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0화 (21/220)

20화 레미제라블 (3)

평행 세계[Parallel World].

태일은 자신이 겪은 두 개의 세계에 대해 그밖에 다른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다.

사라지지 않은 50구역 LAPD, 명맥을 유지한 마피아.

전혀 다른 역사를 가졌다.

인간을 대신하여 일하는 메타휴먼.

전혀 다른 경제를 가졌다.

여전히 남아 있는 산업 시대의 유물, 리볼버와 증기기관차.

전혀 다른 환경을 지녔다.

하지만 그런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분명 50구역이었다.

“앉게.”

세 명의 남자 중 하나가 변조된 목소리로 태일에게 원탁 앞 비어 있는 자리를 권한다.

태일은 지금 이 순간, 두 세계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었다.

다른 쪽 세계에서는 태일 그 자신이 과거 레지스탕스의 대원이었으니까.

‘같지만…….’

셋을 유심히 바라본다.

셋은 목소리 변조 장치가 장착된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한때 태일도 사용하던 물건이다.

‘…다르군.’

원탁 외에 아무것도 없는 비밀 공간을 살핀다.

공간 자체가 엉성하게 지어진 탓에 공기 중에 흙먼지가 휘날리고 있었다.

적어도 태일은 이런 토굴을 만들어 숨어 지내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 세 사람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마피아의 그것과 차라리 더 닮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들, 정말 레지스탕스 조직원인가?”

“…그렇게도 불리지.”

태일에게 자리를 권한 남자가 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세연을 찾고 있다지?”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질문에 태일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는데, 레미제라블에 도청 장치까지 설치했나? 세연이가 알면 펄펄 뛰겠군.”

레미제라블의 손님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손님들의 비밀을 지켜 준다는 바의 원칙 덕분이었고, 세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부는 그런 세연의 의도 따위 아랑곳 않은 채 그녀의 소중한 공간에 도청 장치 따위를 박아 두고 있었다.

하긴 바의 창고에 무기들을 잔뜩 숨겨 놓은 순간부터 이미 글러먹은 것이지만.

새삼 입맛이 썼다.

“한세연과 당신이 연인 관계라는 증거가 있나?”

남자가 거듭 질문했다.

변조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감추지 못한 조바심이 빤히 드러났다.

태일은 원탁 위에 자신의 품 안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말없이 꺼내 내보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 모인다.

“이건…….”

그들 역시 세연에 대한 증명에 있어 그 이상의 징표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연이 가진 회중시계는 세상에서 유일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녀와 가장 최근에 만난 게 언제이지?”

빤히 드러나는 그들의 조급함에, 반대로 여유가 생긴 태일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당신들도 세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 난 취조나 받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

레지스탕스 역시 세연의 행방을 찾고 있다. 아마 세연은 레지스탕스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태일의 혁명군에서 그랬듯.

태일은 회중시계를 다시 품속에 넣은 뒤, 셋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두면 50구역은 한 달 이내 지옥이 된다.”

“웃기는 협박이군.”

우측에 앉은 남자가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태일의 경고를 묵살했다.

“이미 50구역은 지옥이야.”

LAPD의 요한이 한 말과 정확히 같다.

태일은 순간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50구역의 사람들은 각자의 지옥을 살아간다. 경찰부터 레지스탕스 대원까지, 모두가 자신이 몸담은 세계야말로 최악이라 자위하고, 그 이상의 최악을 생각할 상상력을 상실했다.

그러는 사이, 진정한 지옥이 코앞까지 닥쳐왔다.

태일은 50구역이 폐허가 되었을 당시, 레지스탕스 대장이었던 남자의 고백을 기억하고 있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지하에 생쥐처럼 숨어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토록 되찾고 싶어 한 땅에 풀 한 포기 남지 않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대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우리의 영혼은 이미 그때 죽어 버렸다네.”

진짜 지옥은 그런 것을 말한다.

되찾을 것조차 없어져 버린 가운데, 아무런 희망이나 목적도 없는 상태.

“만에 하나 내가 우려하는 사태가 터진다면,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장담하지.”

정중앙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배짱은 인정하네만, 너무 날뛰었어. 드림 코퍼레이션의 표적이 되더니, 천중회 놈들에게 시비를 걸기까지 했지. 지금 이 시간에도 수백, 아니, 수천의 사람들이 자네를 노리고 있을 거네.”

우측의 남자가 한마디를 보탰다.

“이곳에서 나가는 순간, 그 많은 총구들이 오로지 당신을 노리겠지.”

태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겠지. 50구역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샬롯부터 날려 버렸으니까.”

“……!”

가면 뒤쪽으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태일은 순간적으로 내비친 당혹감을 똑똑히 보았다.

하긴, 태일이 혼자 극단을 박살 내던 당시, 목격자는 태일이 구출한 아이들과 변호사 제인뿐이었다. 오히려 그걸 일찌감치 파악한 옷가게 마담이 대단한 것일 게다.

태일은 지금 이 순간, 50구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였다.

눈앞에 있는 태일의 존재감을 그제야 실감한 세 사람은 한동안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태일은 태연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태일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였다. 그러니 굳이 손바닥만 한 50구역에서 수배된다 한들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중앙의 남자가 다시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나를 엄호했던 그자를 빌려줘.”

드림 코퍼레이션 측의 암살자를 저격한 자.

태일은 그의 실력에 대해 대강 파악했고,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의 조력자면 충분했다.

줄곧 말이 없던 좌측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뭘 어쩔 생각이냐?”

“레이한테 이미 전해 들은 거 아니었나? 마피아들을 중재할 생각인데.”

“제정신이 아니군.”

태일은 미쳤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고, 굳이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하긴 그렇지.”

좌측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더니,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상 몸을 일으킨 그는 태일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정중앙의 남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태일을 엄호한 뒤, 경고를 남긴 남자. 그는 줄곧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나머지 두 사람을 경호하기 위해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일 터였다.

“…괜찮겠나?”

중앙의 남자가 묻는다.

“너무 위험합니다. 무모해요.”

우측의 남자가 반대한다.

그러나 태일이 대답을 대신했다.

“레지스탕스가 안전하고 합리적인 일만 하는 조직이던가? 뭐, 너무 걱정 마. 적어도 레지스탕스에 나쁠 일은 없을 거다.”

중앙의 남자와 우측의 남자가 태일을 바라보았다. 가면에 가려 그들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뒤의 표정을 알 것도 같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짧게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태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빠른 판단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잠시 뒤, 태일은 자신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지?”

이름 대신 호명할 명칭을 묻는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이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애당초 신분이라는 것이 없는 이들의 조직이니까. 태일 역시 수많은 가명들을 사용했고, 심지어 ‘신태일’이라는 이름조차 가장 마지막 순간 사용한 가명일 뿐이었다.

“민호라고 불러라.”

의외로 흔하고 소박한 이름에 태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 * *

토굴을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이었다.

태일과 민호는 그중 냄새나는 배수로를 통과하여 덮개를 열고 어두운 골목 한가운데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배수로를 통과하는 사이, 모처럼 얻은 옷에 하수구 냄새가 짙게 배어 버렸다.

태일은 혀를 차며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는 민호를 불만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이 길이 최선이야?”

“당신이 준 지도에 따르면 그래. 서둘러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우가 엉성하게 그려 준 지도.

태일은 공장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를 민호에게 건네며 서둘러야 한다고 독촉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레미제라블로 통하는 멀쩡한 길을 내버려 두고 굳이 하수구를 통과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민호가 앞장서서 걸었으니, 불만을 내뱉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저 건물이다.”

민호는 무뚝뚝한 대답과 함께 구석진 곳의 붉은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창문이 부서져 있고, 피 냄새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샬롯이 만든 두 번째 소울벌룬 공장.

페노제가 붕괴되던 당시, 샬롯은 그녀를 데리고 탈출한 페노제의 행동대장, 킬러베어에게 공장을 맡겼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그는 샬롯의 죽음 뒤 사방에서 밀려온 하이에나 떼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이에나들은 이제 공정을 굴릴 수 있는 아이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날뛰고 있었다.

“그래, 고맙군.”

태일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천천히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민호가 그런 태일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나?”

“왜? 내가 당하기라도 할까 봐?”

“…….”

민호는 여전히 하얀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렇기에 녀석의 말속에 담긴 감정이 우려인지, 아니면 호기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알 수 있다.

아마 태일의 역량을 직접 확인한 뒤, 레지스탕스 지도부에 보고하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그러나 태일은 자신의 꽁무니나 따라오게 하려고 그를 빌려온 게 아니었다.

“넌 가서 애들이나 지켜.”

아무리 공정을 때려 부순다 한들 아이들을 빼앗긴다면 의미가 없었다.

50구역에서 소울벌룬이 아예 자취를 감추게 만들려면, 공장과 아이 모두를 마피아의 손에서 떼어놓아야 한다.

“중앙역 안에 모여 있을 거다. 애들 너무 놀라게 하지 말고, 적당히 엄호만 하면 돼.”

일이 터졌을 경우, 능력을 사용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앨리스에게 방법을 알려 주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별 신호가 없으니, 여전히 중앙역 안에 숨어 있을 터였다.

“알겠다. 받아.”

민호가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더니, 태일에게 건넸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3번 채널이다.”

또다시 산업 시대의 유물이 등장했다. 저쪽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쓰지 않던 물건. 태일은 무전기의 존재 자체가 신기해 좌우를 뜯어보았다.

“뭐… 그래. 고맙군.”

민호라는 녀석, 무뚝뚝한 말투에 요령도 없지만, 꽤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민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뒤,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멀어졌다.

드림 코퍼레이션에서 붙인 히트맨을 은밀히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이니, 아이들을 지키는 데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멀어지는 민호의 뒷모습을 확인한 태일이 무전기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붉은 벽돌의 공장을 바라보았다.

현재 이 일에 개입된 집단은 최소 셋 이상이었다.

자신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SB에 눈이 뒤집힌 50구역 마피아들, SB의 재료를 버젓이 팔아먹는 드림 코퍼레이션, 그리고 레이를 비롯한 히트맨들.

그들 중 일부가, 혹은 전부가 눈앞의 붉은 벽돌 건물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태일은 마치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것처럼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문을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꺼내 물었다. 이번에도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깨어진 2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쪽 세계에도 이런 건물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긴 이곳은 다른 세계이니, 애당초 그런 의문은 의미가 없었다.

쏴아아―

태일이 막 움직이려는 찰나, 빗줄기가 거칠어졌다. 덕분에 태일의 몸에 배인 하수구 냄새가 씻겨 간다.

불현듯 레미제라블에 두고 온 비닐우산이 생각났다.

‘일을 마치고 나서 다시 찾아와야겠군.’

날씨가 제멋대로인 50구역에서 우산은 필수품이었다.

이제 자정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 남았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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