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39화 (40/220)

39화 환락의 밤, 배신의 낮 (3)

“…뭐라고요?”

수화기를 든 제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의원님의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제인의 손이 떨렸다.

아버지는 실패를 모르는 남자였다.

‘브레드필드’라는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재교육을 받고, 역사 시대가 끝난 뒤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센트럴의 정계에 입문했다.

빠른 속도로 상원의원의 자리까지 오른 그에게는 조금의 변수도 허용하지 않는 냉철함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잔혹함이 있었다.

오로지 아버지만을 담당하는 전문의만 최소 다섯 명 이상이고, 몸에 좋다는 온갖 영약들이 아버지만을 위해 센트럴로 조달되었다.

그런 남자가 이렇게 이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걸까?

[유언을 위해 아가씨를 모셔 오라는 의원님의 지시에 따라 저희 직원들이 50구역으로 향했습니다. 앞으로 한 시간 뒤, 아가씨 사무실 앞으로 도착할 겁니다.]

“한 시간이라고요? 그렇게 빨리……!”

[의원님께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단호한 보좌관의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비보를 전하는 것조차도 하나의 일일 뿐이었다.

결국 제인은 별도리 없이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준비하죠.”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자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아직 범죄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한, 간밤에 갑자기 사라진 프랑켄, 이제 막 이사해서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은 사무실…….

아니, 고작 그런 문제들이 아니더라도 50구역에는 수많은 일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곧 50구역을 떠나야 했다.

보좌관은 빈틈없는 아버지의 곁을 10년 이상 지켜 왔기에 시간에 대한 계산만큼은 그 누구보다 정확했다. 제인을 데려갈 사람들은 틀림없이 한 시간 뒤에 도착할 것이다.

제인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찬찬히 요한의 번호를 눌렀다.

얼마간 신호음이 갔지만, 받지 않는다. 대신 미리 녹화된 요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요한 파머입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시다면…….]

“요한, 나 제인이에요.”

제인은 두서없이 자신이 놓인 사정을 설명했다. 당장 50구역을 떠나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곧 돌아올 거라는 약속을 남겼다.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녹화를 마친 제인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나는…….”

제인은 무기력하게 푹 꺼진 소파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였다.

아내도, 딸도 한낱 도구나 짐짝으로 취급한 남자. 그런 아버지가 지금 죽음을 앞둔 상태로 자신을 찾고 있다.

정신을 가다듬은 제인은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문밖으로 나섰다.

신태일, 당장 그를 만나야 했다.

태일은 바를 비운 상태였다.

간밤의 고생 때문인지, 얼굴이 핼쑥해진 바텐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제인을 보고는 실망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일 씨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는 옷가게에 가셨어요.”

환락가에 옷가게는 단 한 곳뿐이다.

제인은 바텐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 버렸다.

“벼, 변호사님! 사장님한테 저 퇴근해도 되는지 좀 물어봐 주세요!”

제인의 등 뒤에서 다급한 바텐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제인에게는 대답해 줄 여유 따위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 환락가 거리는 민낯을 드러냈다.

간밤에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던 건물들은 부서진 벽면과 흉한 골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아름답게 치장한 채 뒤엉킨 남녀들은 퀭한 얼굴의 알코올중독자로 변해 있었다.

술 냄새와 향수의 인공 향기가 사라진 대낮의 환락가에는 고약한 토사물의 악취만이 풍겼다.

제인은 그런 50구역을 바꾸고 싶었다.

싸움을 막고, 사람들을 구제하며, 도시를 새롭게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센트럴로 떠나야 하는 이 순간, 제인이 원하는 것,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태일 씨를 데려가야 해. 태일 씨만 있다면…….’

태일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벌써 20분이 넘게 흘렀다.

제인은 급한 김에 지름길인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는 부랑배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앞을 지나치는 제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때, 등이 굽은 노인이 제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한 푼만 좀 주십쇼.”

“아, 미안해요.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제인이 급히 벗어나려는 찰나, 노인이 갑자기 제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대체…….”

억센 손아귀 힘에 놀란 제인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인의 눈을 본 제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노인의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곧이어 노인의 뒤쪽에서 말쑥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제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레이…….”

암흑가의 변호사, 레이였다. 그는 제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신태일을 만나서 뭘 어쩔 생각이십니까?”

“그는 나를 보호해 주기로 계약했어.”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태일이 없더라도 아가씨는 안전할 겁니다.”

“지금 이게 무슨……!”

제인은 어느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부랑배들, 아니, 메타휴먼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와 함께 얌전히 계시다가 의원님이 보낸 분들과 함께 떠나시지요. 앞으로… 37분 남았군요.”

“레이!!”

제인이 다급히 외쳤지만, 레이는 담담히 명령을 내렸다.

“사무실로 안전히 모셔. 짐 정리를 해야 할 테니.”

메타휴먼들에게 둘러싸인 채 질질 끌려가는 제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신태일은 50구역에 남아야 해.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바로 여기, 50구역이니까.”

레이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다시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경찰서로 가는 길.

“괜찮겠어?”

태일의 물음에 강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50구역 LAPD 서장을?”

“…그래서 걱정인 거야.”

태일이 어릴 적, 50구역에 부임 온 서장이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암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중앙정부는 당시 50구역 LAPD의 전면 해체를 결정했다.

이쪽 세계의 강필 역시 그만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강필이 암살당한다면, 그것은 곧 50구역 붕괴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아예 뒈지라고 고사를 지내라. 쯧.”

“사실을 말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센트럴의 표적일 가능성이 높아.”

무법 지대인 50구역에서 LAPD는 명목상으로나마 공권력의 상징이었다. 만약 LAPD의 서장이 암살당한다면, 50구역을 지우기로 결의한 센트럴에게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젠장, 센트럴이 아무리 맛이 갔기로서니, 자신들이 임명한 나를 죽이려 할 리가…….”

강필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지만, 센트럴이 그러고도 남을 자들이라는 사실은 강필 자신부터도 잘 알고 있었다.

센트럴 정치인들에게 50구역의 수많은 주민들은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배,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프랑켄의 말처럼 이미 상당수가 매수당한 상태라면…….”

“지레 겁먹지 마. 난 그렇게 쉽게 죽어 줄 마음이 없으니까.”

강필이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장량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지난 며칠간 애들을 꽤 몰아세우지 않았습니까. 센트럴이 매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아마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

강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편, 그 와중에 태일의 머릿속에 몇 가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 친구들 변호권은 지켜 줘야지. 그래도 너랑 ‘한 식구’잖아?”

“놈들에게 받아먹은 게 많은 모양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썩었어. 그렇지 않소?”

강필과 장량은 50구역 LAPD 경찰들을,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두 사람에게 50구역 경찰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쓰레기였다.

이방인(異邦人)인 두 사람의 그런 태도는 부하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게 잘 좀 해 주지그랬어. 오자마자 전부 범죄자 취급하고 몰아세우는데 누가 좋아해?”

“…….”

태일의 쓴소리에 강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뭐라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도착한 LAPD 건물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딸랑!

강필이 앞장서서 문을 열자, 낭랑한 종소리가 울렸다.

“…오셨습니까, 서장님!”

이순철 경장이 벌떡 일어나며 경례하자, 강필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 사무실의 경찰들 역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강필과 장량, 태일을 바라보는 중이고, 그 가운데에는 코헨이 있었다.

“오, 왔군요, 서장. 게다가 태일 씨까지. 아까는 꽤 불편하게 헤어졌죠?”

강필과 장량에게 당한 모욕은 어느새 전부 잊은 듯 활짝 웃어 보이는 코헨의 얼굴은 마치 뱀과도 같았다. 늘 그의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던 경호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량이 코헨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숙소로 가지 않으셨군요.”

“아직 대낮이니까요. 50구역에는 꽤 구경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미세한 화약 냄새가 사무실 안에 풍겨 온다.

“다들 일 보도록 해. 난 서장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강필의 말에 코헨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박 계장이 푸근하게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네, 서장님.”

태일은 강필과 장량을 따라 천천히 서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서장실까지 향하는 그 짧은 거리가 마치 수십 킬로미터는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철컥, 철컥.

들으란 듯 빈 방아쇠를 당기며 총을 손질하는 녀석.

긴장한 눈으로 강필의 움직임을 쫓는 녀석.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불안하게 강필과 코헨을 곁눈질하는 녀석.

틀림없이 어떤 비밀이 오가던 현장이었다.

그때, 강필이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 안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자 사무실 내의 숨소리가 멈췄다.

“요한이랑 박철은 어디로 간 거지?”

마치 전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닫은 가운데, 아까의 중년 경찰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아, 연락을 받고는 잠시 나갔는데… 아마 곧 올 겁니다. 들어오면 바로 서장님께 가 보라고 할까요?”

“그랬군. 그럼…….”

강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저 벽에 박힌 총알은 뭔가?”

“…….”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장량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배치된 책상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곧이어 장량이 책상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엎어진 가운데, 바닥에 채 닦이지 않은 핏자국이 드러났다.

그때껏 웃고 있던 박 계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허리에 가져다 댔다.

태일이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경고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물론 소용은 없었다.

“전부 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사무실 내의 경찰들이 전부 총을 꺼내 들었다. 곧이어 총구들이 마구 불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귀를 찢는 사격음이 울린다.

주변에 뿌연 먼지가 덮이며 수십 개의 구슬이 공중을 날았다. 더불어 바닥에는 거대한 문양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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