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법자의 밤 (6)
거센 비 때문인지, 몰려든 마피아 때문인지, 50구역 입구 앞은 유난히 한산했다.
“더럽게 긴 밤이군.”
웨이창이 중얼거리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거리 방향을 바라보았다.
페이진을 비롯해 수십 명의 부하들은 웨이창의 뒤에 도열해 선 가운데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카게구미 측에서는 단 한 명의 여자만이 나와 있었다.
“애들 감기 걸리겠어요. 우산이라도 들고 나오게 해 주지.”
여인의 말처럼 웨이창의 뒤에 늘어선 천중회 단원들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러나 웨이창은 피식 웃으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웃기는 농담이군.”
부하들의 무능으로 인해 샬롯의 공장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카지노 흑룡이 반파되었다. 고작 몇 시간 사이 웨이창이 본 손해는 단지 재물상의 피해에 국한되지 않았다.
더구나 정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우에스기 히나코’, 다른 이름은 ‘자켄’. 한때 그녀는 50구역 최고의 검수이자 무자비함의 대명사였다.
붉은 기모노에 붉은 우산을 든 눈앞의 여자가 한때 피 칠갑을 한 채 날뛰었다고 하면 과연 누가 믿을까.
“…손 뗀 게 아니었던가?”
“그래요. 지금은 한낱 옷가게 마담일 뿐이죠.”
“술집도 아닌 옷가게에서 ‘마담’ 어쩌구 하는 시점부터 이미 글러 먹은 것 같네만.”
“후후후….”
몇 시간 전, 웨이창은 천중회 신입들이 옷가게 근처에서 시답잖은 짓을 벌이다가 모조리 난도질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자켄이 은퇴한 지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여전히 그녀를 따르는 무사들은 많았다. 자켄의 옷가게와 그곳을 지키는 무사들은 사실상 또 하나의 중립 조직이었고,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이빨을 들이밀지 않을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자켄은 다시금 카게구미를 대표해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온 자켄이라… 정말이지 지독한 밤이야.”
웨이창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불가항력이었답니다. 협상이 끝나면 전 다시 옷가게로 돌아갈 거예요.”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여인을 보며 웨이창이 쓴웃음을 지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지.”
30분 전, 중립 조직으로부터 우에스기 카츠미가 차기 당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보고를 받았다. 자켄의 복귀는 카츠미 때문일 것이다.
동― 동― 동―
그 순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 저기 오네요.”
골목에서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늦진 않은 모양이군.”
아이들은 레지스탕스 토굴에 남겨 둔 상태였다.
지우가 한사코 따라오려고 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지만, 앨리스 덕분에 간신히 떼어 놓고 올 수 있었다.
“빚은 꼭 갚아라.”
태일의 옆, 여전히 흰 가면을 뒤집어쓴 민호가 툴툴거렸다.
지난 한 시간 동안 태일은 민호에게 온갖 부탁을 쏟아 냈다.
대부분 영문 모를 일들이지만,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도 위화감 없이 대하는 태일의 태도 때문인지 민호는 어느새 홀린 듯 그를 돕고 있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일이야. 한번 믿어 보라고.”
태일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민호는 여전히 암담한 기분이었다.
“…살벌하군.”
허리춤에 리볼버와 도끼를 장착한 채 시위하듯 늘어선 천중회 갱들.
“꽤 많이들 숨어 있는데…….”
시퍼런 칼을 숨긴 채 곳곳에 숨어 있는 카게구미 무사들.
민호는 시무룩하게 웃으며 바지 주머니 안에 감춰 둔 RSB 캡슐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민호는 아이들을 엄호하는 내내 줄곧 갈등했다.
SB의 제조법을 남겨 두어도… 아이들을 살려 두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결국 민호 역시 킬러베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에게 잘못은 없다. 죄는 그 힘을 탐낸 마피아 조직들의 것이다. 여차하면 오늘 밤 마피아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태일이 그런 민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우린 어디까지나 ‘중재’를 하러 온 거니까.”
“…….”
태일과 민호를 향해 붉은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다가온다.
“어서 와요. 이렇게 또 보는군요. 이번에는 웬 유령까지 데려왔네요? 앞전에 데리고 다니던 아이가 귀여웠는데…….”
태일은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마담, 당신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히나코라고 불러요. 어쩌다 보니 카게구미를 대표해서 나오게 됐네요. 그보다 옷이 많이 지저분해졌네? 나름 신경 써서 만든 옷인데.”
마담은 역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태일의 옷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하게 됐어.”
“언제든 가게로 와요. 옷 한 벌 새로 해 줄 테니까.”
“사설이 길군.”
웨이창이 무거운 말투로 대화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언뜻 보기에 웨이창은 진중한 노신사처럼 보이고, 붉은 우산을 쓴 히나코는 기품 있는 귀부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둘의 눈에는 살인에 이골이 난 무법자의 광기가 남아 있었다. 둘 모두 언제든 무기를 꺼내 들어 상대방을 향해 겨눌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좋아, 일단 은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 우리를 여기에 부른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웨이창이 태일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웨이창의 뒤에 붙어 선 페이진은 혹시 태일이 위해를 가하기라도 할까 염려가 되는 듯 입술을 깨문 채 태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민호 역시 당장에라도 웨이창과 히나코를 없애 버릴 각오로 캡슐을 움켜쥐고 있다.
“난 오늘 당신들을 중재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여기에 왔어.”
“중재?”
“의뢰…라고 했나요?”
태일의 말을 들은 웨이창이 고개를 갸우뚱했고, 히나코 역시 의외라는 듯 미묘하게 웃어 보였다.
태일은 말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 놓았다.
“두 조직 모두 샬롯의 유산을 포기해.”
“…….”
샬롯의 유산은 그녀가 가진 사업장과 조직원을 모두 포괄한다.
인형극단의 사업장은 혼란에 빠져 수습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조직원들은 대부분 간밤에 죽거나 달아났다. 혹 운 좋게 잔당들이 살아남았다 해도 카게구미와 천중회는 그들을 전부 찾아내 지난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 피의 복수를 감행할 것이다.
“면이 서지 않아.”
웨이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기보다 욕심이 많군요.”
히나코는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지만, 정작 눈만큼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차라리 SB를 포기하라고 제안했다면, 적어도 히나코는 선뜻 동의하며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샬롯의 유산은 사실상 50구역 환락가의 3분지 1에 해당했다.
그 유산을 사이에 둔 전쟁은 불가피하다.
태일은 두 사람의 단호한 반응을 확인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두 조직을 습격한 놈들은 마로트와 무관해. 카게구미의 전대 당주도 부하라고 믿은 놈에게 암살당한 거 아니었나?”
셸터(Shelter). 소울벌룬을 없애겠다는 명목으로 마피아들을 공격한 조직. 놈들은 분명 샬롯과 무관하다. 웨이창과 히나코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샬롯이 생전에 숨겨 둔 첩자였을지도 모르죠.”
“샬롯은 괴물을 양산해 내고 있었어.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건 궤변이네.”
그러나 둘은 결코 명분을 놓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닌 이익이다.
샬롯이 남긴 사람과 돈, 그리고… 힘.
자신들이 샬롯의 것을 가져가야만 하는 명분을 미리 쌓아 두어야 했다.
“간밤에 손해가 적지 않아. 무엇보다 흑룡이 반파된 것은… 뼈아프지.”
“우리는 당주까지 잃었어요. 피의 복수가 없다면 차기 당주의 영(令)이 제대로 서지 않겠죠.”
태일은 둘의 거듭된 항의를 들으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하지만 두 조직이 샬롯의 유산을 두고 다투려면 그보다 먼저 샬롯의 후계자부터 상대해야 할 거야.”
“…뭐?”
“그게 무슨…….”
민호는 살얼음판과 같은 협상이 이어지는 내내 거리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태일이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즈음, 차 한 대가 50구역 안쪽 거리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웨이창과 히나코는 한창 중요한 이야기 중 갑자기 등장한 차량에 짜증이 치민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이어 멈춰 선 차에서 내리는 이들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붉은 눈동자에 양복을 갖춰 입은 메타휴먼, 중립 조직의 입회자들이었다.
뚜벅, 뚜벅, 뚜벅.
입회자들은 기계적으로 우산을 펴 든 뒤, 무표정한 얼굴로 태일에게 다가왔다.
“설마……!”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히나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태일 님, 승계 요청에 따른 검토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웨이창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나 중립 조직의 입회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피아들은 중립 조직에게 50구역의 질서 유지의 역할을 위임했다. 중립 조직이 따르는 규칙은 마피아들이 만들어 낸, 마피아들의 질서였다.
아무리 웨이창이 천중회의 보스라 해도 마피아인 이상 그 규칙에 종속된다.
“신태일 님께서는 2022년 5월 2일 23시 31분경, 인형극단 샬롯 님의 권리 승계 확인을 요청하셨습니다.”
당주 권리의 승계는 일반 법 규정과 무관하다. 땅문서나 등기 서류 따위 복잡한 서류 작업도 필요하지 않았다.
만족해야 하는 것은 단 세 가지 조건뿐이다.
첫째, 마피아만이 승계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당주의 유언을 통해 승계권을 인정받거나, 당주를 살해한 자만이 승계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신태일 님의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은 2022년 5월 2일 21시 18분경, 결투 참여 요건 검토와 함께 충족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히나코가 쓴웃음을 지었다.
몇 시간 전, 선뜻 증인 역할을 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히나코 자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조건, 조직에 속한 마피아 10인 이상의 지지를 받는 자만이 승계권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2022년 5월 2일 23시 43분경, 인형극단의 조직원 10인의 지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신태일 님은 2022년 5월 3일 00시 5분, 인형극단의 정당한 차기 당주로 공인되었습니다. 다른 위임자분들에게도 이 사실은 보고됩니다.”
“뭐,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중립 조직에게 질서 유지를 위임한 자들, 즉 천중회와 카게구미의 대표들은 지금 모두 이 자리에 있다.
태일은 다시 시선을 웨이창과 하나코 쪽으로 돌렸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기억났군.”
“…….”
“샬롯의 유산을 손에 넣고 싶으면 정당한 승계자부터 없애야 할 거야. 바로 나 말이야. 그게… 마피아의 룰이잖아?”
중재란 사실 간단한 일이다.
싸움을 벌인 당사자들이 탐내는 것을 어느 쪽의 손에도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버리면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 사거리 습격 건은 인형극단과 무관해. 오히려 나는 너희들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이창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고, 히나코는 체념한 듯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의 조직’을 상대로 피의 복수를 하려 든다면, 말리지 않겠어. 단, 손을 내미는 쪽과는 기꺼이 손을 잡는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히나코였다.
“샬롯의 잔당… 아니, 암살자들이 속한 조직 이름이 뭐죠?”
“‘셸터(Shelter)’라는 이름을 쓰더군.”
깜짝 놀란 민호가 태일을 노려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마피아들에게 굳이 가짜 정보를 흘릴 이유는 없었다.
“자네와 손을 잡지. 셸터라는 조직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야.”
“우리 역시 선대 당주의 복수를 위해 당신과 손을 잡겠어요.”
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중재에 응해 줘서 고맙군.”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얼굴에는 나름의 감정이 짙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 * *
“지금 이게 무슨 속셈이지?”
제인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호텔 출입 카드를 바라보았다.
“보시다시피 호텔의 카드키입니다. 이제부터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나가셔도 좋습니다.”
마주 앉은 레이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며칠은 더 있을 생각이야.”
“기다릴 사람들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제인은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긴 레이가 다시 찾아왔을 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태일과 지우, 앨리스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그들에 대해 묻기 위해 온 것이리라.
그러나 이어진 레이의 말에 제인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침 신태일이라는 분이 아가씨께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뭐?”
“아가씨의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순간적으로 태일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제3의 세력을 등장시켜서 둘 사이를 견제하는 방법.”
깜짝 놀란 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공했다고?!”
“…그리고 보육원에 아이들을 스무 명 정도 더 맡겨야 할 것 같다는 말도 전해 왔습니다.”
놀라운 소식에 제인은 한동안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나 레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Z―rail 회장님께서 이번 사고에 대한 유감의 뜻을 표하는 의미에서 아가씨의 자선사업에 투자할 뜻을 밝히셨습니다. 아이들이 머무를 보육원에 지원할 수도 있고, 아가씨께서 앞으로 진행할 50구역 재건 사업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인은 이 뜬금없는 ‘투자’의 배후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허락을 하셨다고?”
레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멍해진 제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능한 해결사를 얻으신 모양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한 말들… 거짓은 아니겠지?”
“전 위에 계신 분들과 달리 거짓말보다 침묵을 택하는 편입니다.”
처음으로 레이의 얼굴에 미세한 감정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정, 그것은 분노 혹은 혐오였다.
“레이, 넌 대체…….”
제인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원채 속을 알 수 없던 녀석이지만, 지금의 레이는 마치 암흑가 마피아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레이는 제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말없이 방문을 나섰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