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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36화 (37/220)

36화 캐피탈 클럽 (6)

태일이 다시 레미제라블에 돌아왔을 때에는 해가 거의 중천에 떠오른 시각이었다.

정오의 레미제라블은 조용하다. 때때로 자신의 사연에 스스로 취해 정오가 한창 지나도록 머무르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저녁 이후 장사를 위해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래서인지 레미제라블 근방 거리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가게 앞에 잔뜩 진열된 화분들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큼지막해서 허름한 바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바의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선물이었다.

나중에 주민들에게 서비스로 화분 한 개씩 들려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환락가의 주민들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런 화려함을 동경했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바텐더 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늦었군.”

강필이 바텐더 앞에 앉아 태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

역에서 저격 사건을 겪은 직후, 곧바로 레미제라블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냥 강필이라고 불러. 지난밤에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던가?”

강필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지난밤, 강필과 장량은 태일로부터 정보를 캐내려는 듯 열심히 술을 권했고, 태일 역시 두 사람의 의도가 내심 궁금했기에 흔쾌히 대작에 응했다.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술자리이지만, 결국 셋 모두가 취할 때까지 진솔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과거의 연애, 경찰 연수원 생활, 흉악범을 체포한 이야기 등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래도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들 덕분에 거리감은 적잖이 사라진 상태였다.

“바쁠 텐데, 뭐라도 두고 갔나?”

태일이 짐짓 태연한 척 웃으며 그의 옆에 앉자, 강필이 앞에 있던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자네한테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보다… 어디 다녀온 건가?”

지나가듯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가벼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은 강필도, 태일도 알고 있었다.

“시장에 잠시.”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시장까지 지우와 함께 갔을 뿐만 아니라, 꽤 많은 목격자가 있었다. 만약 강필이 태일의 행적을 추적하려고만 한다면, 그런 사실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이라… 시장으로 오가는 길에 역전이 있었던가?”

“그래. 거기서 요한과 프랑켄이 체포됐지.”

강필은 거기까지 듣고는 남은 얼음물을 아예 입에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얼음을 까드득, 씹어 부수었다.

잠시간의 침묵 가운데, 바텐더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강필과 태일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얼음을 씹는 소리가 계속되자 태일도 덩달아 목이 마른 느낌이 들었다.

“나도 얼음물 한 잔 줘.”

“아… 네, 사장님!”

바텐더가 급히 맥주잔 가득 얼음물을 담아 올 때까지도 강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음물을 받아 든 태일이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 즈음, 강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태일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물었다.

“붙잡은 저격수는 어떻게 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태일은 순간적으로 잔을 놓칠 뻔했다.

애당초 강필이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서사를 건너뛴 채 곧바로 날아온 질문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일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필은 중얼거리듯 혼자 읊조리기 시작했다.

“표적은 둘. 저격수는 한 명이 아니었어.”

“…….”

“자네는 아니야. 저격수가 자네였다면 결코 실패했을 리 없으니까. 아니, 애당초 총기류를 사용할 이유도 없지. 소울 능력자니까.”

태일은 말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만약 태일이 50구역에 들어온 둘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강필의 말처럼 훨씬 쉽고 빠르게 해냈을 것이다.

“표적을 노리기 딱 좋은 위치에 기폭 장치가 던져져 있더군.”

태일이 프랑켄의 허리춤에서 해체시켜 던져 버린 물건이었다.

“다른 저격수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게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는 뜻이겠지.”

“…….”

강필은 앞뒤 맥락 없이 주절거리는 중이고, 의도치 않게 태일과 함께 이야기를 듣게 된 도영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저격수니, 표적이니 하는 강필의 말은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3자에게 거의 암호처럼 들릴 것이다.

반면, 태일은 강필의 추리 과정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현장에는 흔적들이 남았고, 강필은 잔뼈가 굵은 형사답게 그런 단서들을 놓치지 않았다.

태일은 새삼 갈증을 느끼며 다시금 얼음물을 들이켰다.

“내가 저격수 녀석을 제압한 직후에 하나 본 게 있지. 그게 뭔지 아나?”

질문을 던진 강필은 이번에도 역시 대답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스파크였어. 지난밤 자네가 보여 준 것과 같이 푸른빛이더군.”

“쿨럭!”

태일은 깜짝 놀라 입에 담겨 있던 얼음물을 뿜어내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한창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 댔다.

“뭘… 쿨럭쿨럭! 뭘 보여 줬다고?”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시긴 했지만, 정말 끊어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술에 취해서 내 능력을 보여 줬다고?’

지금껏 그런 적은 없었다. 아니, 애당초 필름이 끊어진 적도 없었다.

“자네의 소울 능력이지? 푸른 스파크.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다시 한번 묻지. 붙잡은 저격수, 어떻게 했나?”

강필은 어물쩍 넘어가더니, 다시 한번 원래의 질문을 던졌다.

강필은 이미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태일이 둘러댄다 해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태일 역시 이 마당에 어쭙잖은 핑계 따위를 댈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입을 소매로 닦아 낸 뒤, 곧바로 답변을 내놓았다.

“놓아줬어.”

강필이 태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째서지?”

“나와는 무관한 일이니까.”

“…….”

강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태일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런 대답까지 예상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사실 셸터든, 캐피탈 클럽이든, LAPD든, 마피아든 태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당장 태일을 노리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이봐, 서장. 50구역에서 매일 평균 몇 명이 목숨을 잃을까?”

50구역에서는 다른 구역 신문 1면을 채울 만한 사건들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취객 간의 다툼에서 비롯된 살인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었고, 마피아들이 끼게 되면 사상자는 더 늘어났다.

그것은 태일이 있던 이전 세계에서는 물론, 이쪽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중립 세력이니, 규칙이니 하는 것들을 지껄여도 결국 무법자들은 많은 일들을 무력으로 해결한다. 무법자의 도시에서 살인은 매일같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Bellum omnium contra omnes]. 위대한 역사 시대 철학자의 문장에 가장 가까운 동네가 바로 여기, 50구역이야.”

조금 전, 역전에서 벌어진 사건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LAPD 서장과 팀장의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차이 정도일까.

“그래서 무고한 인간을 죽이려 한 살인마를 그냥 놓아줬다고?”

그 살인마는 다름 아닌 강필의 부하였다.

“무고한 인간이 50구역을 밟는 일은 좀처럼 없지.”

“…….”

뼈 있는 태일의 말에 강필은 입을 다물었다.

태일 역시 선한 인간이 아니었다. 혁명을 일으켜 자유를 되찾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고, 그중에는 분명 어떤 가족의 따뜻한 가장, 누군가의 착한 아들도 끼어 있었다.

“이번에 50구역에 들어온 두 사람, 드림코퍼레이션 사람들이라고 했지?”

“…그래.”

“50구역에 가장 위험한 마약을 유통시키려 한 개자식들이 누구인지 혹시 조사해 봤나?”

“…….”

“드림코퍼레이션이야.”

강필은 입술을 깨문 채 가만히 태일을 노려보았다.

한편, 한꺼번에 엄청난 이야기들을 들은 도영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레미제라블의 문이 다시금 열렸다.

“어, 어서 오십시오!”

도영은 갑작스레 등장한 방문객들을 과하게 밝은 목소리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모습을 본 바텐더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서장님?”

장량과 이순철 경장을 필두로 비실이와 근육질 경호원들이 가게로 들어왔다.

강필 역시 설마 그들이 레미제라블에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벙찐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긴 무슨 일로…….”

“아, 드림코퍼레이션의 코헨 씨가 태일 씨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장량이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말하는 사이, 비실이가 가게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며 태일과 바텐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태일 씨가 어느 분이죠?”

태일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코헨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고급스럽게 갖춰 입은 코헨의 곁으로 다가가자,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코헨은 다가오는 태일을 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갑자기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태일 님. 저는 드림코퍼레이션 동부 지부의 수석 연구원인 ‘코헨 로날드’라고 합니다.”

“영광이라…….”

만나서 영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한 기억이 없던 태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비딱하게 틀었다.

“50구역에 가자마자 일단 태일 님께 인사드리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있었죠.”

“나한테?”

“예. 듣자하니 뛰어난 수완으로 50구역 사업장을 인계받으셨다죠? 저희 드림코퍼레이션은 이전 회장님 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거래를 이어 왔죠.”

코헨은 태일을 샬롯의 후계자로 대우하고 있었다.

아마 거래라는 것은 SB의 재료인 미르파우더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 미르파우더의 유통을 막은 사람이 바로 태일이지만, 코헨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이번에 사업장을 개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화분까지 보냈죠. 그게 골든 튤립이라는 물건인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태일은 코헨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짜증스레 물었다.

“하, 하하… 그렇죠. 저희 사장님의 전언이 있어서 왔습니다.”

한편, 강필과 장량은 코헨의 태도를 보며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코헨은 처음 경찰들과 만나던 순간부터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를 드러냈다. 심지어 저격수의 습격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직후, 건방진 태도는 더욱 심해졌다.

“경찰이 고작 세 명밖에 동원되지 않았다는 건 난센스입니다! 드림코퍼레이션이 1년 동안 내는 기여금이 얼마인지 압니까, 당신들? 게다가 암살자라니! 정말 천박한 땅 아닙니까?! 대체 저런 무법자들이 날뛸 동안 LAPD는 뭘 한 겁니까?”

코헨은 마치 본인이 경찰청장이라도 되는 양 온갖 불만을 늘어놓았고, 그 와중에 경찰을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심지어 죽은 제 동료에 대한 슬픔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크, 불쌍한 친구. 나는 늘 그 친구가 콜레스테롤이나 당뇨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설마 총알이 이마 한가운데 박힐 줄이야. 그 친구의 젊은 아내가 얼마나 슬퍼할지, 쯧쯧. 아, 그 친구의 아내 되는 사람이 5년 전까지만 해도 꽤 잘나가는 연예인이었죠. 이번 기회에 미망인이 된 그녀를 좀 위로해 줘야겠군요.”

강필은 단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코헨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고, 코헨의 경호 및 안내를 장량에게 맡긴 뒤 현장 수습에 나섰다. 명령을 내리는 와중에 장량의 원망 담긴 시선을 감수해야 했지만, 부하 직원에게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것이야말로 서장의 특권이었다.

어쨌든 강필은 코헨이 레미제라블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당황했지만, 태일에게 보이는 그의 저자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코헨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사장님께서 태일 씨를 드림코퍼레이션에 초대하셨습니다.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바빠.”

이 와중에 태연한 사람은 태일뿐이었다.

“…예?”

“바쁘다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직접 오라고 해.”

대답을 들은 코헨의 표정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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