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무법자의 밤 (4)
태일은 눈을 뜬 채 숨이 끊어진 킬러베어의 두 눈을 가만히 감겨 주었다.
‘RSB를 이용해 SB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했다라…….’
독으로 독을 없앤다는 발상이 쉽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마지막 말에 거짓은 없었다.
샬롯의 부하였지만, SB를 없애려 한 남자.
괴물이 되었지만, 결국 아이들을 구해 낸 남자.
정체 자체가 불분명한 와중에도 마지막 순간 아이들에 대한 걱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최후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다.
태일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저만치 떨어져 있는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치직, 치지지직―
“별일 없나?”
[아까 그 말은 대체 뭐냐? 여기 위치를 대체 누구에게…….]
“아, 별일 아니었어. 아이들은 무사하겠지?”
[그래. 저희들끼리 열심히 떠들고 있어.]
“내가 돌아갈 때까지 잘 부탁한다.”
[…오래 걸리나?]
“글쎄.”
태일은 가만히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각 조직의 보스에게 통지한 약속 시간, 자정까지는 아직 두 시간 30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보스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킬러베어의 동지들, RSD를 가진 이들이 마피아 보스들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길어도 두 시간 정도면 될 거다.”
마피아의 붕괴는 단순히 범죄자의 일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에서 마피아들이 소울벌룬으로 인해 자멸하기 시작했을 당시, 레지스탕스 대장은 마피아 조직들의 붕괴로 인해 50구역이 더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산산이 부서졌다.
마피아들은 50구역 환락가의 경제를 돌리는 사업가들이었고, 빈민가 사람들을 고용하여 최소한의 돈을 쥐어 주는 이들이었다.
마피아의 붕괴와 함께 빈민들이 무너졌고, 곧이어 도미노처럼 중산층 노동자들이 무너졌으며, 오래지 않아 50구역 공장들까지 도산했다.
망가진 경제 속에서 마피아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소울벌룬에 노출되었고, 그렇게 영혼 없는 좀비들이 양산되었다.
결국 중앙정부 공화정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불타 버렸고, 50구역 공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 생존자들은 구역 관리자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피아라는 악인들이 사라지자, 더 끔찍한 괴물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태일은 차악이라고 할 수 있는 마피아들의 존속이 50구역을 위해 더 나은 선택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그들을 무너지게 놔둬서는 안 되겠지.’
더구나 고용주인 제인에게 받은 부탁은 마피아들의 중재였다. 중재를 하려면 일단 조직이 남아 있어야 한다.
마음을 굳힌 태일이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 문 근처에 꿈틀거리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후으으으… 으으윽…….”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대며 몸을 질질 끌어 악착같이 문밖으로 나가려 애쓰는 사내.
카츠미의 옆에 줄곧 붙어 다니던 꽁지머리였다.
촉수에 꿰뚫렸는지 두 다리가 축 늘어진 가운데, 그의 온몸은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태일은 그런 꽁지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너무 무리하지 마. 지혈부터 하지 않으면 다리를 영영 못쓰게 될 거다.”
“…….”
꽁지머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손을 뻗어 문턱을 붙잡았다.
이를 악문 꽁지머리는 자신의 몸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핏발 선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보스는 어디에 있지?”
태일의 목소리를 들은 꽁지머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걸 왜… 묻나?”
꽁지머리는 태일이 가진 엄청난 힘을 보았기에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금 50구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 태일이다. 태일이 마음만 먹는다면 보스는 물론, 조직 전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 너희 보스를 살리려고 물어보는 거니까. 방금과 같은 괴물이 네 보스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건 너도 알잖아?”
“…맹세해라.”
꽁지머리가 충혈된 눈으로 태일을 올려다보았다.
“맹세하지. 가능한 한 네 보스를…….”
그러나 꽁지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카츠미 님을 구하겠다고… 약속해라.”
“…….”
쏴아아아―
빗소리가 귀를 때린다.
태일은 물끄러미 꽁지머리를 바라보았다.
카츠미라는 여자는 다리에 부상을 입은 그를 버리고 갔다. 그럼에도 상관에 대한 꽁지머리의 충성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카츠미 님이 곧 카게구미…다. 그분을 잃으면 우리 조직은… 무너진다.”
“네 사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고?”
“감히!”
태일의 물음에 꽁지머리가 괴성을 내질렀다.
“나는! 아가씨에게 그런 마음을 품지 않는다!”
마음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반응에 태일은 조그맣게 혀를 찼다. 꽁지머리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가씨라…….”
여하튼 태일은 ‘아가씨’라는 표현으로부터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후계자 혹은 조직 내에서 보스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존재.
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맹세하지. 만약 내가 갈 때까지 그녀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구해 내겠어.”
“공장 옆 샛길로 빠져나가면 큰 대로가 나온다. 우측으로 꺾어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사거리에 임청각이란 곳이 있다. 그 건물로 가.”
꽁지머리는 곧바로 장소를 알려 주었다.
“서둘러…. 아가씨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지혈하고 있어.”
태일은 그 말을 남긴 채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빗줄기는 더욱 굵어진 상태였다.
* * *
50구역 정중앙에 위치한 사거리.
붉은 언덕의 경관이 자못 매력적인 사거리 건물들은 50구역 환락가에서도 가장 목이 좋아 고급 술집과 화려하게 치장된 카지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하룻밤에 소비되는 돈이 웬만한 기업 1년 매출이라 소문난 고급 주점 ‘임청각’과 카지노 ‘흑룡’은 다른 구역의 부자들까지도 찾아와서 하룻밤 불장난을 벌일 정도로 유명했다.
임청각과 흑룡은 제각기 철저하게 VIP를 관리하면서 명실상부한 50구역의 명물이 되어 있었지만, 두 사업장의 소유주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50구역 터줏대감인 마피아들이 그 사거리에서는 털끝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게의 소유주들이 엄청난 거물급 인사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거물급 인사’들이 다름 아닌 마피아 보스들이었을 뿐이다.
임청각 뒤쪽의 후원 전각.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방 안에 누워 있는 가운데, 일곱의 무사가 비를 맞으며 문밖에서 부복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검은 도복을 입은 남자가 카타나를 옆에 내려놓은 채 홀로 노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소식이 끊어졌다고?”
노인이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느새 벚꽃은 모두 떨어졌고, 노인 역시 오래 버티기는 힘들 터였다.
“예.”
“…….”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됐다. 그 아이가 이겨 내야 할 일이지.”
남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인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인 우에스기는 오랜 시간 동안 조직을 이끌어 왔고, 한낱 깡패 무리에 불과하던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해 냈다.
그 과정을 보아 왔기에 진심으로 자신의 주인을 존경하고 있었다.
“다케다.”
노인이 지그시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 비를 맞으며 부복하고 서 있던 이들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냐?”
“…….”
“너를 10년도 넘게 보아 왔다. 그동안 너는 충실하게 나를 보필해 왔지.”
“주인님…….”
“어째서 나를 배신했느냐?”
다케다의 뒤쪽에서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정작 다케다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다케다는 가만히 자신의 옆에 내려놓은 카타나에 손을 얹었다.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물건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주인께서는… 그 물건에 욕심을 내셨습니다.”
둘 사이에는 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베어라.”
우에스기의 명령에 따라 일곱 개의 칼날이 다케다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다케다는 긴장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몸을 숙이며 칼을 뽑아 뒤쪽으로 그었다.
우아한 발도(拔刀)와 함께 사방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퍼져 나간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마저 멈춘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케다를 향해 도를 휘두르던 뒤쪽 무사의 허리가 동시에 베어지며 나가떨어졌다.
“네놈이!”
우에스기는 일류 검사들을 단박에 베어 버린 발도에 넋을 잃고 말았다.
다케다는 그런 주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될 힘… 이게 바로 주인님께서 욕심낸 그 물건의 정수입니다.”
콰앙!! 쾅!! 콰쾅!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반대편의 카지노, 흑룡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콰쾅!!
이어 다케다의 바로 뒤쪽, 임청각 본관 2층에서도 거대한 폭발이 연달아 일었다.
귀를 찢는 비명 소리와 함께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게 무슨……!”
다케다의 폭주에 경악한 우에스기가 몸을 일으키며 핏대를 올렸다.
마피아의 보스들이 머무르는 거처이기에 그 어떤 종류의 분쟁도 금지된 사거리, 드러나 있으면서도 감춰져 있던 마피아들의 심장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우에스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분노와 공포로 인해 병든 노인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안녕히…….”
다케다는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그렇게 카게구미의 보스이자 임청각의 주인이던 우에스기의 목이 날아갔다.
피를 뒤집어쓴 다케다는 목이 달아난 주인의 몸뚱어리를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저 또한 곧 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뒤쪽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케다!! 네놈이 감히, 감히 조부님을!!”
우에스기 카츠미.
다음 대 카게구미의 당주가 분노에 찬 얼굴로 조부를 살해한 다케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케다는 카츠미를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킬러베어 녀석, 아가씨를 놓친 건가…….’
킬러베어의 뜻에 따라 50구역에서 마피아의 존재까지 지우기로 했건만, 정작 킬러베어 자신이 가장 중요한 인물을 놓친 것이다.
당주의 피를 이어받은 카츠미가 살아남는다면, 결국 카게구미는 다시 규합할 것이다.
‘주인에 이어 그 핏줄까지 내 손으로 끝을 봐야 하는가…….’
애꿎은 일이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짐승이 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마피아들을 남겨 둔다면, 결국 그들은 다시금 악마의 비약에 손을 댈 것이다.
“이놈!!”
카츠미는 카타나를 꼬나 잡고 당장 다케다를 베어 버릴 각오로 달려들었다. 그녀와 함께 들어온 무사들 열댓 명이 역시 함께 달려온다.
다케다는 가만히 양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쥔 채 다시금 발도를 준비했다.
‘극의에 이른 검은 공간마저도 벤다.’
이 체험을 고작 두 시간밖에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엄청난 힘이기에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마음을 다잡은 다케다가 그대로 부드럽게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다케다의 시야에 눈부신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포착되었다.
파츠츠츳!!
푸른 번개가 다케다의 칼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쨍강!!
다케다의 발도 자세가 무너진 찰나, 번개에 직격당한 칼날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며 사방에 흩어졌다.
당황한 가운데 부서진 검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한 발의 번개가 날아들었고, 이번에는 그의 팔을 관통했다.
“아… 아!!”
다케다의 눈에 부서진 검과 함께 깨끗이 잘려 떨어지는 자신의 팔이 비쳤다.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죽어어어어어!!”
곧장 날아든 카츠미의 카타나가 다케다의 목에 닿았다.
머리가 몸에서부터 분리되어 낙하하는 찰나의 순간, 다케다의 눈동자에 비친 마지막 광경.
그것은 최소 100미터 이상 떨어진 카지노 옥상 위에서 푸른 전류를 온몸에 감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괴물…….’
마지막으로 떠오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의식이 끊어진다.
죽는 그 순간까지 RSB에 취한 다케다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