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무법자의 밤 (3)
화약과 피비린내가 온 사방을 뒤덮은 가운데, 페이진은 무아지경으로 싸우고 있었다.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촉수에 구멍을 냈고, 총알을 모두 소진한 뒤부터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손도끼 두 개를 양손에 꼬나 잡은 채 닥치는 대로 베어 냈다.
본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촉수는 녹색 연기를 남긴 채 녹아버릴 뿐이었고, 잘려 버린 부위에서는 곧바로 두세 개의 촉수가 새로 돋아났다.
죄다 의미 없는 공격이다.
페이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오로지 본체, 킬러베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사이, 부하들 몇이 뒷걸음질 치다 촉수에게 휘감겨 공중으로 날아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향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페이진의 속을 뒤집는 것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부하들의 비명 소리도, 사실상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몸뚱어리도 아닌, 킬러베어의 시선이었다.
킬러베어는 페이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껏 줄곧 한 사람, 태일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망할…….’
무기력하다.
약 한 시간 전, 명령을 하달받은 페이진은 대장의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닌가 의심했다.
50구역 입구의 저격 현장에서 천중회를 공격한 놈의 멱을 따라는 지시를 기대했건만, 정작 내려온 지시는 전혀 엉뚱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코딱지만 한 폐가 점거와 제대로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약품의 확보.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는 비약이라니. 그런 스테로이드제 따위, 허풍쟁이 약장수나 팔 법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작전에 무려 6할이 넘는 조직원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웨이창은 페이진에게 좀처럼 하지 않던 경고까지 덧붙였다.
‘실패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페이진은 온몸으로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공장을 내건 결투에서 페이진은 이름 모를 이레귤러에게 패했다.
조직의 주력은 샬롯의 잔당 한 놈에게 놀아나고 있다.
서걱.
“표정이… 엉망이군요.”
어느새 카츠미가 카타나를 쥔 채 페이진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카츠미는 페이진을 보며 내뱉듯 말했지만, 정작 산발이 되어 점액을 뒤집어쓴 그녀의 모습 역시 꽤나 볼만했다.
지금까지 카게구미의 무사들은 천중회 쪽 형제들보다도 희생이 컸다.
수많은 무사들이 도망치려다 내던져져 머리가 깨졌고, 그나마 남은 이들은 맛이 간 상태로 문 쪽을 보며 마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을 지경이야.”
“동감입니다.”
카츠미가 짧게 대답하는 사이, 옆에 있던 꽁지머리가 그녀를 노리고 날아드는 촉수를 베어 냈다.
꽁지머리가 호위를 선 와중에 카츠미는 페이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본론을 말했다.
“물러나야 합니다.”
“…뭐?”
쌍도끼를 가만히 늘어뜨린 페이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무뚝뚝한 얼굴의 카츠미를 바라보았다.
“도망치자고?”
“우리는 저 괴물을 이길 수 없습니다.”
페이진은 냉정한 그녀의 얼굴에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참으며 이를 갈았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저놈의 목은 우리 천중회에서 가질 테니까.”
고집스러운 페이진의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과과광!!
공장 정중앙의 원형 구간으로 수십, 수백 개의 번개가 뿌려졌다.
동시에 그 공간에 있던 촉수들이 말 그대로 녹아 버렸다.
한편, 애먼 번개를 맞고 쓰러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천중회 형제들이었다.
그 꼴을 본 페이진이 핏대를 올리며 쌍도끼를 움켜쥐었다.
“저, 저, 저 빌어먹을 새끼가!!”
엄청난 양의 번개로 인해 모처럼 빈 공간이 생긴 것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돋아난 촉수들이 킬러베어의 본체를 보호했다.
그렇게 틈이 생긴 사이, 페이진과 카츠미가 함께 있는 것을 본 태일이 둘을 향해 다가왔다.
페이진이 태일을 향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태일 쪽이었다.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가라. 병력을 전부 빼.”
“대체 무슨…….”
“맞는 말입니다. 저 괴물은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말이죠.”
카츠미 역시 페이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마피아들은 저 괴물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이레귤러인 테일에게 맡겨야 한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카츠미의 말에 페이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태일의 말에 페이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너희들의 보스에게로 가, 지금 당장.”
카츠미의 표정에도 미세하게 당혹감이 떠올랐다.
태일은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놈의 목적은 너희들의 발을 묶어 두는 거야.”
“이런…….”
“설마!”
6할 이상의 병력, 즉 천중회의 주력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그건 카게구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페이진의 눈에 공장 내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킬러베어는 도망치는 녀석들만을 집요하게 붙잡아 내던지고 있었다. 오히려 제자리에 서서 촉수를 베거나 자신을 향해 달려드려 애쓰는 이들은 적당히 견제만 할 뿐이었다.
특히 후퇴 명령을 받은 카츠미의 무사들 상당수가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설마 저놈, 혼자 남아 있던 게…….”
처음부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쉽게 풀렸다.
6할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해 샬롯의 공장에 진입했건만, 킬러베어는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해’ 온몸이 묶인 채 홀로 남아 있었으니까.
킬러베어의 도망친 부하들은 처음부터 흔적조차 없었다.
페이진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놈을 고문했고, 소울벌룬의 위치를 캐물었다.
뒤늦게 샬롯의 잔당을 베어 버린 카게구미의 무사들이 도착하자 빈껍데기일 뿐인 공장을 두고 게임을 벌였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다.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천중회의 보스 웨이창. 자신을 비롯해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이들 대부분이 이 공장에 발이 묶여 있다.
“함정이군요.”
카츠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페이진에게 확신을 더해 주었다.
“천중회 형제들은 들어라! 다들 공장을 탈출해!! 전부 여길 나가서 아버지에게 간다! 길을 열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페이진의 목에 핏발이 섰다.
“카게구미의 무사들도 천중회와 함께 길을 뚫는다! 탈출해! 여길 빠져나간다!!”
카츠미 역시 목소리를 높이며 카타나를 휘둘렀다.
* * *
마피아들이 드디어 방향을 잡고 일사불란하게 출입문을 향해 길을 뚫기 시작했다.
태일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괴물을 바라보았다.
킬러베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겁쟁이들이…….”
지금껏 마치 놀리는 것처럼 마피아들을 교란하던 촉수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퍽!
“끄아아악!!”
“커억!”
더는 잡아 두기 위해 몸을 친친 감거나 공중에 내던지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대신 촉수의 끝이 그대로 마피아들의 심장이나 목을 꿰뚫었다.
이제껏 없던 잔인한 공격과 함께 마피아 수십 명의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그 꼴을 본 페이진과 카츠미의 얼굴색이 변했다.
애당초 킬러베어는 마피아들이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적당히 상대하고 있던 것이다.
“도, 도망쳐!!”
“창문! 창문을 부숴!”
후퇴에 공포가 더해지면서 마피아들의 움직임은 필사적인 도망으로 변했다.
촉수들로 가로막힌 문을 노리기보다 창문을 부수거나 이미 깨진 2층 창문으로 기어올라 뛰어내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마피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가운데, 오로지 태일만이 반대 방향, 킬러베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과!!
촉수만이 가득한 공간에 또다시 수백의 번개가 쏟아져 내린다. 태일은 그와 동시에 킬러베어의 본체를 향해 한 줄기의 번개를 날려 보냈다.
한편, 킬러베어는 태일의 손이 움직이자마자 황급히 남은 촉수들을 거둬 자신의 몸 앞쪽을 겹겹이 틀어막았다.
그의 눈에 번개의 움직임이 보일 리 없지만,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내린 선택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 선택이 단 1초만 늦었더라도 그의 심장은 번개에 꿰뚫렸을 것이다.
콰지직!!
심장 바로 앞까지 구멍이 뚫려 버린 촉수들을 바라보는 킬러베어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촉수들이 모조리 본체의 보호에 동원된 틈을 타 다리가 성한 마피아들은 모조리 공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킬러베어는 더 이상 마피아들을 잡아 둘 수 없음을 깨달은 듯 체념하며 중얼거렸다.
“괴물이군…….”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킬러베어가 이제껏 마피아들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힘을 조절했다면, 태일은 그런 마피아들의 존재 때문에 힘을 조절했다.
그리고 마피아들이 빠져나간 지금, 힘을 조절할 필요가 없어진 둘 사이에는 까마득한 격차가 있었다.
태일은 마무리를 지을 생각으로 킬러베어를 향해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렸다.
킬러베어의 남은 촉수들로는 태일의 다음 공격을 막지 못할 것이다.
파츠츠츠―
태일의 손바닥 위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킬러베어의 남아 있던 촉수들이 전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
곧 녹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사방을 뒤덮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태일이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피투성이 상태의 킬러베어가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졌다.”
주변 가득 흩뿌려진 피와 시신 속에서 킬러베어는 담담히 항복을 선언했다.
페이진과 카츠미를 비롯한 대부분의 마피아들이 달아난 가운데, 공장 안에는 중상을 입은 채 버려진 이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태일은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무릎을 꿇은 킬러베어의 앞으로 다가갔다.
“RSB의 정제법은 누가 가르쳐 줬지?”
깜짝 놀라 고개를 든 킬러베어의 눈에 담담한 태일의 얼굴이 비쳤다.
“어떻게 그걸!”
샬롯조차 모르던 비밀이 태일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킬러베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체 형태의 소울벌룬에서 다시 정수만을 뽑아낸 RSB는 이성을 유지한 채 괴물 같은 힘을 끌어내는 최종 형태의 비약이었다.
RSB를 흡입했기에 팔에 정을 박아 넣는 고문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마피아들을 최대한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었다.
태일은 킬러베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킬러베어의 귀에서는 이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최고의, 그리고 최악의 힘을 얻을 수 있는 RSB 치명적인 부작용. 그것은 두 시간 뒤의 필연적인 죽음이었다. 킬러베어는 이미 주어진 시간을 거의 소진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킬러베어는 항복했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마피아들을 모조리 도륙내기 싫어 힘을 조절한 태일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에.
태일은 그런 킬러베어의 의도를 정확히 읽었다.
킬러베어는 태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만치 던져진 무전기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고 했지?”
“그래.”
킬러베어는 SB와 관련된 ‘흔적’은 일체 남기지 말라는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아이들을 탈출시켰다. 그렇게 살려 낸 아이들이 지금 태일의 손아귀에 있었고, 태일은 아이들을 결투의 담보물로 내놓았다.
“…아이들이 마피아에게 넘어가선 안 된다. SB에 대해 알고 있다면… 너 역시 그 이유를 알겠지.”
“그래.”
킬러베어는 SB를 없애기 위해, 자신 같은 괴물의 탄생을 막기 위해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빙빙 맴돌았다.
“드림 놈들도 아이들을 노릴 거다. 그놈들 역시 재료는 공급했지만 제조법은 모르고 있거든.”
“그렇군.”
킬러베어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아이들을 죽여.’
이제는 말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입을 뗀 것은 태일이었다.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안전하게 지켜 낼 테니까.”
“…….”
킬러베어가 미처 할 수 없던 부탁. 그러나 태일은 너무나 담담하게 그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방금까지 보여 준 태일의 힘이라면 충분히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안도한 킬러베어의 눈가에 피가 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일찍 이자를 만났다면… 며칠 전에, 아니, 몇 시간 전에 만났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린 킬러베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셸터(Shelter)도 아이들을 없애려 할 거야.”
“…뭐?”
들어본 적 없는 집단의 이름에 태일의 담담한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RSB를 이용해 SB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고 한 이들이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킬러베어의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이제 정말 시간이 다되었다.
독으로 독을 없애는 작전. 그러나 킬러베어는 셸터의 목적에서 한발 더 나아가 SB 공장뿐 아니라 마피아 자체를 지워 버리려 했다. 마피아를 전부 없애고 50구역이 안전해진다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았지만, 극단에 잠입해 수년 동안 지켜본 아이들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으니까. 잘못은 어른들의 것이니까.
“부탁한다.”
“약속하지.”
태일의 마지막 말을 들은 킬러베어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킬러베어의 숨이 멎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