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명예를 잊은 자들 (2)
“담배 있나?”
“안 피워.”
“유감이네.”
“애당초 당신, 담배 피우는 건 맞아?”
“예전에는. 지금은 끊었어. 근데 차 안에도 없나? 누가 남겨 뒀을 법도 한데…….”
“경찰차에서 담배를 찾나?”
태일은 강필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납함을 뒤졌다.
어느새 강필이 운전하는 경찰차는 환락가에 들어선 참이었다.
“젠장, 난리구만.”
강필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고가 들어온 곳은 자켄의 옷가게였다. 그러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그 외에도 몇 곳이 더 있었다.
환락가에서는 지금 이 순간, 대대적인 습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강필에게는 이 습격을 억제할 병력이 없었다.
끼이이이익!
강필은 운전하던 경찰차를 멈춰 세운 뒤, 조수석에 앉은 태일을 바라보았다.
“당신, 이만 레미제라블로 돌아가.”
“…….”
“상황이 이 지경인데, 당신 가게가 걱정되지 않나?”
강필은 이 다급한 순간에조차 태일의 사건 개입을 막으려 했다.
태일은 강필의 한결같은 태도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긴, LAPD가 완전히 박살 났으니 진정한 의미의 무법 지대구만. 이래서야 내 가게도 위험하긴 하지.”
태일이 비아냥거리자 운전대를 쥔 강필의 팔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LAPD가 박살 나? 누가 그래?”
태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경찰들은 대부분 배신했고, 일부는 배신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장량은 홀로 남아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라고는 단 한 명, 서장인 강필뿐이었다.
“바 앞까지 태워다 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빨리 현장으로 가 봐야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내려.”
강필은 다시금 태일을 밀어 냈다. 정말이지 지독한 고집이었다.
“뭐, 내리라면 내려야지.”
툴툴거리며 차에서 내린 태일이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차문을 닫았다.
강필도 조금은 미안했는지 창문을 내려 태일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신세를 졌어. 고맙게 생각한다.”
강필에게 있어 그런 감사 표시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기어코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고야 말았다.
“나중에 의로운 시민상이라도 추천해 주지.”
방심하고 있던 태일은 강필의 말에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 했다.
다른 세상에서는 이름난 수배범이던 태일이다. ‘의로운 시민상’이라니.
간신히 웃음을 참은 태일은 벌게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크흠, 정말… 고마운 말이네.”
한편, 강필 역시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렇게 경찰차가 시야에서 멀어진 뒤, 태일은 품에 넣어 둔 세연의 시계를 꺼내 들었다.
째깍, 째깍.
시계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고 있다.
시계를 뒤집자 뒷면에 붙여 둔 작은 메달이 태일의 시선을 붙잡았다.
셸터가 테러를 일으키던 날 밤, 태일은 앨리스에게 같은 모양의 메달을 건네주었다.
한때 소울 능력자들끼리 연락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던 메달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거든 이 메달에 소울을 주입해. 그럼 나한테 신호가 올 거야.’
당시 중앙역에 있던 아이들은 안전했고, 그날 이후로도 이때껏 메달에서는 아무런 신호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메달은 마치 발광체처럼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태일은 시계를 가만히 주머니에 넣은 뒤, 환락가 유일의 옷가게 쪽을 바라보았다.
파지지지지―
태일의 다리에서 미세한 스파크가 일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태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탕!!
“자켄 님…….”
총성과 함께 여검사의 몸뚱어리가 무너져 내린다.
“컥!!”
그러나 그렇게 쓰러지는 와중에도 여검사가 던진 비수가 가까이 있던 용병의 목에 쑤셔 박혔다.
“저, 저런!!”
반대편 건물 옥상 위에서 그 꼴을 목격한 용병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켄의 일격을 본 용병대장은 거리를 두었고, 포위망은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바로 그 순간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자켄을 비롯한 여검사들은 거미줄처럼 펼쳐진 골목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여검사들은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용병들을 교란했다.
담벼락이나 지붕 위를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넘나들었고, 고작 몇 분 사이에 저격수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뒤를 쫓아 골목 안으로 들어간 부하들은 와이어 트랩으로 인해 위치가 노출되었고, 잠깐 사이에 수십 명의 목이 달아났다.
“이건 말도 안 돼…….”
간신히 열세 명의 여검사를 잡았지만, 그사이 용병단의 숫자는 30%로 줄어 있었다.
“이제 거의 끝났어.”
용병대장의 뒤쪽에서 굴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그 여자를 끝으로 자켄의 부하 열셋은 전부 잡았다. 이제 자켄만 잡으면 끝이야.”
천중회 측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싸우는 시늉만 했을 뿐, 제대로 적과 맞붙지 않은 것이다.
“이 개자식!!”
용병대장이 이를 뿌득 갈며 몸을 일으켜 굴드의 멱살을 잡았다.
굴드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런 굴드의 뻔뻔함이 용병대장을 자극했다.
“감히 우리를 미끼로 삼아?!”
“미끼? 조심성 없이 달려든 건 네놈들이야. 내가 분명 경고했지, 무시하지 말라고.”
그것은 처음부터 자켄에 대한 경고가 아니었다.
굴드는 흥분한 용병대장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50구역에 들어온 이상 마피아를 우습게 보지 마라. 밖에서 얼마나 날렸는지 몰라도 이 바닥에서 함부로 날뛰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갈 거야.”
“…이 새끼가!”
용병단은 50구역 근방의 초원을 누비던 베테랑들이었다. 센트럴의 명령을 받고 파견된 지역 방위군을 전멸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검증된 조직이었다.
그런 용병단에게 있어 50구역 환락가 마피아는 어설픈 갱스터에 불과했다. 상인들을 털어먹고 살면서 마약이나 거래하는 쓰레기들에게 진짜 군인이 당할 리는 없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철컥!
“이 손 좀 놓지?”
“이 새끼……!”
“아직은 같은 편이잖아?”
용병대장은 자신의 배에 겨눠진 굴드의 총구를 보며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굴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가장 무서운 괴물이 남았거든. 우리의 못다 한 이야기는 그 뒤에 하지. 어때?”
“…….”
용병대장은 그런 굴드를 노려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굴드의 시선은 이미 용병대장이 아닌 옷가게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왔다!”
지금껏 교란 작전을 펴며 용병 수십의 목을 베어 버린 자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굴드 역시 고개를 돌려 긴장한 얼굴로 여우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무전기에 나지막이 명령을 내렸다.
“전부 가게 앞으로 모여라. 표적은 하나, 여우가면이다.”
여우 가면 뒤편, 히나코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켄’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히나코’로 살아가기 위해 그녀는 많은 것을 버렸다.
카게구미라는 조직을, 아버지 우에스기를, 수많은 부하들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세 명의 부하는 히나코의 곁에 남았다. 옷가게 근방을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히나코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라 주던 열세 명의 부하, 아니, 딸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히나코는 다시금 살인귀 자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가만히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는다.
‘…여기까지인가.’
그러나 마지막을 각오한 이 순간에도 한 가지 미련이 남았다.
당주, 그녀를 지켜야 했다.
그것만이 지금 그녀를 버티게 하는 이유였다.
환락가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카게구미의 사업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당주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살인귀로서 한 명이라도 더 베는 것뿐이리라.
“잡아!”
용병대장의 목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수십 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검을 부드럽게 횡으로 긋는다. 그와 함께 검의 간격만큼 절대적인 공간이 형성되었다.
잠깐 사이에 공간으로 들어온 총알들 전부가 수십 토막으로 갈라졌다.
“저년도 이미 지쳤어! 아까에 비해 훨씬 공간이 줄었다! 3보 앞으로!”
굴드의 지시에 따라 천중회 마피아들이 착실하게 간격을 좁혀 왔다.
굴드는 줄곧 자켄의 간격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간격 안으로 들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냥감을 몰아넣듯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제 자켄의 간격은 처음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여우 가면의 뒤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군.”
마음을 굳힌 자켄이 별안간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덩달아 굴드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간격을 유지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마피아들의 움직임 속에서 간간이 발사된 총탄이 자켄을 노렸다.
그러나 자켄의 간격 안으로 들어간 탄들은 어김없이 토막 나 그녀의 몸에 닿지 않았고, 자켄의 속도 역시 줄지 않았다.
“망할 괴물 같으니!”
굴드의 옆에 서 있던 용병대장이 이를 갈면서 소총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자켄이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굴드와 용병대장이 위치한 옥상까지는 꽤 간격이 있었다. 천중회의 단원들도 굴드의 지시에 따라 충분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켄의 칼이 비스듬히 위로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본 굴드는 목덜미가 스산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무, 물러서! 물러서!!”
스각!!
자켄의 칼이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툭, 툭, 툭.
바람에 따라 수십 개의 목이 한꺼번에 굴러 떨어진다.
자켄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마피아들의 목이었다.
그중에는 굴드의 바로 옆에서 소총을 조준하고 있던 용병대장의 목도 있었다.
굴드의 간격 계산을 눈치챈 자켄은 처음부터 함정을 팠다.
굴드의 계산을 역이용하여 간격을 좁힌 뒤, 마지막 순간에 최대한의 간격을 펼친 것이다.
공격을 마친 자켄이 가만히 검을 늘어뜨렸다.
무겁다.
조금 전의 일격을 끝으로 자켄에게는 더 이상 검을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끗 차이였나.’
결국 굴드는 잡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촉을 발휘한 놈이 용병대장을 버려 둔 채 황급히 몸을 뺀 것이다.
굴드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들은 수십의 천중회 마피아들 역시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무엇보다 자켄 본인 역시 이미 지쳐 있기에 예상보다 간격이 넓게 확장되지 않았다.
‘실패다.’
수십의 목을 베었어도 여전히 적은 많았다.
반면, 자켄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전투를 포기한 순간, 두서없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무사히 피해야 할 텐데…….’
가게 안에는 앨리스와 지우가 있다.
그 아이들 덕분에 모처럼 재미를 느꼈다. 특히 앨리스는 잘만 성장한다면 굉장한 능력자가 될 것이다.
‘카츠미는 무사할까?’
아직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떠안은 당주를 떠올린다.
카게구미의 늙은 하이에나들이 그녀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지금껏 하이에나들은 자켄의 눈치를 보며 반란을 저어했지만, 더 이상 당주를 지켜 줄 수 없었다.
카즈미는 이제 짐승들의 한가운데 내던져졌다.
‘신이시여…….’
모든 힘을 소진한 지금, 자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마, 망할!”
간신히 목숨을 건진 굴드가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날려 피했음에도 그의 목은 얕게 베인 상태였다.
방금 일격으로 간신히 온존하던 천중회 전력의 절반이 날아갔고, 용병단은 대장을 포함해 사실상 전멸했다.
자켄과 열세 명의 여무사를 상대하며 무려 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낳은 것이다.
“저런 괴물 같은 년!!”
마지막 일격에서 목숨을 건진 다른 부하들 역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앞에 굴러 떨어진 머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켄은 칼을 늘어뜨린 채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었다.
굴드가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년, 더 이상 못 움직인다! 끝장내 버려!”
“마담!!”
그 순간, 가게 안에서 갑자기 웬 꼬맹이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러나 굴드의 시선은 오로지 움직임을 멈춘 자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이면 쓰러뜨릴 수 있다.
자신의 손으로 환락가 전설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하들은 조금 전의 일격에 압도된 나머지 움직이지 못했다.
“이 멍청이들아, 총 들어! 저년은 이미 산송장이란 말이야!!”
50구역의 전설을 자신의 손으로 끝낸다는 희열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본 압도적인 힘에 질렸기 때문인지, 굴드의 손끝 역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부하들이 자켄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여전히 자켄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처형’뿐이다.
그렇게 굴드가 손을 들어 올려 처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빵빵!!
갑자기 골목 저쪽에서 웬 순찰차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뭐야, 저건?!”
굴드가 얼빠진 얼굴로 경찰차를 바라보던 중 바로 뒤쪽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작 그만. 움직이지 마라.”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