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캐피탈 클럽 (1)
대대적인 LAPD의 마약 단속 이후, 약 일주일이 흘렀다.
그사이, 50구역 LAPD에 부임한 강필과 장량은 거의 매일같이 철야를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해 두 사람 모두 수염이 덥수룩했다.
햇빛을 보는 것 자체가 일주일 만이었다.
“…이거, 꽤나 그럴듯한 개업식이잖아?”
경찰 제복 대신 가벼운 차림으로 환락가를 찾아온 강필과 장량은 낡아 빠진 건물 앞에 잔뜩 늘어선 개업식 화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실 ‘그럴듯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간판 옆에 진열된 화분의 숫자는 그야말로 상식 밖이었던 것이다.
장량이 흥미롭다는 듯 주변에 늘어선 화분들을 바라보며 거칠거칠한 턱을 매만졌다.
“근처에서 방귀 좀 뀐다 하는 양반들은 다 모인 모양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50구역에 대한 정보들을 숙지하면서 한 번쯤은 들어 본 조직이나 이름들이 화분마다 적혀 있었다.
‘카게구미, 우에스기 카츠미’, ‘천중회, 웨이창’이라 적힌 거대한 화분 두 개를 필두로 각 조직 간부들과 산하 가게들이 보낸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만, 이건 또 뭐야?”
강필이 눈살을 찌푸리며 유달리 구석진 곳에 자리한 거대한 화분 앞으로 다가갔다.
센트럴 상원의원, 코르지 브레드필드.
“왜 그러십니까?”
강필의 시선이 고정된 화분의 이름을 확인한 장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강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인간은 아닐 거야. 그렇지?”
“…센트럴 상원의원이 달리 있겠습니까?”
“그 인간이 50구역의 이 코딱지만 한 가게 개업식에 화분을 보낸다고?”
“…….”
화분의 꽃은 이른바 ‘골든 튤립’이라 불리는 희귀종이었다. 독특한 색감과 우아한 형태로 인해 수집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는 품종인데, 그런 물건을 술집 개업장에 보낸 것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화분의 위치였다.
그 비싼 꽃을 다른 마피아 보스들이 보낸 화분 뒤쪽, 그늘진 곳에 ‘처박아’ 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Z―rail, 쟝 베르코프’, ‘블루 메이, 바오린’, ‘구룡, 안도 애슈턴’…….
50구역을 비롯해 대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본가들이 앞다투어 화분을 보냈고, 그들의 화분 역시 상원의원의 것과 함께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중 ‘드림코퍼레이션, TALOS’라고 새겨진 화분도 있었다.
“…‘캐피탈 클럽(Capital Club)’이군요.”
“대체 이 양반, 정체가 뭐야?”
강필이 눈살을 찌푸린 채 다시금 가게 간판을 바라보았다.
낡아 빠진 간판이 잠깐 사이 금칠이라도 된 것처럼 달리 보였다.
한편, 장량은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작고 귀여운 선인장 화분을 바라보았다.
‘그냥 다시 갖고 가야 하나…….’
끼이익.
그냥 경찰서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강필은 마지못해 술집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말았다.
“젠장.”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들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집중되었다.
칼을 찬 무사와 리볼버로 무장한 갱단들이 술집을 점령한 가운데, 당장에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같이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곧바로 등을 돌려 바를 나갈까 고민하던 찰나.
“이거, 이거, 귀한 손님이 오셨구만!”
누군가가 유쾌한 목소리로 손을 들어 올렸다.
천중회의 간부, 페이진이 목 좋은 자리에 앉아 둘을 향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페이진의 옆자리에는 카게구미의 보스, 카츠미가 시큰둥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바에 가득한 사람들 중 술을 마시고 있는 이는 그렇게 둘뿐인 것 같았다.
“와하하! 여기로 오슈, 여기! 귀하신 분이 오셨는데!!”
페이진은 마치 자신이 술집 주인이라도 되는 듯 호탕한 웃음을 짓더니, 경계하고 있는 부하들을 밀어내며 자리를 만들었다.
“선배, 그냥 돌아가시죠.”
강필의 옆에 선 장량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음을 굳힌 강필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주인장 얼굴 정도는 봐야지.”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강필의 모습에 장량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러나 홀로 달아날 수는 없기에 마지못해 선배의 뒤를 따랐다.
지난 일주일 사이 LAPD 내에서 강도 높은 내부감사가 진행되었고, 부패한 경찰 간부 몇이 직위해제 처분을 받았다. 부패 혐의에 대해 자세히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마피아 끄나풀에 대한 숙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페이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꺼내 강필과 장량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입니다, 서장님, 팀장님! 사흘 정도 됐나? 두 분 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구만!”
사흘 전, 페이진과 카츠미가 LAPD를 찾았다.
경찰에 심어 둔 마피아의 개들이 하나둘 잘려 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시 회담의 주역들이 작은 바 개업식에 모여 앉은 것이다.
“자자, 한잔하십시다!”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경계를 서고 있는 부하들과 달리 페이진은 이미 꽤 취한 상태였다. 그는 넉살 좋게 두 사람 앞에 술잔을 내려놓은 뒤, 넘치도록 술을 따르며 떠들어 댔다.
“피차 자주 봐서 좋을 게 없는 사이인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맞는 말이야.”
카츠미가 차갑게 대꾸하며 도수 높은 술을 들이켰다.
술에 그리 강한 편은 아닌지, 그녀의 얼굴은 벌써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호위를 선 꽁지머리 무사와 다른 칼잡이들은 목석처럼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런데 술집 안에 정작 태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없는 모양이지?”
강필의 물음에 페이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기다리는 중이오. 개업날부터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사장이라니, 글러 먹었지. 안 그래, 어이?”
페이진이 한창 바쁘게 술을 꺼내고 있던 바텐더를 향해 위협하듯 외쳤다.
20대 초반 정도 될까, 제법 반반한 얼굴의 바텐더는 현재 술집 상황에 완전히 기가 질린 것처럼 보였다.
“아, 그… 사장님은 곧 오실 겁니다.”
“대체 몇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지 원.”
강필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독한 술 한 잔을 들이켰고, 장량은 손도 대지 않은 채 페이진과 카츠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흐르길 몇 분.
쾅!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술집 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은 코트에 덥수룩한 장발의 사내, 신태일이었다.
태일의 양손에는 장을 봐 온 듯 파나 감자, 당근 따위가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오오~ 왔구만!”
페이진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츠미 역시 눈을 가늘게 뜬 채 태일을 바라보았다.
한편, 술집을 점령한 이들의 면면을 살피던 태일은 봉투를 내려놓더니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 재연되고 있던 것이다.
두 개의 조직이 무장한 채 서로를 경계하는 가운데, 그들을 이끄는 두 사람이 당시와 똑같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당시와 달리 체스 게임 대신 술판을 벌이고 있을 뿐.
태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새끼들은 전부 내 바에서 나간다. 당장.”
파지지직.
태일의 손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때껏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던 장량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제 앞의 술잔을 들어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 * *
“주인장이 나가라잖아! 꺼져, 이것들아!”
“날 못 믿나? 당장 나가.”
태일의 경고에 마피아 무리가 모조리 떠나 버리자, 바는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물론 저항하려는 녀석들도 몇 있었지만, 이미 얼큰히 취한 페이진과 카츠미의 성화에 하릴없이 술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고집을 피운 이는 카츠미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꽁지머리 무사였다. 그는 당장 나가지 않으면 자신의 호위 역을 맡기지 않겠다는 카츠미의 협박에 마지못해 절뚝이며 술집을 나섰다.
태일은 비로소 조용해진 바를 확인한 뒤, 바텐더에게 자신이 사 온 재료들을 건넸다.
“저 인간들 말고 손님은 없었냐?”
“…네.”
마피아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바텐더 도영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도영 역시 나름 레지스탕스에 속해 있던 녀석이지만, 떼거지로 몰려온 마피아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아…….”
태일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뒤쪽에 앉은 네 사람을 노려보았다.
각 마피아 조직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카츠미와 페이진, LAPD의 핵심인 강필과 장량.
50구역 뜨거운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애당초 레미제라블은 50구역의 일반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건만, 개업 첫날부터 쳐들어온 놈들과 바깥 화분들 때문에 주민들은 도리어 레미제라블을 피해 다니는 형편이었다.
잠시 뒤, 태일은 창고에서 가장 비싼 와인 한 병을 꺼내 네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빈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당신들, 개업날부터 망하는 꼴 보고 싶은 거야?”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난 이 공간이 꽤나 맘에 들어. 진심으로 말이야!”
페이진이 히죽 웃으며 와인의 코르크를 딴 뒤, 태일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당신과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태일은 페이진이 따라 준 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물론! 아버지도, 나도 당신이 보여 준 힘에 그야말로 반했단 말이지!”
페이진은 천중회의 보스인 웨이창까지 언급하며 태일을 추켜올렸다. 그러나 태일은 녀석의 입 발린 말에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강필 역시 그런 페이진의 말이 자못 웃겼는지, 피식 웃으며 잔을 비웠다.
“허? 비웃는 거요?”
그러나 페이진의 말에 대꾸한 이는 카츠미였다.
“우습지. 당신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체스를 둘 당시와 달리 당주가 된 카츠미는 페이진에게 더 이상 존대를 하지 않았다.
“흐흥, 이젠 어엿한 당주가 되셨다, 이건가? 무섭기도 하지. 큭큭.”
페이진이 카츠미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더니,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
키릭.
어설픈 도발이지만, 쉽게 격동된 카츠미의 손이 허리에 찬 칼로 향했다.
“오래 살고 싶으면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아, 근육돼지.”
“그 칼을 뽑은 후 벌어질 상황에 대해서는 각오하고 있겠지?”
태일이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며 카츠미를 노려보았다.
개업 첫날부터 영업장에 피가 뿌려지는 꼴만큼은 절대 볼 마음이 없었다.
바로 그때, 강필 역시 허리춤에서 은색 수갑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이거… 우리는 병풍으로 보이나 본데.”
얼마간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먼저 입을 연 쪽은 페이진이었다.
“난 아버지의 전언을 전하러 왔어. 마침 경찰 양반들에다 카게구미 당주까지 있으니 잘됐군.”
방금까지 흐느적거리던 페이진의 얼굴은 어느새 진지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신태일, 당신을 가장 큰 위협이라 판단하고 있어. 하지만 동시에 가장 싸우고 싶지 않은 존재로 여기고 있지. 그런 점에서 친해지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다.”
태일은 들으나 마나 한 녀석의 말을 들으며 와인을 빈 잔에 따랐다.
“하려는 말이 뭐지?”
“신태일, 앞으로 50구역에서 벌어질 일체의 사건에 개입하지 마라.”
잔을 들어 올리려던 태일의 손이 멈추었다.
페이진의 말에 카츠미 역시 술이 깬 듯 태일을 바라보았다.
“물론 우리 천중회는 이 바를 포함해 당신이 가진 사업장에 절대 손대지 않을 거야. 당신이 먼저 나서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지금 페이진의 말은 태일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50구역에서 벌어질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 안에는 머지않아 모종의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LAPD와 카게구미의 대표자들 앞에서 굳이 태일의 개입만을 막으려 한다는 것은, 태일을 제외한 나머지 두 조직이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든 휘말릴 것을 의미했다.
긴장 어린 침묵 속에서 태일은 다시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페이진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카츠미의 말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사라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무슨 뜻이지?”
“나도 귀찮은 일은 사양하겠어. 50구역에 전쟁은 없다는 뜻이다.”
카츠미의 단호한 목소리에 페이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고, 강필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 카게구미는 오늘부로 마약 사업에서 일체 손을 뗀다. 서장, 당신들의 권고에 따르겠어.”
“뭐?!”
페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금 넌 카게구미의 당주 앞에 있다. 행동을 조심해. 두 번째 경고다.”
면박을 들은 페이진의 얼굴근육이 부자연스럽게 떨렸다.
카츠미는 그런 페이진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 듯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 전쟁은 없다. 전쟁을 도모하는 자는… 카게구미의 적이야.”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