴이라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던 거야.”

“비겁한 정당화군. 그 결과가 지금 이 사태 아닌가?”

“위선 떨지 마. LAPD가 제구실만 했어도 이 꼴은 안 났어.”

태일은 다시 한번 후회했다.

두 사람의 말문을 열게 만든 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둘 다 단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는 살벌하게 변해 있었다.

사실 둘이 싸우게 된 경위는 별게 아니었다.

강필은 막무가내로 LAPD의 공권력을 행사하려 했고, 자켄 역시 막무가내로 돌파하려 했다.

그저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다.

둘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었다.

“저기…….”

태일이 입을 떼자마자 두 사람의 살벌한 시선이 한꺼번에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포위된 모양인데.”

태일의 말처럼 사거리로 향하는 길목에는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에 숨겨진 총구들이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곧이어 경찰차가 멈춰 섰다. 그렇게 멈춰 선 차 안에서 강필과 자켄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 혼자 다녀오지.”

“나 혼자면 충분해요.”

잠시 서로 노려보던 둘은 경쟁적으로 차에서 내렸고, 저마다 다른 물건을 꺼내 들었다.

“LAPD다! 다들 무기 버려!”

강필은 경찰 신분증을 꺼내 들었고…….

“길 열어, 새끼들아.”

자켄은 칼을 빼 들었다.

“하아…….”

태일은 그 와중에도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꼴을 우습다는 듯 바라보던 용병 하나가 피식 웃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조져.”

* * *

일명 ‘마피아 사냥’.

용병대장 마틴에게 이번 환락가 의뢰는 그야말로 훌륭한 이벤트였다.

난다 긴다 하는 황야의 용병단들이 환락가에 투입되었다.

사실 마약이나 유통하던 마피아들이 전쟁 용병들의 상대가 될 리 없으니, 애당초 이 의뢰는 3대 용병단 중 한 곳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캐피탈 클럽은 그야말로 돈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캐피탈 클럽의 눈먼 돈을 받아 든 용병단은 휴가 떠나는 기분으로 환락가에 들어왔고, 길목 한 곳을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쾅!!

“화려하게도 날뛰는구만.”

“부럽게시리. 우린 길가나 지키는데… 쯧.”

마틴의 용병단원들은 입맛만 다시며 난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지기 역할을 맡은 마틴의 용병단과 달리 거대 용병단들은 가게의 여자들과 재산을 실컷 털어먹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그런 도적질 따위에 흥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까짓 게 아냐.’

지금 마틴은 멍청한 용병들과 달리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피아가 없어진 50구역 환락가 가게 업주들은 새로운 보호자가 필요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업주들도 ‘보호’할 겸 아예 환락가에 눌러앉아 버릴 셈이었다.

잘 닦인 도로, 휘황찬란한 조명, 곳곳에 널린 술병과 여자들.

그 모든 것을 본 이상, 마틴은 먼지 가득한 황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지금의 기회를 잘만 잡는다면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잘만 하면 가게 몇 개는 차지할 수 있겠지.’

마틴이 그렇게 장밋빛 꿈을 꾸고 있던 중이었다.

“대장, 저기 좀 보십쇼!”

“뭐야, 저건?”

줄곧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던 거리에 뜬금없이 경찰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부하들은 마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서 경계하며 총을 겨누었다.

황야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용병들이니, 몸에 밴 전문성이 이렇게 발휘되는 것이리라.

잠시 뒤, 한 쌍의 남녀가 경찰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차에서 내린 둘은 제각기 경찰 신분증과 칼을 꺼내 들더니, 한차례 희극을 벌였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멍청이들이군.’

그래도 나중에 성과급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면 몇 놈이라도 처리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했다.

“조져.”

곧이어 차에서 또 한 놈이 내렸다.

총 세 사람.

3분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분 뒤.

“이건 꿈이야…….”

마틴은 가만히 선 채 눈앞의 처참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환락가? 뭐야, 이번 작전은 휴가야?”

애꾸눈 자툴. 지금 그의 몸뚱아리는 목이 달아난 채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환락가 미녀들은 전부 내 거다, 이것들아. 흐흐흐.”

슬레이어 먼키. 양팔에 철 조각이 박혀 총을 떨어뜨린 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피아들은 황금을 쌓아 놓고 산다지? 대장, 이번 기회에 거나하게 한탕 하자고.”

거인 바바야. 온몸이 새까맣게 타서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S급 이레귤러가 세 명이라고? 이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사정거리 안의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여검사, 철 조각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염동술사, 번개를 사용하는 자연계 능력자까지…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이었다.

3대 용병단 정도가 아닌 이상, 눈앞의 셋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기야! 전부 사기라고!”

얼이 빠진 마틴은 그대로 등을 돌려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용병단원들이 끔찍한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지만, 공포에 질린 마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두 사람,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는데?’

태일은 앞장선 두 사람을 따라가며 꽤 놀라고 있었다.

영역 안에 들어온 적과 총알은 자켄이 닥치는 대로 벤다. 방어와 돌파.

멀리 흩어져 있는 적은 강필이 저격한다. 공격과 엄호.

어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역할 분담이지만, 손발이 맞지 않는 능력자들의 협공은 혼자 싸우는 것만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켄과 강필은 마치 오래 함께한 콤비처럼 정석적인 협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켄은 강필에게 날아오는 총알들까지 모조리 베어 내며 돌파하고, 강필은 자켄을 노리는 저격수들을 빠르게 제거하며 페이스에 맞추었다.

전투 중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없지만, 둘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찾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태일은 용병들을 지휘하는 베테랑들을 골라 처리했고, 혼란에 빠진 용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세 사람이 50인의 용병단을 괴멸시킬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3분이었다.

“굳이 죽일 것까진 없잖나!”

싸움이 끝나고 서둘러 사거리로 달려가는 자켄의 뒤쪽에서 강필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자켄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LAPD 신분증? 장난해? 얘들이 그딴 거 신경이나 쓸 거 같아?”

도무지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