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1화 (22/220)

21화 무법자의 밤 (1)

태일은 2층 복도 난간에 기댄 채 가만히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쪽이 정답이었나.’

정문에 노크라도 하고 당당히 들어갈까 하다가 깨진 창문을 통해 잠입한 것은 순전히 순간의 변덕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1층에는 리볼버나 일본도 따위로 무장한 마피아들이 정확히 두 개의 무리로 갈라져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딱.

여러 개의 테이블이 엉망으로 배열된 가운데, 테이블 위쪽은 깨져 버린 플라스크와 유리 조각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탈출한 아이들은 바로 이곳에서 소울벌룬을 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샬롯의 죽음을 기점으로 이곳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딱.

‘악취미로군.’

벽 정중앙에는 곰 가면을 쓴 거대한 체격의 남자가 매달려 있었다.

피투성이 망치가 굴러다니는 가운데, 전시된 곰의 양손과 어깨에는 거대한 정이 깊숙이 박혀 있다.

거인은 온몸을 난도질당한 듯 지독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숨이 붙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딱.

“호오, 나이트를 움직인다고? 무슨 생각이지?”

좌측, 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초조하게 리볼버의 방아쇠를 만지작거렸다.

딱.

“이런. 아무래도 저는 체스에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우측, 붉은 코트를 입은 이들 역시 일본도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살벌하게 상대 진영을 노려보았다.

낡은 천장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옷이 젖었지만, 그들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웨이창 님께서 17만 5천 크레딧을 제안하셨습니다. 우에스기 님께서 거절하십니다.”

그렇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여는 이는 단 세 명뿐이었다.

회색 양복 상의를 벗어 둔 채 시가를 꼬나 문 남자와 붉은 코트의 단추를 턱 밑까지 단단히 채운 여자.

둘은 시선을 오로지 테이블 위 체스 게임판에 두고 있었다.

가끔씩 게임 내용에 대한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한편,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두 무리의 한가운데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읊고 있었다. 귀에 정체 모를 통신기를 착용한 그의 눈동자는 붉었다.

“우에스기 님께서 18만 크레딧을 제안하셨습니다. 웨이창 님께서 거절하십니다.”

세 사람 모두 벽에 걸어 놓은 곰 가면 남자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딱, 딱.

검은 폰이 게임판에서 밀려나고…….

“웨이창 님께서 18만 2천 크레딧을 제안하셨습니다. 우에스기 님께서 거절하십니다.”

딱, 딱.

하얀 나이트가 땅에 떨어진다.

태일은 가만히 1층을 내려다보았다.

둘의 체스 게임과 메타휴먼의 중계, 벽에 걸린 남자와 팽팽하게 대치한 마피아들.

그 기괴한 광경에 태일은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체스판의 말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고, 그에 따라 메타휴먼의 입에서 나오는 금액의 액수 역시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

“우에스기 님께서 25만 크레딧을 제안하셨습니다.”

10크레딧 정도면 그럭저럭 배부른 한 끼가 가능하다. 그런 가운데 25만 크레딧은 고급 주택 한 채 정도는 구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메타휴먼은 마지막 현황을 전한 뒤, 한동안 침묵했다.

탁.

줄곧 게임에 집중하던 붉은 코트의 여자가 퀸을 움직이며 조용히 말했다.

“체크메이트.”

“…젠장.”

체스 게임에서 패배한 남자가 짜증을 내며 시가를 던져 버린다.

그와 동시에 메타휴먼이 협상의 결과를 읊었다.

“결렬입니다. 결투의 입회인은 제가 될 예정입니다. 웨이창 님과 우에스기 님께서는 듀얼리스트(Duelist)의 대표자 권한을 각각 페이진 님과 카츠미 님께 위임하였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동의하지.”

철컥, 철컥.

사방에 도열해 있던 마피아들은 제각기 무기를 고쳐 잡고는 당장에라도 상대를 향해 달려들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체스를 마친 페이진과 카츠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든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경건한 대결을 앞둔 기사처럼 보였다.

카츠미가 일본도 손잡이에 묶어 둔 붉은 끈을 풀어 자신의 긴 머리를 묶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체스 게임에서 이겼으니, 약속대로 규칙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처음부터 둘은 협상이 타결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한바탕 싸움으로 번질 게 빤한 상황에서 둘은 체스게임의 승자가 룰을 정하기로 했다.

페이진은 리볼버의 탄창에 총알을 하나하나 끼워 넣고 있었다.

“대장전.”

순간, 페이진의 손이 멈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츠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 뒤쪽의 마피아들은 일제히 굳어 버린 듯 행동을 멈추었다.

“대장!”

뒤쪽에서 일본도를 꺼내 든 꽁지머리 사내가 깜짝 놀라 외쳤지만, 카츠미는 고개를 저으며 대검을 칼집에서 꺼내 들었다.

카츠미를 말리려던 꽁지머리는 마지못해 물러서며 도를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고, 그걸 시작으로 다른 마피아들 역시 무기를 거두었다.

“호오?”

페이진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한쪽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재밌군. 아주 용감해.”

리볼버의 장전을 마친 그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페이진의 비아냥거림을 들은 카츠미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페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대장전으로 하지.”

곧이어 결투의 입회인인 메타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한 발짝 옮긴 다음, 입을 열었다.

“룰은 대장전, 듀얼리스트는 카츠미 님과 페이진 님…….”

“잠깐!”

입회인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2층을 향했다.

태일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가볍게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카츠미를 말리려 한 무사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웬 놈이냐?”

태일은 입에 문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말했다.

“나도 그 결투에 껴 볼까 해서 말이야.”

순간, 건물 내부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페이진이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놈이 감히… 우리의 결투에 끼겠다고?”

“그래.”

그 순간, 축 늘어진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곰 가면 남자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태일은 어릴 적, 페노제의 마피아들이 벌이는 결투를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중간 보스의 자리를 두고 경쟁할 때, 가게를 두고 갈등이 터졌을 때, 혹은 여자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도 마피아들은 결투를 했다.

대개는 무식하고 막나가는 무법자들답게 추잡하고 한심한 이유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마피아들에게 결투란 신성한 것이었고, 그 결과에 있어서는 반드시 승복했다. 정당한 결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결투 중 비겁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50구역 모든 마피아들의 표적이 되었으며, 반드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태일은 마피아들의 명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결투에 끼어들었다.

“이름이 뭐지?”

카츠미는 페이진과 달리 침착하게 물었지만, 그 말투에는 차가운 분노가 묻어났다.

이름. 그것은 환락가의 주인인 마피아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레지스탕스는 수많은 가명을 갖게 되면서 이름의 가치를 잊었지만, 마피아는 반대로 자신의 이름에 집착하며 결투를 통해 가치를 높이려 했다.

무법자인 마피아가 옛 귀족을 흉내 내는, 웃지 못할 광경이었다.

“신태일.”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가! 어이, 뭐 하고 있어?”

페이진이 이를 갈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감히 태일에게 총구를 겨누지는 못했다. 신성한 결투가 시작되기 전, 총구를 겨누는 것은 룰 위반이다.

대신 입회자 역할을 하고 있는 메타휴먼을 바라보았다.

입회자가 태일을 보며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투에 참여할 권리 입증을 요청합니다.”

권리. 즉, 결투의 조건.

태일은 여전히 오래된 결투의 규칙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째, 마피아일 것.

“난 샬롯의 권리 양도자로서 이 자리에 섰다.”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

“지금 무슨 헛소리를…….”

곰 가면이 고개를 들어 태일을 바라보았다.

마피아는 죽기 전까지 마피아다. 즉, 마피아에게 귀속된 권리는 본인이 살아 있는 이상 타인에게 양도되지 않는다.

마피아의 권리를 양도받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마피아가 죽기 전, 입회자가 공증을 선 가운데 당사자에게 직접 권리를 양도받거나 혹은… 권리를 가진 마피아를 죽이거나.

“샬롯은 간밤에 도륙당했지. 그 와중에 친절하게 유언까지 남길 할망구도 아니었고 말이야.”

페이진이 낮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네놈이 샬롯을 죽였다는 건가?”

입회인이 말한다.

“증거를 요청합니다.”

“자켄의 옷가게 마담이 증인이야. 확인해 보면 알 거다.”

자켄의 옷가게가 언급되자 카츠미를 비롯한 카게구미 쪽 마피아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당신이……!”

그러나 입회인은 경악하는 마피아들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확인 과정을 거치는 중입니다.”

태일은 그런 입회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에도 중립 조직이 있는 건가…….’

마피아의 결투를 입회하고, 그 결과에 따라 모든 절차를 기록하는 중립 조직. 그런 녀석들이 한때 저쪽 세계에도 존재하긴 했다.

그들은 마피아들의 결투 결과를 기록하고, 법적 효력을 부여했다.

무법자 조직이 ‘법적 효력’ 따위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자못 우습지만, 그조차도 없다면 무법자들은 끊임없이 서로 죽고 죽일 것이다. 그렇게 불안정한 전장 속에서는 돈을 벌 수 없다.

힘이 곧 법인 무법자들의 세계에서 결투를 통한 합의 도출은 그럭저럭 괜찮은 해결책이고, 결투의 입회를 맡은 중립 조직은 암흑가의 법조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이쪽의 50구역에서는 메타휴먼이 그 일을 맡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확인되었습니다. 신태일 님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잠깐 소란이 일었다.

곰 가면은 여전히 시선을 태일에게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결투에 참여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 상대방의 수락.

“듀얼리스트분들의 동의 여부를 확인합니다.”

페이진이 피식 웃으며 태일을 노려보았다.

“운 좋게 다 죽어 가는 늙은이 하나 없앤 걸로 모가지가 뻣뻣하군. 애송이가 제 주제를 몰라.”

“칭찬 고맙군. 당신 보스와 오늘 자정 약속도 잡아 놨는데, 혹시 못 들었나?”

태일이 히죽 웃으면서 양팔을 벌려 보이자, 페이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네놈이!”

태일은 이미 천중회 멤버 몇을 처리했고, 그중 가장 어린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시간을 통보했다.

“뭐, 당신 조직원들을 건드린 건 불가항력이었어.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때, 줄곧 태일을 훑어보던 카츠미가 차갑게 말했다.

“애당초 뭘 노리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당신을 우리의 결투에 끼워 줄 까닭이 없습니다.”

“맞는 말이야. 네놈은 결투가 끝나고 나서 곧바로 죽여 줄 테니, 그때까지 잠자코 있어.”

둘의 대답을 들은 태일이 빙긋 웃으며 팔짱을 꼈다.

“너희들의 보스가 협상하던 매물, 그리고 이 결투의 전리품… 그건 바로 이 공장이겠지?”

메타휴먼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판돈을 더 키우지.”

“…뭐?”

둘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 공장을 손에 넣으면 뭐 해? 공장을 굴려본 일꾼들이 없잖아. 안 그래?”

“설마…….”

“네놈이?!”

“이 공정에서 일하던 아이들을 내가 보호하고 있다.”

“입증을 요청합니다.”

태일은 가만히 주머니에 넣어 둔 무전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전원을 켠 뒤, 채널을 3으로 맞췄다.

“어이, 들리나?”

[그래, 들린다.]

“애들은 만났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엄호 중이야.]

“잘하고 있네. 총 몇 명이지?”

[정확히 27명이야. 전부 무사하다.]

“알겠다. 이후 바로 다음 무전에서 나 아닌 누군가가 네 위치를 묻는다면, 그냥 가르쳐 줘라.”

[그게 무슨…….]

태일은 민호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무전을 꺼 버렸다.

페이진과 카츠미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판돈에 이 무전기를 얹는 거야. 어때?”

“듀얼리스트분들의 동의 여부를 확인…….”

“동의하지.”

“동의합니다.”

미끼를 물었다.

태일은 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입회자에게 순순히 무전기를 넘겼다.

건물 내부는 마구 새는 빗물로 인해 사방이 젖은 상태였다.

“네 녀석, 무기는 필요 없나?”

페이진이 히죽 웃으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아니, 뭐, 내겐 이 환경 자체가 너무 유리해서.”

“미친…….”

페이진이 면박을 주려는 찰나, 카츠미가 양손으로 일본도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작하죠.”

체스판을 한가운데 둔 채 태일과 페이진, 카츠미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결투를 시작합니다.”

입회자의 팔이 올라가고…….

“3, 2, 1…….”

철컥! 찰칵!

“시작!”

파지직!!

제각기 무기를 치켜 든 페이진과 카츠미는 그대로 온몸이 마비된 채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오염된 50구역의 빗물은 전기전도율이 높다.

모두가 벙쪄 있는 가운데, 태일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이 환경은 내게 너무 유리하다고.”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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