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43화 (44/220)

43화 명예를 잊은 자들 (1)

빠아아아아앙!!

오후 일곱 시를 막 넘긴 시점의 50구역 역전은 제법 떠들썩했다.

방금 막 50구역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열차가 도착한 참이었다.

제법 많은 젊은이들이 기지개를 켜거나 목을 돌리며 열차에서 내렸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열차에서 내리는 남자,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얇은 카디건을 걸친 여자 등 도무지 50구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 안경, 목걸이나 반지 등은 전부 쉽게 볼 수 없는 명품들이었다.

게다가 젊은이들마다 뒤로는 양복 차림 비서와 경호원이 졸졸 뒤따르고 있었다.

대륙 곳곳의 부잣집 자제들이 환락가를 즐기기 위해 50구역에 방문한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는 법인카드 사용을 위해 ‘시장 조사’ 따위 그럴듯한 명분을 붙였을 것이다.

환락가에서 테러 사건이 벌어진 지 2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흥을 즐기려는 이들의 의지를 막지는 못했다. 애당초 그런 테러 따위 평민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있어 가장 짜증 나는 것은 테러 따위가 아니라 열차 특실 세 개를 전부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드림코퍼레이션이 열차의 특실 전부를 예약한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일반석을 타고 와야 했던 것이다.

열차에서 막 내려 뻐근한 몸을 푼 이들은 하나같이 불만 섞인 얼굴로 열차의 특실 칸 쪽을 흘깃 노려보았다.

철컥! 철컥!

마침내 특실칸들의 문이 열린다.

두 번째 칸에 머무르고 있던 경호원들이 가장 먼저 쏟아져 나오더니, 맨 앞 칸의 입구 쪽에 사열하듯 늘어섰다. 그렇게 늘어선 이들의 모습은 마치 군대와도 같았다.

곧이어 세 번째 칸에서 카메라나 조명 판을 든 이들과 행정가처럼 보이는 이들이 줄줄이 내렸다.

동행자들의 떠들썩한 퍼포먼스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던 중, 특실 맨 앞 칸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정작 특실 첫 칸에는 단 두 사람, 금발의 젊은 남녀만이 타고 있었다.

“저 둘은?!”

“서, 설마…….”

호기심과 질투가 뒤섞인 얼굴로 떠들썩한 의전을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이 별안간 새하얗게 질렸다.

첫 번째 칸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흰 피부에 큰 키, 갸름한 얼굴까지, 마치 모델 같은 외모의 20대 쌍둥이였다.

두 사람을 목격한 이들은 허겁지겁 각자의 회사나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드림코퍼레이션의 쌍둥이가 50구역에 나타났다! 두 사람이 함께!’

‘T.I.P’라는 이니셜 외에 누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드림코퍼레이션의 사장에게는 그를 대신해 움직이는 자녀들, 쌍둥이 ‘카렌’과 ‘아크’가 있었다.

둘은 같이 움직이는 일이 좀처럼 없고, 일처리 방식도 매우 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두 사람이 함께 50구역에 방문했다.

이 소식은 분명 전 세계의 증시를 뒤흔들 터였다.

이제 모든 정계, 제계의 시선은 50구역에 몰리게 될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네.”

카렌이 투덜거리며 멀리 붉은 산을 노려보았다.

화보 촬영과 인터뷰 다섯 건, 유명 오페라 공연까지 전부 취소한 채 50구역에 파견된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전용기도, 개인 차량도 아닌 구식 열차는 매우 불편하고 번거로운 이동 수단이었다. 증기기관의 소리에서부터 천박한 탑승객들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그나마 만나고 싶었던 친구가 50구역에 있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지만, 그녀가 고작 몇 시간 전에 떠났다는 소식까지 들은 참이었다.

그러나 이번 50구역 여행에서 최악은 역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쌍둥이 동생, 아크였다.

“왜? 모처럼의 열차 여행도 좋잖아?”

늘 그렇듯 선글라스를 낀 아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카렌을 바라보았다.

티 없이 밝고 천진한 미소.

아크의 수많은 여성 팬들은 아크의 미소야말로 드림코퍼레이션 최고의 자산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그러나 카렌은 아크의 미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크는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많은 회사들을 박살 냈고, 수많은 정치인들을 무릎 꿇렸다.

기업가들에게 아크는 ‘조커(Joker)’라 불렸다.

카렌이 애써 외면하자, 아크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도로나 비행길은 전부 막혀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누나.”

“그런 걸 가능하게 만들라고 센트럴에 그 엄청난 정치자금을 대는 거 아닌가?”

50구역에 들어오는 대륙의 끝자락, 그 길목의 버려진 공장들과 넓은 초원 지대에서는 수많은 용병 집단과 히트맨 조직, 그리고 레지스탕스들이 날뛰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무장 세력들이 공존하는 만큼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고, 센트럴 정부는 초원 지대에서 개인 이동 수단의 이용을 금지했다.

때문에 드림코퍼레이션의 부사장인 카렌조차도 개인용 차량이나 전용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카렌의 투덜거림에 아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나, 유통망을 Z―rail로 일원화하면서 생긴 이득이 얼마라고 생각해?”

“…….”

아무리 난폭한 무장 세력들이라 해도 열차와 철로를 공격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들 역시 물건을 조달하고 유통할 통로를 하나 정도는 열어 둬야 하기에 생긴 암묵적 규칙이었다.

더구나 Z―rail은 공공연히 밀수에도 손을 대고 있기에 아예 수많은 무장 세력들과 결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Z―rail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 주었고, Z―rail의 대주주인 드림코퍼레이션 역시 꽤 큰 수익을 얻었다.

카렌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굳이 아크가 콕 집어 언급하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누나의 말이 맞아. 이젠 정리할 때가 됐지. 그동안 제법 밥값을 해 줘서 숨은 붙여 두었는데…….”

아크의 말투는 마치 버릇 나쁜 강아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가벼웠다.

“이제 제 역할을 못 하니 전부 없애야지.”

그런 아크의 말에 카렌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명령이니?”

“글쎄.”

아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정확한 답을 피했다.

지난 몇 주간 50구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번번이 경영진을 자극했다.

지금껏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독점적 유통망, 철도에서 테러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마약 유통 건에서 드림코퍼레이션의 이름이 언급되어 총장의 연락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마피아들이 거래 제안을 거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드림코퍼레이션 입장에서 꽤 괜찮은 캐시카우였던 50구역이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지금껏 키워 온 개가 주인을 몰라보고 이빨을 드러낸다면, 그냥 둘 수는 없잖아?”

50구역의 파괴를 말하는 아크의 미소는 그 누구보다 선해 보였다.

카렌은 그런 동생의 대답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먼저 열차에서 내렸다.

* * *

자켄의 옷가게.

그동안 이 괴상한 옷가게는 마피아 3대 세력 모두 손대지 않았다. 그건 오랫동안 지켜진 50구역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시간 사이 환락가의 규칙들은 모조리 무너졌고, 자켄의 옷가게 역시 표적이 되었다.

자켄의 옷가게 주변에는 수많은 마피아와 용병들이 집결해 있었다.

한눈에 봐도 150명은 가뿐히 넘는 숫자였다.

“호오, 여자 열네 명이라? 큭큭.”

용병대장이 가소로움을 넘어 귀엽기까지 한 여자들의 면면을 비웃으며 바라보았다.

옷가게 입구에는 하얀 여우 가면을 쓰고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검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로 검은 옷차림의 여검사 열세 명이 적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여우가면의 뒤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건방진 애송이들 같으니.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여우가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환락가 바깥에서 파견된 용병들은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여무사들은 적이 아니라 소소한 유희거리에 불과했다.

심지어 용병들 중에는 여무사들을 비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음담패설을 건네는 놈들도 있었다.

“어이, 아가씨~ 그 위험한 물건 내려놓으라고. 이 오빠가 더 좋은 방망이를 선물해 줄게.”

“낄낄~ 그래그래. 그 몸매가 너무 아깝잖아!”

반면, 페이진의 명령에 따라 자켄의 옷가게를 포위한 부두목 굴드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저런 멍청이들 같으니!’

그래도 나름 용병대장에게 슬며시 경고했다, 마피아들을 절대 얕보지 말라고.

서거걱!

여유롭게 떠들던 용병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고,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툭! 툭!!

조금 전, 음담패설을 던진 용병 둘의 머리가 몸뚱어리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의 목이 어떻게 베어진 것인지, 누구의 검이 어떻게 휘둘러졌는지 보지 못했다.

단지 여우가면이 쥔 칼의 방향이 어느새 미묘하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젠장.”

용병대장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레귤러!”

50구역 살아 있는 전설적인 검사 ‘자켄’, 그녀는 홀로 마피아 일백의 목을 벤 괴물이다.

그리고 이레귤러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거리를 확실히 두지 않으면 당한다!”

굴드가 목소리를 높이자, 용병대장은 그제야 주변의 진형을 살폈다.

용병들이 가장 앞쪽에 서 있고, 굴드를 비롯한 천중회 마피아들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제대로 정보조차 주지 않은 채 적을 얕보지 말라는 소리나 지껄이던 굴드는 그 누구보다 안전한 장소에서 용병들을 사지로 밀어 넣고 있던 것이다.

“다들 거리를 벌려. 저격수, 위치로.”

용병대장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켄의 옷가게 안에서는 늘 그렇듯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숭고하고 엄숙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속에서 지우와 앨리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몰려든 적에 맞서기 위해 마담과 여검사들이 검을 빼 들었지만, 이미 전력에서 너무 큰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처음 두 용병의 목이 날아간 이후, 적은 거리를 넓히며 저마다 총을 꺼내 들었다. 그 와중에 반대편 건물의 지붕 위쪽으로 저격수들이 슬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래 버티긴 힘들 거야.”

앨리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사이, 지우는 수화기를 붙잡은 채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왜 아무도 안 받는 거야?”

LAPD도, 레미제라블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지우가 수화기를 집어 던진 뒤, 앨리스에게 다가갔다.

“앨리스, 여긴 틀렸어. 일단 뒷문으로 빠져나가자.”

“…….”

앨리스가 가만히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슬픔과 더불어 감출 수 없는 실망이 떠올라 있었다.

지우 역시 그런 앨리스의 눈빛을 읽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살아야 해, 앨리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샬롯의 밑에 있을 때부터 지금껏 앨리스는 지우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지우는 앨리스에게 가해지는 매질을 대신 맞고, 앨리스를 위해 태일이나 자켄 같은 괴물들의 곁에 머물렀다.

반드시 지켜내야 할 존재, 지우 자신이 강해져야 하는 이유… 그건 바로 앨리스였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지우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우에게 있어 앨리스는 그 무엇보다 우선했다.

지금까지 앨리스는 줄곧 그런 지우를 믿어 주었다.

“갈 수 없어.”

앨리스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지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앨리스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앨리스!”

늘 자신의 뜻에 따라 주던 앨리스였다. 가끔 자신이 멍청한 소리를 내뱉을 때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럼에도 앨리스는 늘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 앨리스는 지우의 손을 놓았다.

“혼자 가.”

“…….”

“난 남을 거야.”

파지지직―

앨리스의 손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런 앨리스의 손바닥 위에는 태일에게 받은 동그란 메달이 놓여 있었다.

탕!!

바로 그 순간, 바깥에서 거대한 총성이 들려왔다.

자켄을 비롯한 여검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지우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수화기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LAPD입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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